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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경북. 울산

선비들의 옛길, 문경새재를 넘다.

by 혜강(惠江) 2012. 1. 17.

 

경북 문경 새재

선비들의 옛길, 문경새재를 넘다.

중부와 영남을 잇는 교통의 요지이자 군사 요충지 

 

 

·사진 남상학

 

 

 

 

 

  문경새재도립공원에서 백두대간의 조령산 마루를 넘는 재(조령, 642m)는 이화령 북쪽 약 7km 지점인 신선봉(967m)과 조령산(1,017m) 사이에 있다.  예로부터 한강과 낙동강 유역을 잇는 영남대로 상의 가장 높고 험한 고개였다.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 억새풀이 우거진 고개, 또는 하늘재와 이우릿재(이화령) 사이, 새로 된 고개 등그 의미도 다양하다. 

 

  철도교통 이전에는 중부지방과 영남지방을 잇는 교통의 요지였으며, 험한 지세를 이용했던 군사상의 요충지였다. 본래 양반이 다녔던 옛 고개와 보부상들이 다녔던 큰고개·작은고개, 평민들이 다녔던 가장 험준한 하늘고개 등 4개의 고개가 있었다.  

 

  이 고개를 이루는 산릉은 남북으로 뻗어 있으며, 정상의 제3관문인 조령관을 기준으로 남쪽은 경상북도 문경 땅이고 북쪽은 충청북도 충주 땅이다. 이곳에서 북쪽으로는 마페봉을 지나 북암문, 동암문, 부봉, 영봉, 주흘산으로 가고 남쪽으로는 깃대봉, 조령산 공산진, 이화령으로 이어진다.  주흘산과 조령산 일대는 울창한 숲과 계곡이 어우러져 등산객들의 더위를 식혀주며, 특히 가을단풍과 겨울설경이 빼어나다. 

 

 

 

  동쪽 산곡의 조령천을 따라 나 있는 옛 길에 1708년(숙종 34) 남북 8km를 돌로 쌓고 길 중간에 조령 제1·2·3관문인 주흘관, 조곡관, 조령관 등 3개의 관문(사적 제147호)을 설치하고 국방의 요새로 삼았다. 이 관문들은 영남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로서 박달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다.

  나는 새해 첫 산행의 장소로 좋은벗님네와 함께 ‘선비들의 옛길, 문경새재 길’을 걷기로 했다. 평생 학생들의 교육에 종사한 사람들로서는 학문을 연마하여 청운의 뜻을 품고 한양을 오르던 선비들의 길을 걷는다는 것이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한 것이다. 또 그 길은 걷기가 완만하여 칠십 고령자에게는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안성맞춤의 길이었기 때문이다.     

  문경새재도립공원 입구 근처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좌측 조령산(1,026m), 우측 주흘산(1,106m) 사이로 흐르는 계곡을 따라 첫발을 내디뎠다.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칼바람이 얼굴을 사정없이 할퀸다. 고개를 드니 백두대간 정맥이 잠시 자세를 낮춘 듯한 산세로 다가온다.  


계곡을 따라 조성된 자연생태공원

  

 

 

  문경새재길을 걷기 전에 먼저 주차장 옆 개천 너머 문경새재 유스호스텔 쪽으로 다리를 건너 자연생태공원을 둘러보았다. 이곳 생태습지, 생태연못, 건생초지원, 습생초지원, 야생화원 등은 생태학습을 보고 배우도록 문경시에서 조성해 놓은 현장이다. 개천을 따라 걸으며 자연생태공원을 둘러볼 수 있도록 산책로(나무데크)를 마련해 놓았다. 

 

  다시 다리를 건너와 관광안내소와 옛길박물관을 끼고 문경새재로 들어가는 초입에서 신길원 현감비와 ‘선비의 상’을 만났다. 과거 선비의 지성과 인격을 본받아 역사의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고 미래를 창조하자는 취지에서 세운 것일 게다.

 

  속설에 추풍령은 ‘나뭇잎 떨어지듯 낙방한다’, 죽령은 ‘대나무에 미끄러지듯 낙방한다’고 전해지니, 아마도 선비들은 문경새재만을 고집해 한양을 가려 했을 것이다. 물론 선비 외에도 보부상, 나그네, 고향으로 내려가는 사람 등등 많은 선인의 발길이 문경새재를 넘고 다시 넘었을 것이다. 


  옛길박물관은 ‘길’이라는 주제의 국내 유일 박물관이다. 길 위 삶이 고스란히 모여있다. 하늘재, 토끼비리, 하늘재, 유곡역 등 문경새재와 관련된 옛길 정보가 한곳에 모여 있다. 옛사람들은 여행을 떠날 때 무엇을 준비했을까. 보부상의 짐에는 무엇이 있을까.  

 

  이런 궁금증은 옛길박물관에서 깔끔하게 해소된다. 길 위를 떠날 수 없었던 보부상의 모습, 휴대용 고지도를 들고 팔도에서 떠돌던 나그네의 모습 등을 상상케 하는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왕명서 ‘유지’, 침식 제공문서 ‘노문’, 엽전, 나침반, 호패 등 생생한 자료가 가득이다. 

 

 

선비들이 한양으로 오르던 과거길

 

 

 

  시원히 뚫린 길을 걸어오르면 멀리 제1관문 ‘주흘관’이 위풍당당하게 서있다. 그런데 주흘관보다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진입로 옆에 떡 버티고 선 장승과 감나무 한 그루다. 주위를 둘러싼 산도 모자라 성을 지키는 파수병을 세운 것인가.  그 때문인지 오늘따라 큰 거목이 문경새재의 위압감을 더한다. 또 넓은 잔디밭 왼쪽에는 옛날 성을 지키고 공격하는데 쓰였을 법한 무기(?)들이 성문 앞에 전시되어 눈길을 끈다.  


   영남 제1관문인 주흘관(主屹關) 아래로 들어섰다. 주흘관은 새재 입구에 있는 성문으로 사적 제147호로 지정돼 있다. 숙종 34년(1708년)에 축조하였고, 영조 때에 조령진이 설치돼 문경현감이 수성장을 겸했으며 한말 항일의병 전쟁 때에 일본군이 불태웠던 문루를 1922년에 다시 지었다.  정면 3칸, 측면 2칸, 협문이 2개가 있고 팔작지붕이며 홍예문과 부속산성과 함께 개울물을 흘려보내는 수구문이 있으며 3개의 관문 중 보전상태가 가장 양호하다.

 

 

<출처> 1970. 1. 2 / 서울신문

 

 


  주흘관을 빠져나가니 우측으로 타임캡슐 광장이 있고 좌측으로는 맨발로 걷는 건강걷기 길을 조성했다. 울창한 나무가 그리운 숲 사이로 난 뽀얀 황톳길이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가라앉혀 준다. 문경새재 길은 다른 지역과는 달리 옛길을 살린 황톳길이다.

 

  1976년 국무회의 자료에 의하면,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이(문경새재) 고갯길은 절대 포장하지 마시오” 라고 지시함으로써 일일이 손으로 돌을 치우고 황토를 깔아 만들고, 이후 문경시의 정성스런 관리로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 이 산의 대표적인 등산로는 제1관문으로부터 시작한다. 여궁폭포-혜국사-샘터-주흘산 정상-제2관문으로 이어지는 길이며, 주변에는 부봉·미역봉·조령계곡·주흘계곡·조령산성·군막터·쌍용폭포·팔왕폭포·대궐터·뱀바위 등이 절경을 이룬다. 

 

  제1관문에서 제2관문 사이의 거리는 약 3㎞. 최근 문경새재 길 초입 왼쪽에는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문경새재 KBS촬영장이 들어서 있다. 2만여 평의 부지에 광화문, 근정문, 사정전, 강년전, 교태전, 천추전 등 A구역과 궐내객사, 동궁 등의 B구역, 양반촌 등의 C구역, 초가촌 등 모두 네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2000년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한 '태조왕건'의 사극을 비롯하여 ‘추노’ ‘불멸의 이순신’ ‘대왕세종’ 등 드라마가 촬영되었다. 고려시대 사극촬영장으로, 조선시대 민속촌을 겸한 사극촬영 중심의 테마관광지로 크게 각광받고 있다. 개천 건너 KBS촬영장 건물이 보인다.

 

 

 

 

  새재길을 오르는 길목에는 선정비군(善政碑群), 우측 주흘산 방면으로 1.2km 거리에 혜국사가 있다. 혜국사는문경새재에 자주 출몰하던 산 도둑과 인연이 깊은 곳이다.  혜국사 주변 지리는 매우 험준해 산 도둑의 활동지로 제격이었고 때때로 점령당하기도 했다. 그래서 길동무 없는 행인들은 길목에서 산 도둑에게 붙잡혀 통행료 명목의 돈을 내야 했다. 


  혜국사 입구를 지나면 계곡 좌측으로는 넓은 개천이 시작되고 우측으로 바위 절벽이다. 지름틀바위가 길손의 눈을 사로잡는다. '지름'은 '기름'의 지방말로 바위모양이 기름을 짜는 틀과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어 돌을 이용하여 산처럼 쌓아놓은 조산(造山), 주변의 돌들을 모아 인공적으로 쌓아놓고 그 옆에 쉼터를 조성해 놓았다. 

 

 


  조금만 오르면 조령원터, 조령원터는 조선시대 공무출장으로 관리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던 시설이다. 한양가는 길목에 자리 잡고 있어 많은 길손들이 드나들던 곳인데, 조선후기에는 일반인도 이용할 수 있어서 물물교환의 장소로 활용되기도 했다고 한다. 돌담장의 규모로 보아 큰 건물지였음을 짐작케 한다.  

 

 

   
  조령원터 앞을 지나면 좌측으로 소나무 숲이다. 거대한 소나무에는 큰 줄기에 상처 난 것들이 있다. 1943년~1945년 사이에 일본군이 주민들을 동원해 송진을 채취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았다. 약 반세기가 지났음에도 상처는 그대로 남은 보는 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특히 숲 속 이곳저곳에 흩어진 큰  바위들은 그 옛날 행인을 습격하기 위하여 산적들이 몸을 은신했던 것이라고 한다. 웬지 숲속의 바위들이 예사롭지 않다. 순간 바위에 숨었던 산적들이 함성을 지르며 달려올 듯하다.  

 

  이어서 좌측으로 짚으로 지붕을 이은 주막(酒幕), 당시 오가는 길손들의 위안이 되었었던 주막을 재현해 놓은 곳이다. 길손들은 잠시 이곳에 들러 한 잔 술을 기울이며 피곤한 몸을 풀었을 것이다.  

 

 

 

  주막 입구에는 세종 때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이었던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1435년~1493)의 시 ‘踰鳥嶺 宿村家-새재를 넘어 시골집에 묵다“라는 시를 새긴 돌비가 길손을 반긴다. 



   새재는 남북과 동서를 나누는데

   그 길은 아득한 청산으로 들어가네 

   이 좋은 봄날에도 고향으로 못 가는데
   소쩍새만 울며불며 새벽바람 맞는구나


     嶺分南北與西東(영분남북여서동) 

     路入靑山縹渺中(로입청산표묘중)        

     春好嶺南歸不得(춘호영남귀불득)       

     鷓鴣啼盡五更風(자고제진오경풍)    

 

 



  김시습도 이 길을 걷다 주막에 머물며 그의 애틋한 심경을 노래했던 것이다. 그런데 주막은 복원되었지만, 지금 주막은 텅 비어 있다. 이곳에선 특별한 행사 때 공연과 차 시음회가 열린다고 하는데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에게는 아쉬움이 크다.

 

 

주인 없는 주막(酒幕)엔  찬바람만 가득

 

 

 

 

  옛길을 복원하는 김에 허기를 달래며 술 한장 겯들이던 옛 주막을 재현하여 이용하게 하였다면 얼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국립공원의 산중이라 곤란하다면, 테이크아웃 커피점처럼 대안을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어디든 멀찌감치 통한다는  

  길 옆  주막
  그  수없이 입술이 닿은 

  이 빠진 낡은 사발에 

  나도 입술을 댄다.
  흡사  정처럼 옮아오는 

  막걸리 맛
  여기  대대로 슬픈 노정(路程)이 집산(集散)하고 

  알맞은 자리, 저만치  위엄 있는 송덕비(頌德碑) 위로 

  맵고도 쓴 시간이 흘러가고…….
  세월이여!
  소금보다 짜다는 인생을 안주하여 

  주막을 나서면 노을 비낀 길은 

  가없이 길고 가늘더라만
  내 입술이 닿은

  그런 사발에 

  누가 또한 닿으랴 이런 무렵에~



  이 시는 김용호의 '주막에서'(1956년)라는 시다. 주막은 예나 이제나 길손이 잠시 머물며 고달픈 삶의 여정을 읊어보기에 좋은 곳이다.  주막을 지나면 용추, 암수 두 마리의 용이 암반을 뚫고 승천했다는 전설이 있는 아주 멋진 계곡이다.   동국여지승람」문경현편에는 “새재 밑의 동화원 서북쪽 1리에  폭포가 있는데 사면과 밑이 모두 돌이고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으며, 용이 오른 곳이라고 전한다.”라고 하였다.

 

 

 

  이곳 바위에는 ‘용추(龍湫)’라는 큰 글씨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는데, 이는 숙종(肅宗) 25년(己卯, 1699)에 구지정(具志禎)이라는 사람이 새긴 것이라고 한다. 

 

 

문경새재의 경승지, 용추(龍湫)

 

 

 

 

  새재계곡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승지(景勝地)라 그런지 예로부터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비롯한 많은 시인(詩人)이나 묵객(墨客)이 이곳 용추를 지나면서 많은 글을 남겼다. 그 중에서 세조 때의 문신 권오복.(權五福)의 시 한 편. 

 

  쳐다보니 새재 길 아득히 멀고 

  굽어보니 구불구불 열 두 구비라.

  여기 이곳 용담폭포 참으로 볼만한데

  폭포 소리 물보라 앞 다투어 일어나네.

 

     仰看鳥道三千丈(앙간조도삼천장)

     下視羊腸十二回(하시양장십이회)

     是處龍潭天下壯(시처용담천하장)

     怒雷飛雨一時催(노뢰비우일시최) 

 

         - 권오복의 “聞慶龍潭瀑布(문경용담폭포) -

 

 

교귀정과 소나무

 

 

 

  이 계곡에는 전설이 깃든 꾸꾸리바위 등 많은 바위들이 있다. 또 용추 언저리에 자태가 의연한 소나무 한그루, 그 옆에 바람 한줌에도 날아갈듯 가뿐한 정자가 터를 잡고 있다. 교귀정(交龜亭)이다. 


  정면 3칸 측면 1칸인 정자는 1470년경 조선 9대 임금 성종 초에 건립되었다고 한다. 정자는 낙락장송 소나무와 어을려 지나는 길손들의 발목을 잡아 옛 영화를 소곤소곤 이야기 하는 듯하다.  ‘새재용추정(鳥嶺龍湫亭)’이란 제목의 시는,

 

  어느 누가 외진 여기 정자를 지었는지 

  우뚝한 난간에 기댄 가슴 떨리네. 

  하늘은 벼랑 열어 기운을 더해주고  

  대지는 몸을 갈라 신령을 안았도다  

 

  깊고 깊은 골짜기엔 물보라 가득하고  

  맑디맑은 하늘인데 우레소리 은은하다  

  구름 걷힌 봉우리 푸른 빛 새로워  

  온 세상에 활짝 핀 무궁화 같구나.’

 

 

 

  라고 읊고 있다.   교귀정은 새로 온 경상감사와 떠날 경상감사가 만나 인수인계를 하던 장소 곧 교인처(交印處)다.  이렇게 멋진 풍경을 지닌 곳에서 이임식을 했을 풍경이 그려진다. 경상감사 도임행차시 300명 정도로 행차 인원이 구성되었다는데 이 옛길을 그 정도의 대규모 인원이 행차식을 거행했으면 꽤나 볼만한 장관이었겠다. 

  이어 옛 과거길(동화원)이란 표지판을 끼고 오르면 길 왼쪽으로 정성스럽게 쌓아 올린 돌탑이 보인다. ‘소원성취탑’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청운의 뜻을 품고 문경새재를 지어야 했던 젊은 선비의 소망을 차곡차곡 쌓아올린 탑이 아니겠는가.

 

 

 

  최초의 한글비로 추정되는 ‘산불됴심’비를 지나면 응암폭포가 제격이다. 폭포 앞으로 운치 있는 물레방아가 있다. 연이어 조곡폭포가 나타난다. 조곡폭포는 산수 수려한 주흘산 깊은 계곡에서 떨어지는 20m의 3단 폭포인데 겨울 가뭄 탓인지 폭포는 벌거숭이인 채로 그 몸을 송두리째 드러내고 있다.  


  왼편의 백두대간이 점점 가까이 붙어온다. 첩첩산중의 가운데로 가고 있음이 분명하다. ‘제2관문이 가깝다’ 조곡교를 건너며 주위를 살피니 봉우리에 봉우리가 얹힌 험준한 산세, 끝이 없다. 주변 경치에 잊고 있던 위엄이 새롭게 느껴진다. 

 

  양쪽 절벽이 깎아지른 듯 솟아 있는 제2관문인 조곡관(鳥谷關)은 중성이라고도 한다. 그만큼 조곡관은 문경새재 구간 중 특히 비좁은 곳에 지어졌다.

 

 

 

  계곡을 앞에 두고 지어졌으니 방어적 요충지로 여기만 한 곳이 더 있을까. 넓은 터, 길게 이어진 성곽이 한눈에 들어오던 주흘관과 크게 다른 분위기다. 

 

  조선 선조 27년(1594)에 충주인 신충원이 축성한 조곡관은 숙종조에 관방을 설치할 때 옛 성을 개축했으나 관은 영성(3관문)과 초곡성 (1관문)에만 설치하고 이곳에는 조동문을 설치했으며 1907년 훼손돼 1978년에 복원했다. 이렇게 복원한 문루를 옛 이름 ‘조동문’이라 하지 않고 조곡관이라 개칭했다. 조곡약수가 바로 옆에 있다. 


  약수 한 모금 마시고 발길을 재촉했다. 조곡관까지 비교적 넓은 길에서 편하게 걸었다면, 이제부터는 좀 더 좁아지고, 더 가파른 경사의 길로 돌입한다. 더욱 옛길 모습 원형에 가까운 모습이다. 옛 과거길 주위로 조선시대 선현의 한시들이 돌비에 새겨져 있다.

 

 

유생들의 애환이 서린 과거길

 

 

 

 

  추풍령, 죽령보다 문경새재 길을 고집한 유생들의 흔적이다. 새재를 노래한 선현의 마음, 과거를 앞둔 유생의 꿈과 애환이 시간을 넘어 전해진다. 깔끔하게 다듬어진 시비 앞에서 한 편의 시를 읽어본다.

 

 

  새재의 험한 산길 끝이 없는 길

  벼랑길 오솔길로 겨우겨우 지나가네

  차가운 바람은 솔숲을 흔드는데

  길손들 종일토록 돌길을 오가네.

 

  시내도 언덕도 하얗게 얼었는데

  눈 덮인 칡넝쿨엔 마른 잎 붙어있네.

  마침내 똑바로 새재를 벗어나니

  서울 쪽 하늘엔 초생달이 걸렸네.



    嶺路崎山虛苦不窮(영로기산허고불궁) 

    危橋側棧細相通(위교측잔세상통)   

    長風馬立松聲裏(장푸마립송성리)  

    盡日行人石氣中(진일행인석기중) 

    幽澗結氷厓共白(유간결빙애공백) 

    老藤經雪葉猶紅(노등경설엽유홍)    

    到頭正出鷄林界(도두정출계림계)

    西望京華月似弓(서망경화월사궁)        


  이 시는 다산 정약용이 쓴 “冬日領內赴京 踰鳥嶺作(겨울 날 서울 가는 길에 새재를 넘으며)”라는 작품이다. 눈 덮인 새재길을 잘 묘사하고 있다.  이어 자연석을 깎아 세운 문경새재아리랑비를 지난다.

 

 

 

‘문경새재 물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간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홍두깨 방망이 팔자 좋아/ 큰 애기 손질에 놀아난다/ 문경새재 넘어 갈제/ 구비야 구비야 눈물이 난다.’

 

  옛 영남의 선비들이 한양으로 과거 길을 나섰고, 영남의 보부상들이 무거운 봇짐을 이고 지고 ‘구비야 구비야 눈물이 난다’고 한탄하며 이 험준한 고갯길을 넘었을 것이다.

 

 

민족의 한(恨)이 서린 이진터(二陣址) 

 

 

 

  문경새재 아리랑비를 뒤로 하고 가파른 길을 오르면 이진터(二陣址). 문경새재 민요비와 동화원 사이에 있다. 이 이진터(二陣址)는 임진년(壬辰年:1592년) 왜장(倭將) 고니시유끼나가(小西行長)가 18,500 명의 왜군을 이끌고 문경새재를 넘고자 문경읍 진안리에 진을 치고 천혜의 요새인 새재를 정탐할 때 선조대왕의 명을 받은 신립(申砬)장군이 농민 모병군(募兵軍) 8,000명을 이끌고 대치하고자 제1진을 제1관문 부근에 배치하고 제2진의 본부를 이곳에 설치하였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그러나 신립장군은 새재에서 왜적을 막자는 김여물 부장 등 부하들의 극간을 무시하고 이곳 조령산 능선에 허수아비를 세워 초병으로 위장하고 충주 달천(탄금대) 강변으로 이동하여 배수진을 쳤으니 왜군 초병(哨兵)이 조선 초병 머리 위에 까마귀가 앉아 울고 가는 것을 보고 왜군이 새재를 넘었다고 한다.

  한편 탄금대에서 배수의 진을 친 신립장군의 조선 농민군은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을 맞아 끝까지 싸웠으나 모두 장렬히 전사하였으며 이곳을 지키지 못한 것을 매우 안타까운움이 이 곳에 서려있다.  

  더 걷다보면 두 갈래길이 나온다. 인적이 드문 길은 장원급제길, 넓은 길은 금의환향길이라 이름 붙여놓았다. 조선조 선비들이 장원급제를 꿈꾸며 과거차 한양으로 넘나들던 옛적 그대로의 길이다. 문경의 옛 지명이  '기쁜 소식을 듣게 된다'는 ‘문희(聞喜)’에서 드러나듯 조선조 선비들이 장원급제를 꿈꾸며 과거보러 한양으로 넘나 들던 옛적 과거 길이다. 택리지에 조선 선비의 반이 영남에서 배출되었다"라는 구절이 있음을 볼 때 참으로 수많은 선비와 길손들이 이 곳을 왕래하였음을 헤아릴 수 있다. 

 

 

문경새재를 넘기 전 휴식처 동화원터 

 

 

 

 

  문경새재 동화원(桐華院)은 제3관문 못 미쳐 있는 새재의 마지막으로 조령원과 함께 길손들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쉬어가도록 하던 곳이다. 동화원은 높은 곳에서 보면 해가 뜨는 것이 보이고, 산에 꽃이 많이 피어 화려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97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화전민이 많이 거주하여 조령초등학교 분교가 있었던 곳이다.

 

  70년대 이후 화전민 이주정책에 따라 많은 이들이 이곳을 떠났고, 15여 년 전까지만 해도 몇 가구가 살고 있었으나, 현재는 모두 떠나고 한 가구만이 이곳에서 여행객들을 상대로 산장을 운영하고 있다.

 

  이곳에 화전민이 살던 귀틀집이 남아 있다. 우리 방식으로 나무들을 눕혀 쌓아올려 만든 한국식 통나무집이다. 나무와 나무 사이, 아귀가 잘 맞고 틈마다 진흙을 정성스레 발라놓았다. 


  문경새재 동화원 인근은 ‘낙동강발원지’로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세종실록지리지(1454년) 경상도편에 의하면, 낙동강의 발원지는 “봉화현 태백산 황지, 문경현 북쪽 초점, 순흥 소백산이며 이 세 군데에서 흐르는 물이 상주에 이르러 낙동강이 되었다.”라는 역사적 기록이 있다.

 

  예로부터 우리의 역사는 물 따라 길 따라 이루어져 왔고, 서민들의 애환과 삶의 질곡도 이 속에 담겨서 흘러왔다. 이곳 낙동강발원지는 연못 1개소와 표지석 등을 설치하고 주변 경관을 아담하게 조성해 놓았다.


  이어 동화원터를 오른쪽으로 두고 위로 올라간다. 동화원을 지나 제3관문 아래쪽에 최근 돌무더기가 새로 생겨났다. 이 돌무더기는 문경시가 일부 주민들 사이에 구전돼 오던 전설에 따라 장원급제의 소원을 들어준다는 ‘책바위’를 재현해 놓은 곳이다. 전설에 의하면, 집 주위의 담을 헐어 그 돌을 문경새재 책바위 뒤에 쌓았더니 몸이 튼튼해지고, 장원급제하게 됐다고 한다.

 

 

 

장원급제의 소원이 서린 책바위

 

  이후 문경새재를 넘어 과거를 보러가던 선비들은 하나같이 장원급제의 소원을 이 책바위에다 빌며 과거길을 재촉했다는 전설이 구전돼 내려왔다. 입시철이면 합격을 비는 사람들이 이 책바위를 찾아온다. 문경시는 입시철 책바위를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최근 책바위 뒤의 돌무더기를 다시 만들어 관광객이나 수험생 등이 쉽게 찾아볼 수 있도록 했다.  길은 책바위부터 제3관문까지 제일 가파른 편이다. 가쁜 숨을 고르고 고개를 드니 제3관문 ‘조령관’이다. 제2관문인 조곡관에서 3.5㎞지점이다.

 

 

 

문경새재 정상에 선 조령관 

 

  제3관문 조령관(鳥嶺關)은 새재 정상에 북쪽의 적을 막기 위해 선조 때 쌓고 숙종초(숙종 34년 1708)에 중창했다. 1907년 훼손돼 육축만 남고 불탄 것을 1976년 홍예문과 석성, 누각을 복원했고, 사적 제147호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새재길을 다 걸었다는 성취감은 바로 과거길의 선비들에게는 마음을 다시 다지는 기회가 되었으리라. ‘꼭 급제하고 말리라’는 다짐과 함께 다시 힘겨운 발걸음을 이어갔을 모습이 떠오른다.

 

 

 

산책로

문경새재 관리사무소, 신길원현감비(0.2km) → 새재박물관(0.3km) → 장승공원(0.4km) → 제1 관문, 타임캡슐, 선정비군(0.5km) → KBS 촬영장(0.9km) → 조산폭포(1.4km) → 지름털바위(1.6km) → 조령원터(1.8km) → 마당바위, 상처난소나무(2.1km) → 주막(2.4km) → 용추, 교귀정(2.6km) → 꾸구리바위(2.8km) → 소원성취탑, 산불됴심비(3.15km) → 폭포(3.3km) → 제2관문, 조곡약수(3.5km) → 문경새재 아리랑비(4.1km) → 이진터(4.5km) → 동화원(5.8km) → 장원급제길(6.5km) → 제3관문, 군막
터(7.0km)

 

 

  좋은벗님네들은 문경새재길을 걸으며 금년 한 해도 언어행실에 부끄럼 없이 즐겁고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소원해 본다. 청운의 꿈을 품고 한양으로 오르던 선비들이 소원을 빌었듯이 말이다.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려는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돌보심이 함께 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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