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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경북. 울산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紹修書院) 답사

by 혜강(惠江) 2011. 11. 4.

 

경북 영주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紹修書院) 답사

 

- 소수박물관과 선비촌, 그리고 한국선비문화수련원 -

 


 
글·사진 남상학

 

 

 

 

 

    가을이 무르익은 날 풍기에서 부석사로 가는 길은 빨간 사과밭 일색이다. 한참을 달리다 보면 우측 멀리 울창한 솔숲이 보이고 소수서원(紹修書院)은 그 속에 있다.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소수서원은 최초로 국학의 제도를 본떠 선현을 제사지내고 유생들을 교육한 서원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는 사적 제55호로 지정되어 있다. 서울을 비롯한 단양 이북의 경기, 강원에서 간다면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풍기나들목에서 나가는 게 가장 빠르다. 풍기나들목을 나와 풍기시내방향으로 직진하면 순흥 방향의 931번 도로가 바로 이어진다. 이를 타고 부석사 이정표를 따라 가다가 순흥면 소재지 입구를 지나면 바로 오른쪽에 소수서원을 만난다.

 


  소수서원은 1542년 당시 풍기군수였던 주세붕(周世鵬)이 풍기지방의 교화를 위해 이곳 출신의 유학자인 안향(安珦)을 배향하는 사묘(祠廟)를 설립하면서 시작됏다. 주세붕은 이곳에서 유생과 더불어 토론을 벌이는 등 정성을 기울였고, 그 결과 유생들이 4~5년 만에 과거에 급제하여 사람들이 '입원자편급제'(入院者便及第)라고 부를 정도였다. 그 후 1543년(중종 38)에는 유생교육을 겸비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설립한다. 1544년에는 안축(安軸)과 안보(安補)를 추가 배향했다. 1546년(명종1)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한 안현(安玹)은 유생의 정원(10명), 공양절차(供養節次), 서원재정, 경리관계를 규정한 '사문입의'(斯文立義)를 만들어 서원의 경제적 기반을 확충하고 운영방책을 보완하는 데 주력했다. 백운동서원은 약 30결의 토지 및 18명의 노비, 4명의 원직(院直) 등을 소유함으로써 경제적 기반을 마련했다. 이 시기에는 서원이 사묘의 부속적인 존재로서 유생의 독서를 위한 건물로 생각되었으며, 과거공부 위주의 학교로 인식되고 있었다.

  이후 1550년에 퇴계 이황(李滉)이 풍기군수로 부임하면서 과거를 위한 독서보다는 수기(修己)·강명도학(講明道學) 위주로 변했다. 을사사화로 고초를 겪은 그는 군주를 보필하고 경륜을 펴기보다는 학문의 연구와 교화, 특히 후진의 양성을 통해 학파를 형성함으로써 향촌사회를 교화하고 나아가 장래의 정치를 지치(至治)로 이끌 인재를 확보하겠다는 생각에서 지방유생의 강학(講學)과 교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당시의 붕괴된 교학(敎學)을 진흥하고 사풍(士風)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서원의 보급이 시급하다고 주장하면서 백운동서원에 대해서 송나라의 예에 따라 사액(賜額)과 국가의 지원을 요청했던 것이다.  

 

 



  그의 노력에 따라 1550년에 조정으로부터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현판과 <사서오경>, 〈성리대전(性理大全)〉등의 서적과 노비 논밭을 하사받고 부역과 세금을 면제받게 됨으로써 최초의 사액 서원(賜額書院)이 된 것이다. 사액 서원이라 함은 나라로부터 책, 토지, 노비를 하사받아 면세, 면역의 특권을 가진 서원을 말하는 것으로, 당시 명종은 손수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편액 글씨를 직접 써서 하사하였다고 한다. 이로써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자 공인된 사학기관으로 인정되었다.

  여기서 '소수(紹修)'라 함은 '이미 무너진 교학을 닦게 하였음'이란 뜻인데 그간 소수서원이 학문 부흥에 업적을 평가받은 것이고, 또 그 의지를 높이 평가한다는 증표였던 것이다. 이로써 소수서원이 국가의 공인 하에 발전하고 보급되는 계기가 되었고, 사학으로서의 위치가 확고해지면서 풍기지역 사림(士林)의 집결소이자 향촌의 중심기구로 위치를 굳혔다. 1633년(인조 11)에 주세붕을 추가 배향했으며, 1868년(고종 5)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에도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였다.

 

 



  소수서원을 찾으면 먼저 시원스레 뻗어 올라간 울창한 송림에 반하게 된다. 솔향에 취하고 시원한 소나무그늘에 반해 잠시 걷다보면 두세 아름은 족히 되어 보이는 큰 은행나무가 솔숲 사이로 보인다. 그 뒤로 울창한 소나무에 가린 서원의 출입문과 정자가 보인다. 은행나무 앞으로는 이곳이 통일신라시대의 사찰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보물 제59호인 숙수사당간지주(宿水寺址幢竿支柱)가 서 있다. 당간지주는 절이 있었음을 알리는 이정표로 옛날 이곳에는 숙수사(宿水寺)라는 절이 있었다. 숙수사는 통일신라 초기에 창건된 대가람이다.

  아래쪽 죽계계곡의 끝자락인 죽계천이 흐른다. 죽계천은 멀리 초암계곡에서 발원한 계곡으로 주위의 바위가 병풍처럼 펼쳐져 있으며, 울창한 노송숲이 어우러져 절경을 빚어내고 있다. 죽계천 건너에는 ‘경(敬)’과 ‘백운동(白雲洞)’이라는 글씨가 음각된 바위가 있다. ‘경(敬)’자는 유교의 근본정신인 경천애인(敬天愛人)의 머리글자이며, 세조 3년(1457) 단종 복위운동 실패로 참절당한 여러 의사들의 시신을 죽계천 백운담에 수장시킨 후로는 밤마다 영혼들의 울음소리가 요란하므로 유생들이 밤출입을 꺼리자, 주세봉 선생이 영혼을 달래기 위하여 글자 위에 붉은 칠을 하여 제를 드리니 그때부터 울음이 그치게 되었다고 한다. 그 때 흘린 의사들의 피가 죽계천을 따라 이곳에서 약 7㎞ 떨어진 동네 앞까지 가서 멎었다고 해서 지금도 동네 이름을 ”피끝마을“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경자바위 아래쪽에는 취한대가 있다. 서원 경내로 들어서기 전 죽계천의 건너편에는 운치 있는 자태의 소나무에 둘러싸인 아담한 정자가 있다. 퇴계 이황 선생이 경자바위 윗부분에 터를 닦아 대를 쌓고 손수 소나무, 대나무, 잣나무를 심고 ‘취한대(翠寒臺)’라 이름 한 것을 본 받아 1986년에 신축한 건물이다. ‘취한대’란 이름은 푸른 연화산의 산 기운과 맑은 죽계천의 시원한 물빛에 취하여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긴다는 뜻에서 옛 시 송취한계(松翠寒溪)의 비취 ‘翠’와 차가울 ‘寒’자에서 따온 것이다. 취한대는 전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로 기둥과 기둥사이는 출입하는 전면 중앙 칸을 제외하고 모두 난간으로 막았다. 죽계수를 굽어보며 홀로 앉은 취한대는 산뜻하고 깨끗한 풍취를 자아낸다.

  소백산 남쪽 옛날 순흥 고을  죽계 찬 냇물 위에 흰 구름 드리웠네        
  인재 기르고 도를 밝힌 공 한없이 우뚝하고
  사당 세워 현자를 높임은 우리 나라 효시였네. 
  우러르고 사모하며 모여드는 저 인재들
  학문 닦는 것이 출세를 위함이 아니라네.         
  옛분 볼 수 없어도 그 마음 느껴지니
  차고 맑은 저 냇물에 휘영청 밝은 달빛      
  
  - 백운동서원 생도들에게 [白雲洞書院示諸生〕
          기유년 풍기군에 부임하여  퇴계 이황


 

                                              


   제법 풍취가 그럴듯하다. 가을이면 이곳에 단풍이 들어 아주 그럴듯한 풍광을 보여주기도 한다. 은행나무 뒤쪽이자 정문의 왼쪽에는 마치 일부러 조경해 놓은 듯 낮은 언덕배기가 있고, 수려한 소나무 대여섯 그루가 서 있다. 아울러 서원의 담장을 돌아가며 울창한 송림 숲이 조성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학자수라 불리는 적송 숲이 바로 그곳이다. 겨울을 이겨내는 소나무처럼 인생의 어려움을 이겨내는 참 선비가 되라고 이 소나무들을 학자수라 칭했다는 간판이 앞에 붙어 있다. 소수서원에서 가장 먼저 보게 되는 풍광이자 가장 오래도록 기억되는 풍경이 바로 이곳 학자수 송림이다.

 

 



  송림 아래로 소수서원의 정문이 아담하게 서 있는데, 그 오른쪽에는 경렴정이라 이름 붙은 정자가 있다. 죽계수를 마당으로 둔 정자다. 경렴정은 서원 유생들의 휴식을 위한 공간으로 시와 학문을 토론하던 곳이다. 경렴정에 앉아 죽계건너 연화봉을 마주하고 취한대 정자를 무심히 보고 있노라면 누구나 산이되고 물이되고 자연이 된다. 주신재와 퇴계는 이곳 경렴정의 경치에 취해 각각 시를 남긴다 

  산은 조심스레 서 있는데  시내(溪)는 하염없이 소리를 낸다 
  유인(幽人)은 마음에 느낌이 있어
  한밤 외딴 정자에 기대었네 

  - 신재 주세붕 

  풀에도 남모를 맑은 뜻이 있고
  시내도 다하지 않는 소리 머금없네 
  노니는 이 마치 믿지 못하는 듯 하지만
  맑은 깨끗하게 빈 정자하는 서 있네 
  산은 공경한 빛으로 섰으며
  시내는 미미한 소리로 흐르고 
  그윽한 사람 마음 모임이 있어
  반밤을 노은 정자에 의지했네 
  - 퇴계 이황 


  시냇물은 맑아 옥빛을 머금고
  소나무는 늙어 금성(金聲) 울리고 
  가을밤이 슥하도록 앉아서 기다리니
  산은 밝고 정자엔 달빛 가득하네 
  - 덕계(德溪) 오건(吳健)
 

 

 


  가을 경렴정엔 노오란 은행잎들이 지천으로 깔려 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떠나는 가을에 대한 애틋함 마저 느껴진다. 정자의 기왓골로 쏟아지는 햇살 그리고 은행잎들, 지난 세월이 바람처럼 잔잔하게 쌓여만가고 있는 백운동. 그 백운동이 뼈마디 시린 지난 시간들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죽계의 푸르름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정문을 들어서면 명륜당이 정면으로 서있다. 백운동 이라는 간판이 정면에 걸려있고, 건물 안쪽에 소수서원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선비들이 실제로 공부하던 건물이다. 명륜당 왼쪽에는 문성공묘가 있고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공부하는 선비들이 묶었던 직방재와 일신재가 一자모양으로 나란히 서 있으며, 그 아래쪽으로 학구제와 지락재가 서 있다. 이 건물들은 전부가 소수서원에서 공부하던 학생들이 머물던 곳이다. 지금의 기숙사와 같은 곳이라 하겠다.

 

 



  직방재 왼쪽에는 장서각이 있고 이곳에는 141종 563책의 장서가 있다. 장서각 뒤쪽이자 직방재 왼쪽 뒤편에 영정각이 있다. 영정각에는 중국과 한국의 이름 높은 유학자들의 영정들이 걸려있다. 주자와 노자, 퇴계와 안향, 로 지정되어 있다. 주세붕, 이덕형의 영정들이 이곳에 안치되어 있다.

 

국보 제111호인 회헌 영정(晦軒影幀), 보물 제485호인 대성지성 문선왕 전좌도(大成至聖文宣王殿座圖), 주세붕 영정(周世鵬影幀)은 보물 제717호로 지정되어 있다. 회헌 영정은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인 회헌 안향의 초상화이다. 안향은 문교진흥과 제자육성을 통해 학문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로, 고려 충숙왕이 왕명으로 초상화를 그리게 했다. 이 초상화는 모사본으로 안향의 고향인 홍주향교에 봉안했던 것이다. 화면은 상하로 구분되어, 상부에 찬문이 씌어져 있고, 하부에 화상이 그려져 있다. 또 대성지성 문선왕 전좌도는 문묘향교의 동·서무 위패배향식을 보여주는 의궤도이다. 1513년(중종8)에 제작된 이모본으로, 지본에 채색으로 그려졌으며 보존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단상 중앙의 공자를 중심으로, 제자들이 측면상을 이루고 있는 형태이다. 주세붕 영정은 반신상(半身像)의 초상화로서, 복식상의 특징이나 안면을 형용하는 필법에서 16세기 초상화의 양식을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

 

 



  학구재 뒤로 난 작은 문을 들어가면 소수서원에서 공부를 하고 안향선생이 제사를 올리던 모습들이 미니어처로 제작되어 있는 사료관이 있다. 다시 사료관 뒷문을 나가면 충효 교육관이 있고, 교육관 앞쪽의 문을 통해 계단을 내려서면 탁청지라는 연못이 있다. 탁청지를 지나면 죽계천에 걸린 다리가 아래위로 보인다. 뜰을 거닐며 안축의 시가 작품이 새겨진 돌비를 구경하는 것도 좋다. 소백산에서 시작하여 소수서원을 내려오는 죽계천은 풍광이 수려하여, 고려말 이곳 출신의 안축에 의해 '죽계별곡'이라는 걸출한 경기체가를 남기게 했다.

 

 



  아래쪽 다리를 넘으면 소수박물관으로 가게 되고, 위쪽의 다리건너에는 선비촌이다. 그리고 선비촌 위쪽에는 한국선비문화수련원이 있다.  소수박물관은 한국인의 정신세계를 지배한 유교(성리학)와 관련된 전통문화 유산을 체계화하고 민족정신의 뿌리를 찾아가는 공간이다. 공자로부터 출발한 유교 사상이 한국에 들어와 주자, 안향, 정도전, 주세붕, 이황을 거치면서 어떻게 발전해 나갔는지를 정리해 놓았다. 또한 우리나라 유교의 유물과 유적을 감상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1만7천여 평의 부지위에 조성된 선비촌은 우리 민족의 생활철학이 담긴 선비정신을 거양하고 사라져가는 전통문화를 재조명하여 윤리도덕의 붕괴와 사회적 괴리현상을 해소해 보고자 충효의 현장에 재현한 것이다. 이곳에는 고택을 그대로 옮겨와 만든 전통가옥과 저자거리가 있어 눈길을 끈다. 선비촌에서는 해마다 올바른 가치관 정립과 역사관 확립을 위한 청소년 선비문화 예절캠프를 운영하고 있다. 하루 2만~5만원의 비용으로 전통한옥에서의 숙박체험도 가능하다. 소수서원에서 입장권을 구입하면 이 세 곳을 함께 둘러볼 수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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