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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서울

서울 성곽길 북악산 코스 : 도심 북쪽을 에워싸는 북악(北岳)의 수려한 숲길

by 혜강(惠江) 2012. 4. 9.

 

서울 성곽길(2)-북악산 코스 

도심 북쪽을 에워싸는 북악(北岳)의 수려한 숲길

 

·사진 남상학

 

 

 

 

    혜화문에서 창의문까지의 북악산 성곽길은 서울성곽길 중 가장 사랑 받는 구간이다. 지대가 높아 서울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고,성곽의 원형이 잘 보존돼 있어 성곽길을 걷는다는 느낌을 가장 많이 받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구간은 1968년 1.21 김신조 등 북한 특수부대원들이 청와대를 습격하려 했던 사건이 발생한 뒤 40 여 년 동안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됐었다가 9년이 지난 2007년 4월에 이르러 전면 개방되었기에 서울의 보물 같은 장소로 꼽히고 있다. 사람들의 발길을 드물었던 만큼, 자연의 숨결이 그대로 살아 있어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이 드는 곳이기도 하다. 이 구간은 혜화문에서 시작하여 와룡공원, 숙정문, 곡장, 청운대, 1.21사태소나무, 백악마루, 백악쉼터, 돌고래쉼터, 창의문까지의 4.7㎞의 구간이다.

  혜화문은 1397년(태조 5) 도성을 에워싸는 성곽을 쌓을 때 도성의 북동방(동문과 북문 사이)에 설치한 문으로 동소문(東小門)이라고도 한다. 혜화동에서 삼선교를 가는 방향으로 언덕 위에 높이 서있다. 처음에는 문 이름을 홍화문(弘化門)이라 하였다가 1483년(성종 4) 새로 창건한 창경궁의 동문을 홍화(弘化)라고 정함에 따라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1511년(중종 6) 혜화문으로 고쳤다.

 

 

 1684년(숙종 10) 문루(門樓)를 새로 지은 후 한말까지 보존되어 오다가 1928년 문루가 퇴락하였으므로 이를 헐어버리고 홍예(虹霓)만 남겨 두었는데, 일제는 혜화동과 돈암동 사이의 전차길을 내면서 이마저 헐어버려 그 형태도 찾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당시 북문(북대문)은 일반인의 통행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이 문은 양주·포천 방면으로 통하는 중요한 출입구 구실을 하였다. 1975년부터 시작되어 1980년에 완공된 서울성곽의 일부로 1992년에 복원하였다.

  혜화문을 지나면 성곽은 간 곳 없이 사라져버린다. 낙산공원 끝자락 성곽이 카톨릭대 성신캠퍼스 담장 역할을 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혜화문에서 뻗어 나온 성곽은 서울시장 공관 축대로 사용되고 있었다. 이렇게 서울 성곽은 도시가 발전하면서 그 뒤 생긴 여러 구조물의 일부로 포함된 경우가 많았다. 이런 현상은 두산빌라, 경신중고등학교, 서울과학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 축대 및 담장 역할로 용도가 변경되었다. 

 

  서울고등학교 뒷길을 지나면서 서울성곽은 모습을 드러낸다. 서울의 역사인데 제대로 지켜 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들던 차에 반갑기 그지없다. 최근 새롭게 단장한 표시가 드러나는데도 서울성곽은 봄기운을 가득 머금은 자연에 그대로 녹아든 포근한 모습이었다.

 

 

  와룡공원에서 성곽을 따라 올라가는 중간에 말바위 안내소 방향표지가 보인다. 이 표지를 보고 올라가도 여전히 안내소는 보이지 않고 오르막 길이다. 생각해 보니 나는 지금 뒷동산을 오르는 것이 아니고 한양 도성을 지키기 위해 쌓은 북악 성곽의 산허리를 오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탐방안내표지를 미리 세워둔 것은 탐방시간과 유의사항을 보고 탐방에 지장이 없도록 하자는 의도였을 것이다. 

 

  한참 산길을 오르다 보면 나무계단이 나오고 나무계단을 올라서면 서울시 전경 우수조망 명소도 나온다. 안개로 시야가 흐려 서울 시내쪽은 희미했지만, 뒤편의 북악스카이웨이의 한 자락과 삼청동은 그런대로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고 산등성이를 따라 쌓은 윤곽이 살아움직이는 듯한 느낌으로 시야에 들어온다.    

 

 

 

  비로소 말바위 안내소에 도착했다. 신청서와 신분증을 제시하고 탐방증을 받아 목에 걸었다. 주변에 서울을 방어하기 위한 군사 시설물이 있으니 그럴만도 했다. 사진 촬영도 지정된 장소에서만 할 수 있다. 말바위안내소에서 5분 정도 걸어 오르면 서울성곽의 북대문인 숙정문이 나온다. 숙정문은 서울성곽을 이루는 사대문(四大門) 가운데 하나로, 도성의 북쪽 대문인데 북악산 동쪽 고갯마루에 서 있다. 

 

   1396년(태조 5) 9월 도성의 나머지 삼대문과 사소문(四小門)이 준공될 때 함께 세워졌다. 원래 이름은 숙청문(肅淸門)으로, 도성 북쪽에 있는 대문이라 하여 북대문·북문 등으로도 부른다. 지금의 숙정문은 1976년에 복원한 것이다.

 

 


  1413년 풍수지리학자 최양선(崔揚善)이 지맥을 손상시킨다는 상소를 올린 뒤에는 문을 폐쇄하고 길에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하였다고 한다. 도성 북문이지만, 서울성곽의 나머지 문과는 달리 사람의 출입이 거의 없는 험준한 산악지역에 위치해 실질적인 성문 기능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이 주변에는 소나무들이 무성하여 남다른 운치를 자아낸다. 이곳에서 삼청각과 성북동이 내려다보이는 전망은 이 코스에서 빼놓을 수 없는 백미에 속한다.  

  숙정문을 지나 성곽을 우측으로 끼고 소나무 숲길을 잠시 오르면 촛대바위 전망대에 이른다. 촛대바위는 1920년대 일제강점기에 민족정기 말살 정책으로 지맥을 끊기 위해 쇠말둑을 박았던 곳이다. 북악산 정상에서 보면 13m의 절벽이지만, 성곽길에서는 절벽처럼 보이지 않는다. 주변의 우거진 소나무와 어우러진 전망대에 서면 경복궁과 서울 시내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촛대바위에서도 고갯마루까지 산길은 계속 오르막 길이다. 땀이 송긋 배어오르지만 기분은 상쾌했다. 숨을 헐덕이며 오르니 곡장이 있다는 안내판이 보이는 것을 보면 고갯마루가 틀림없다. 곡장(曲墻)은 쳐들어오는 적을 관찰하고 공격하는 초소로 산세가 험하면서도 시야가 탁 트인 한 곳에 설치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서울성곽에는 북악산과 인왕산에만 있다고 하는데 보수 중인지 통행이 제한되어 있었다. 이어 두 개의 암문을 지나면 청운대에 이른다. 


  청운대는 해발 293m 높이의 공터로 의자가 마련되어 있어 숨 가쁘게 올라와 잠시 쉬기에 적당한 곳이며, 이곳에 서면 남산, 북악산 정상, 북한산 등을 전망하기에 좋고, 특히 광화문 광장이 거의 일직선으로 보이는데 날씨 탓에 너무나 전망이 흐려 카메라에 담는 것을 포기했다. 다만 기재개를 켜보고 잠시 쉰 뒤에 준비해 간 음식으로 점심을 때웠다.   

 

  청운대에서 바로 이어지는 길에서는 성곽 곳곳에서 공사의 책임 여부를 확실히 하기 위해 축성 책임자의 이름을 새겨 놓은 각자(刻字)를 볼 수 있다. 

 

 


  또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등 북한 특수부대원들이 청와대를 습격하려다 교전이 벌어지면서 총탄에 맞은 1·21사태 소나무가 길가에 서 있다. 소나무 한 그루에 많은 총탄 자국이 있는 것을 보면 당시 교전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짐작이 간다. 

 

 


  아픈 역사의 흔적을 지나 성곽을 따라 가파른 길(계단)을 오르면 북악산 정상인 백악마루에 닿는다. 해발 342m의 정상에는 북한군의 공중위협으로부터 청와대를 방호하기 위하여 1979년 10월 15일부터 북악통제대 및 발칸진지를 설치 운용한 자리였는데 2000년 다른 장소로 이전하고 복원하였다.

 

  백악마루에서 본 서울 도심은 풍수지리설에서 말하는 배산임수의 전형이다. 경복궁과 광화문광장을 중심으로 시가지가 구성됐고 그것을 남산과 낙산·인왕산이 감싸 안은 모습이다. 웅장한 북악산을 병풍 삼고 청계천 지류를 앞에 둔 경복궁은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풍기는 듯했다.

 

 

 

  그리고 백악마루 뒤편으로는 북한산 줄기가 병풍처럼 둘러쳐 있어 도성 한양은 천혜의 요새처럼 느껴졌다. 무학대사와 태조 이성계가 한양을 수도로 점찍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좌우로 능선을 다라 길게 늘어선 성곽의 모습이 생동감을 전해준다.  

  창의문으로 내려오는 길은 경사가 급한 내리막이다. 계단이 많아 고령자와 아이들은 특히 주의해야 한다. 가파른 돌계단이 하도 많아 초소의 경계군인에게 물어보니 900개가 넘는다고 한다. 무릎에 지장이 없도록 조심하면서도 내려다보는 주변 경치가 너무 시원하여 어려움을 모르고 내려왔다. 돌고래쉼터를 지나 우측으로 운치 있는 부암동을 끼고 내려오면 이 구간의 끝인 창의문이다. 

 



  종로구 창의동에 있는 창의문은 4소문 가운데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곳이다. 일명 ‘자하문(紫霞門)’이라고 하는데, 1396년(태조 5)에 도성 8문의 하나로 창건되었으나 1413년(태종 13) 이후로는 창의문이 경복궁을 내리누르는 위치에 있다는 풍수지리설적 해석 때문에, 문은 세웠으나 수백 년간 사용하지 않았고 국가적인 공역 (工役)을 수행할 때처럼 긴요한 경우에 한하여 성문을 열었다. 현재의 문루(門樓)는 1741년(영조 17)에 세운 것으로 4소문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혜화문에서 시작하여 성북동을 지나 와룡공원~말바위 안내소~숙정문(북대문)~곡장~청운대~1·21사태 소나무~백악마루~창의문(북소문)까지 약 3시간 30분 정도 걸렸다. 숲이 우거지고 도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차 소리나 소음도 거의 없을 뿐더러 성곽이 가장 잘 보존돼 있어 운치 있는 길을 걸은 셈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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