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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서울

성북동 북악스카이웨이∼정릉 산책로

by 혜강(惠江) 2012. 4. 1.

 

성북동 북악스카이웨이∼정릉 산책로

‘아리랑’ 영화와 ‘성북동 비둘기’ 詩가 있는… ‘藝香의 숲길’

 

문화일보  엄주엽 기자

 

 

▲ 정릉은 번잡한 서울의 도심 속에 있는 고즈넉한 다른 세상이다. 27일 정릉 숲길에서 연인들이 산책을

즐기고 있다. 김호웅기자

 

 

 

 

  서울 성북구 성북동의 북악스카이웨이에서 정릉(貞陵)을 잇는 산책로는 주변 주민들의 소중한 녹지공간이면서 역사적 이야기들이 빽빽한 지역이다. 27일 찾았을 때 아직 녹음이 나오지 않아서인지 다소 황량했다. 게다가 아리랑고개에서 들어가는 정릉 입구 왼쪽은 재개발 탓에 거의 파헤쳐져 있어 더욱 그랬다.

 

  주변 아파트와 주택이 밀고 들어와 말 그대로 경내(境內)만 남은 정릉은 예전에는 녹지공간도 지금보다 훨씬 넓었고 시내에도 물이 많아 한여름에 시민들의 납량지대(納凉地帶)로 불렀던 곳이다. 60년대까지만 해도 정릉 계곡 위 계류를 막아 만든 풀장도 있었다 하고 초등학생들의 단골 소풍터였다. 지금은 그 흔적을 찾기 어려울 만큼 물도 말랐다. 정릉 뒤 군부대 뒤편에는 언제 들어섰는지 골프연습장의 철조가 흉물스럽게 버티고 있다.

  정릉 숲길은 북악스카이웨이와 연결해 걷는 것이 좋다. 이날은 한성대입구역 6번 출구로 해서 성북동 한신아파트와 성북구민회관을 지나 아리랑길로 빠져 정릉엘 갔다. 오른쪽 아리랑길로 빠지기 전에 죽 이어지는 길이 북악스카이웨이다. 이날 성북동에 온 김에 ‘성북동 비둘기’의 시인 이산(怡山) 김광섭(1906~1977)이 살았던 고택을 찾아봤다. 10여 년 전 신문에 이산 김광섭이 살면서 ‘성북동 비둘기’를 구상했다던 저택이 소개된 적이 있다.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돈다. 

  성북동 메마른 산골짜기에는
  조용히 앉아 콩알 하나 찍어 먹을
  널찍한 마당은 커녕 가는 데마다
  채석장 포성이 메아리쳐서 
  피난하듯 지붕에 올라 앉아
  아침 구공탄 굴뚝연기에서 향수를 느끼다가 
  산 1번지 채석장에 도루 가서
  금방 따낸 돌 온기에 입을 닦는다.

  예전에는 사람을 성자처럼 보고
  사람 가까이서
  사람과 같이 사랑하고
  사람과 같이 평화를 즐기던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는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는 새가 되었다. 
 

   당시 주소가 성북동 OOO의 XX번지였다. 지금은 번지가 바뀌었지만, 겨우 찾아내기는 했으나 예전 신문에서 본 저택은 사라지고 다세대 주택이 덩그러니 들어서 있었다. 그 저택은 당대 유명한 건축가인 김중업(1922~1988)이 설계했다는 2층 건물인데, 아주 흔적도 없어 마음이 황망했다. ‘성북동 비둘기’는 60년대 개발과 건설의 소용돌이에 시달리는 서민들의 삶을 비둘기에 빗대 그려낸 시인데, 그 느낌이 시인의 사라진 저택 앞에서 절실하다.

  여기서 좀 더 올라가면 북악스카이웨이길을 만난다. 북악스카이웨이길은 북악팔각정-인왕산이나 북한산 형제봉으로 이어진다. 도로를 따라 산책로가 잘 정비돼 있어 걷기에 좋다. 여기서 아리랑로(路)로 향한다. 아리랑고개로 내려가는 길이다. 아리랑고개는 옛날에는 정릉으로 가는 고개라 하여 정릉고개라 했다. 1926년 나운규(1902~1937)가 이 고개에서 영화 ‘아리랑’을 촬영한 뒤부터 아리랑고개로 불리었다. 그 뒤 1935년쯤부터 정릉 일대에 고급요정들이 들어서면서 ‘아리랑고개’라는 푯말을 이 고개 마루턱에 세우고 고객을 끌어들였다고 한다. 아리랑로 중간에 오른편으로 흥천사라는 절이 있는데, 원래 정릉을 만들면서 왕비의 명복을 빌기 위해 현재 세종문화회관 별관 자리에 지어졌으나 여기로 옮겨진 사찰이다.

  아리랑고개에서 가던 방향의 왼편으로 조금 내려가면 정릉 입구가 나온다. 앞서 말한 ‘원래’ 정릉은 지금의 서울의 중구 정동(貞洞)에 있었다. 정동의 이름은 그래서 만들어졌다. 잘 알려진 대로, 정릉은 이성계의 두번째 부인이자 조선 최초의 왕비인 신덕왕후의 무덤으로, 조선 최초의 왕릉이다. 신덕왕후의 친가는 고려의 권문세가로, 이성계의 권력 형성과 조선건국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나중에 철천지원수가 되는 태조의 첫 부인의 자식인 태종(이방원)에 의해 1409년(태종9)에 능이 이곳으로 옮겨졌다.

  원래 정릉은 지금 정동의 영국 대사관 부근으로 추정돼왔으나 얼마 전 신덕왕후능의 석물로 보이는 문인석(왕·왕비의 능 앞에 세우는 사람의 형상을 한 입석상)이 정동 소재 주한 미국대사관저 영내 ‘하비브 하우스’에서 발견되면서 정릉의 최초 위치는 미 대사관저 뒤편쯤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태종은 무덤을 옮긴 후 정자각을 없애고, 홍수에 의해 없어진 광통교를 다시 짓는데 정릉의 십이지신상 등 석물을 실어다 만들게 했다고 하니 그 원한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오랫동안 주인 없는 무덤으로 있다가 현종 10년(1669)에 송시열의 상소에 의해 정릉이 회복됐다. 그로 인해 조선왕조 최초의 무덤으로는 빈약하다.

  조선의 다른 왕릉들과 함께 200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정릉은 30만㎡를 넘는 규모로, 경내에 잘 조성된 산책로는 2.5㎞, 제대로 걷자면 1시간은 족히 잡아야 한다. 입장료는 1000원이지만 65세 이상 노인이나 만 18세 이하는 무료다. 서삼릉 등 ‘능지기’만 여러 해 맡아온 정릉의 염규호 관리소장은 “주로 무료 입장객으로, 평일에 수백명이 찾는다”며 “특히 주변 노인들이 주고객”이라고 말했다. 이날도 주변 동네의 어른들이 적지않이 찾아 산책과 담소를 즐기고 있었다.

 

  경내에는 300년이 넘는 보호수들이 여럿 있을 뿐 아니라 50년이 넘는 소나무 전나무 참나무들이 무성하다. 경내를 가로지르는 시내에는 도롱뇽이 알을 까놓았을 만큼 청정한데 가물어서인지 수량은 적다. 무덤 뒤 구릉지는 해발 284m 정도로 중간중간에 ‘백록담’ ‘취선대’ 등 8개의 옹달샘과 쉼터가 있다. 60년대만 해도 주변 주민들이 정릉의 옹달샘에서 퍼온 시원한 물로 동치미를 담갔다고 하는데, 지금은 수량이 적어 그러지는 못할 듯하다.  정릉 산책로는 고적하면서도 기품이 있는 길로 언제든 쉽게 찾을 만한 좋은 길이다.

 
 

<출처> 2012. 3. 30 /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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