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초 기행
영랑호에 다시 신선(神仙)이 찾아오게 하자
글 · 사진 남상학
*영랑호는 그 넓이가 방대하여 한 화면으로 잡을 수 없을 만큼 크다.
속초는 관광자원의 보고다. 수려한 설악산이 있고, 파도치는 푸른바다와 드넓은 호수 등 관광의 세 박자가 잘 갖추어 있다. 그런데 이곳을 찾는 대부분 사람들은 설악산과 바다는 잘 알고 있으나 속초에 있는 호수는 잘 알지 못한다. 북쪽의 영랑호와 남쪽의 청초호(靑草湖) 2개의 호수가 없었다면 속초의 아름다움은 그만큼 반감될 수밖에 없는데도 말이다.
영랑호는 속초시 북쪽에 위치한 자연 호수인 석호(潟湖)다. 석호는 사주(砂洲)1)나 사취(砂嘴)2)의 발달로 바다와 격리된 호수로서, 지하를 통해서 바닷물이 섞여드는 일이 많아 염분 농도가 높고, 담수호에 비해 플랑크톤이 풍부하다. 조류가 운반해온 모래와 암석 쇄설물들이 만의 입구에 쌓여 만을 바다에서 분리하면 만은 석호가 된다. 이러한 퇴적물이 점점 많이 쌓이고 갈대 등이 자라면 석호는 결국 육지가 된다. 이 석호는 동해안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영랑호를 비롯하여 화진포, 송지호, 경호 등 18개소가 산재되어 있고 이곳에는 남생이, 큰고니 등 대한민국 천연기념물과 가시고기, 흑고기 등 멸종위기종이 서식하는 생태계의 보고이기도 하다.
* 영랑호리조트에서 바라본 영랑호 모습과 설명
둘레 7.8㎞. 면적 1.21㎢. 수심 8.5m. 영랑교(永郞橋) 밑의 수로를 통해 동해와 연결되어 있다. 경관이 빼어나 아름다운 호수로 그 이름이 이미 오래 전부터 알려져 있다. ‘영랑호’라는 이름은 《삼국유사》의 기록을 근거로 신라의 화랑 영랑이 이 호수를 발견했다 하여 붙여진 것이다. 신라시대에 화랑인 영랑·술랑(述郞)·안상(安詳)·남랑(南郎) 등이 금강산에서 수련하고 고성(高城) 삼일포에서 3일 동안 놀고 난 후 각각 헤어져 무술대회장인 신라의 서울 금성(金城:지금의 경주)으로 향하였다.
그러나 영랑만은 이 호수에 와서 맑고 잔잔한 호수와 웅장한 설악의 울산바위, 그리고 웅크리고 앉아 있는 범바위가 물 속에 잠겨 있는 모습에 도취되어 무술대회에 나가는 것조차 잊고 뱃놀이를 즐기고, 고기를 낚고, 풍류의 멋을 다하며, 오랫동안 이곳에 머물렀다고 한다. 그런 후부터 사람들이 이 호수를 영랑호(永郞湖)라 부르게 되었고, 그 이후로 영랑호는 화랑들의 수련장으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조선 중종 때 만들어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지 간성군 산천조에는 영랑호에 대한 언급이 있다. "영랑호는 고을 남쪽 55리에 있다. 주위가 30여리인데 물가가 굽이쳐 돌아오고 암석이 기괴하다. 호수 동쪽 작은 봉우리가 절반 쯤 호수 가운데 들어갔는데 옛 정자 터가 있으니 이것이 영랑 신선무리가 놀며 구경하던 곳이다."
또 이 책에는 고려 말 문인인 근재(謹齋) 안축(安軸)의 한시(漢詩)가 두 편이 실려 있다. 그는 <영랑포범주(永郞浦泛舟) : 영랑호에 배 띄우고>에서 영랑호를 두고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平湖鏡面澄(평호경면징) 평평한 호수 거울인 양 맑은데
滄波凝不流(창파응불류) 푸른 물결 엉기어 흐르지 않네
蘭舟縱所如(난주종소여) 놀잇배를 가는 대로 놓아두니
泛泛隨輕鷗(범범수경구) 둥실둥실 떠서 날으는 갈매기 따라가네
浩然發淸興(호연발청흥) 호연(浩然)하게 맑은 흥 발동하니
沼廻入深幽(소회입심유) 물결 거슬러 깊고 그윽한 데로 들어가네
丹崖抱蒼石(단애포창석) 붉은 벼랑은 푸른 돌을 안았고
玉洞藏瓊洲(옥동장경주) 옥동(玉洞)은 경주(瓊州)를 감추었네
循山迫松下(순산박송하) 소나무 아래 배 대이니 하늘은 푸르고
空翠凉生秋(공취량생추) 서늘한 기운 이제 가을이네.
荷葉淨如洗(하엽정여세) 연잎은 알아서 씻은 것 같고
蓴絲滑且柔(순사활차유) 순채실은 미끄럽고도 부드럽네.
向晩欲廻棹(향만욕회도) 저물녘에 배를 돌리려 하니
風煙千古愁(풍연천고수) 풍연이 천고의 수심일세.
古仙若可作(고선약가작) 옛 신선 다시 올 수 있다면
於此從之遊(어차종지유) 여기서 그를 따라 놀리라.
- 안축의 시 <永郞浦泛舟(영랑포범주 :영랑호에 배 띄우고>
暮雲半捲山如畵(모운반권산여화) 저믄 날 구름 반쯤 걷히니 산은 그림 같고
秋雨新晴水自波(추우신청수자파) 가을비가 새로 개이니 물결이 절로 생기네.
此地重來難可必(차지중래난가필) 이곳에 다시 올 것을 기약할 수 없으니
更聞船上一聲歌(경문선상일성가) 배 위에서 노래 한 곡조 다시 듣노라
- <안축의 시 2>에서
*영랑호에 세워져 있는 안축의 시비. ‘영랑호에 배 띄우고’라는 시가 새겨져 있다.
안축은 이 외에도 강원도를 순시하면서 아름다운 절경을 읖은 경기체가(景幾體歌)인 <관동별곡(關東別曲)>을 썼다. 이 작품은 정철(鄭澈)의 가사작품인 <관동별곡(關東別曲)>보다 250년이 앞서 있다. 경기체가는 서민들의 속요(俗謠)에 대치되는 귀족문학으로 한문(漢文)과 이두문(吏讀文)을 혼용하여 지었고, 끝 구절에는 경기하여 (景畿何如)로 되어 있어 경기체가(景幾體歌)라고 한다.
그런가 하면 조선 선조 13년(1580)에 송강(松江) 정철(鄭徹)은 그의 나이 45세 되던 해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관동팔경을 두루 유람하면서 그 옛날 사션(四仙)을 상기하여 가사 작품인 <관동별곡>에서 넌지시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고셩(高城)을란 뎌만 두고 삼일포(三日浦)를 차자가니,
단셔(丹書)는 완연(宛然)하되 사션(四仙)은 어데 가니.
예 사흘 머믄 후의 어디가 또 머믄고.
선유담(仙遊潭) 영낭호(永郞湖) 거긔나 가 잇난가.
(현대어 풀이)
고성은 저만치 두고 삼일포를 찾아가니
(사선이 남석으로 갔다는) 붉은 글씨는 바위에 뚜렷한데,
영랑, 남랑, 술랑, 안상은 어디로 갔는가
여기에서 사흘을 머문 후에 어디로 가서 또 머물렀던 것인가?
선유담, 영랑호 그곳에나 가 있었던가.
또 조선시대의 실학자 이중환(李重煥:1690~1756)은 《택리지(擇里誌)》에서 구슬을 감춰둔 것 같은 곳이라는 표현으로 영랑호의 신비로움을 나타냈다. 이렇듯 영랑호는 속초에서 빼놓아서는 안 되는 절경에 속한다.
영랑호에서 볼거리 단연 뛰어난 것은 범바위다. 영랑호의 범바위는 속초팔경의 하나이다. 호숫가의 높은 바위로 범 형상으로 생겼다 해서 범바위라 불린다. 엄청난 크기의 바위들이 모여 보는 각도에 따라 갖가지 짐승 머리 모양을 보여준다. 새로 설치된 계단을 올라가면 돌무더기 옆에 앙증맞게 세워놓은 영랑정(永郞亭)에 오를 수 있다. 이 정자에 오르거나 바위 위에 서면 영랑호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호수 주변에는 별장과 콘도미니엄을 비롯하여 유원지가 조성되어 산기슭에서 바라보는 영랑호의 풍경은 더 없이 평화롭기만 하다. 또한 호수주위를 돌아 감싸는 도로는 도보여행이나 드라이브, 자전거하이킹에도 더없이 좋다. 이곳에서 설악산을 바라보는 맛도 일색이다. 특히 해 저물 무렵 호수의 전경이 평화롭고 아름답다. 하구 쪽에서 영랑호를 바라보면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선경을 엿볼 수 있다. 연인이나 친구들과 호숫가의 여유를 즐기기에 좋은 곳이다. 만약 영랑호에 영금정 동명항을 묶어 속초 북부의 관광벨트를 만든다면 참 좋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자연호수 영랑호는 관광지라 소개하기에 부끄럽기가 그지없다. 지난 1974년부터 영랑호 유원지를 개발한 이래 주변의 아름다운 기슭은 모두 파헤쳐져 골프장, 콘도, 아파트로 변해버렸고, 호수의 오염은 갈수록 심해져 부영양화가 매우 심각하다. 수질의 주오염원은 생활하수와 골프장배수·축산배수 등이다. 주변에 축대와 일주도로를 건설하여 호변 수초대가 많이 소실되었고, 호변습지가 발달하는 자연호의 특성을 거의 상실하였다. 날이 흐리면 악취도 풍기고 심한 녹조현상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이제 영랑호는 대대적인 수술을 받아야 할 형편이다. 영랑호는 민물고기인 잉어와 붕어, 가물치와 하구에서 올라온 전어·광어·흑돔 등의 바닷고기까지 있어 낚시터로도 유명한 곳이었다. 그러나 물이 오염되면서 몇 년째 낚시 금지구역이다. 다만, 하구쪽에서 카누와 윈드서핑 수상활동이 펼쳐질 뿐이다. 예전에는 영랑호에 놀이배가 떴으나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이제 우리의 할 일은 영랑호의 이름다움을 되찾아 영랑호(永郞湖)에 다시 신선(神仙)이 찾아오게 하는 일이다.
<주> 1) 사주(砂洲) : 해빈(海濱)에서 가까운 바다에 파도가 쌓아놓은 모래언덕
2) 사취(砂嘴) : 바다 쪽으로 돌출하고 한쪽 끝은 육지에 붙어 있는 좁은 해안지형
* 영랑호를 알리는 표지석
* 범바위 옆 영랑호를 내려다볼 수 있는 자리에 세운 정자 영랑정과 중수기 *
* 범바위로 오르는 계단 *
* 평지에서 바라본 범바위, 상어와 뱀의 머리처럼 보이기도 한다 *
* 언덕 위 가까이서 바라본 범바위 *
* 범바위 위에서 내려바본 주변 모습, 호수와 골프장이 보인다. *
* 범바위 아래 평지에 조성한 연못, 가운데 큰 바위가 있다. *
* 호수 주변의 아름다운 모습들 *
* 호수 주변의 콘도와 별장들 *
* 호수 둘레길 7.8㎞의 산책로 *
* 저녁해를 받아 반짝이는 호수 *
영랑호에는 지금 '사선(四仙)' 모두는 고사하고 '영랑'도 없다. 외면하고 돌아선 그 자리에 다시 신선이 찾아오게 하자. 그러기 위해서는 깨끗하고 청정한 호수로 돌려놓아야 한다. 속초시의 정책당국자들의 각성을 요구하는 바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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