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성 미술관 자작나무숲
그곳에 가면 여행자도 한 그루 자작나무가 된다
글, 사진 글,사진 유연태(여행 칼럼니스트)
횡성의 ‘미술관 자작나무 숲'에 가기 전에 시인 도종환의 <자작나무> 시를 읽어본다.
자작나무처럼 나도 추운 데서 자랐다
자작나무처럼 나도 맑지만 창백한 모습이었다
자작나무처럼 나도 꽃은 제대로 피우지 못하면서
꿈의 키만 높게 키웠다
내가 자라던 곳에는 어려서부터 바람이 차게 불고
나이 들어서도 눈보라 심했다
그러나 눈보라 북서풍 아니었다면
곧고 맑은 나무로 자라지 못했을 것이다
단단하면서도 유연한 몸짓 지니지 못했을 것이다
외롭고 깊은 곳에 살면서도
혼자 있을 때보다 숲이 되어 있을 때
더 아름다운 나무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 도종환의 <자작나무> 전문
영동고속도로 새말나들목에서 가까운 곳에 ‘미술관 자작나무숲’이 있다. 사진과 회화 전시회가 열리는 미술관이다. 약 3만 3,000㎡ 규모의 미술관은 흰색 줄기의 자작나무가 감싸 안고 있다.
북카페 구실을 하는 스튜디오 갤러리, 원종호 관장의 사진을 상설 전시하는 제2전시장, 그리고 외부 작가들의 초대전 등이 열리는 제1전시장을 찬찬히 둘러보고 자작나무 숲길을 산책하다 보면 미술관을 찾은 여행객들은 저마다 한 그루 자작나무가 된 듯한 기분에 젖는다.
* 원종호 관장의 오대산 명개리계곡 사진을 감상하는 여행자 커플
불에 탈 때 자작자작 소리를 내는 자작나무
한적한 논두렁과 섬강 상류의 개천에 둘러싸인 미술관에 이르자 야트막한 숲에서 자작나무의 빛이 뿜어져 나온다. 자작나무는 우리나라 토종 나무다. 불에 탈 때 ‘자작자작’ 소리가 난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는데, 그 이름을 부를 때마다 왠지 시를 읊조리는 듯한 운율이 느껴진다.
자작나무는 추운 지방에서 자라기 때문에 세월이 많이 흘러도 둥치가 좀처럼 커지지 않고 삐죽이 키만 큰다. 흰 줄기 군데군데에 검은 흠집이 나 있는 것은 자작나무가 스스로 가지치기를 한 흔적이다. 그렇게 스스로 가지치기를 하며 위로 자라는 자작나무는 잘 썩지 않아서 가구는 물론 악기를 만드는 데 쓰이는 고급 목재로 통한다. 우리나라의 자랑거리인 팔만대장경 목판본도 자작나무로 만든 것이라 하니 가히 그 품질을 가늠할 수 있다.
기대했던 대로 ‘미술관 자작나무숲’은 자연을 그대로 품고 있다. 낮은 야산에 듬성듬성 서 있는 자작나무 사이로 갤러리 3동과 펜션 2동이 보인다. 그 모습 자체가 겨울 풍경화로 느껴진다.
먼저 미술관을 일궈낸 원종호 관장을 만나기 위해 스튜디오 갤러리로 들어선다. 겨울바람을 시원하게 맞고 있는 자작나무 줄기의 하얀 빛이 눈에서 멀어지지 않는다. 미술관 정원 구석구석에서 겨울나기를 하고 있는 수목들과 꽃나무들도 가지만 앙상한 채 벌거벗은 상태다. 자작나무는 창백하리만큼 흰 빛을 띠어서인지 눈앞으로 더욱 가까이 다가서는 듯 원근감이 느껴진다.
* 자작나무에 둘러싸인 스튜디오 갤러리 외관과 북카페 같은 분위기의 스튜디오 갤러리 내부
목장을 운영하다가 사진의 세계를 접하다
갤러리 안에는 자작나무를 닮아 머리가 하얀 원종호 관장이 차분한 모습으로 앉아 있다. 사람도 자연을 닮는구나. 자신이 찍은 숲 사진 앞에서 농부사진가는 ‘미술관 자작나무숲’을 일궈낸 사연을 차분히 이야기한다. 그동안 여러 매체를 통해 대충 알고 있었지만 추억 속의 사진을 넘기듯 다시 듣고 싶어진다.
미술을 전공했던 그는 대학을 졸업하기 전 군에 입대했다. 경기도 남양주시에서 군 복무를 했던 그는 부대 근처 시원하게 펼쳐진 목장에 자꾸만 눈이 갔다. 제대 후 선산인 지금의 미술관 터에 목장을 일구기 시작했다. 그러나 목장을 가꾸는 일에는 그다지 행운이 따르지 않았다.
결국 목장업은 실패로 끝나고 생계를 위해 사료 대리점을 하면서 1980년 초부터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니콘 FM2 카메라가 첫 번째 친구였다. 미술공부를 제대로 끝내지 못한 채 어깨 너머로 배운 사진 솜씨였지만 태백산, 함백산, 치악산, 오대산 등지를 헤매고 다니면서 카메라에 강원도의 풍경을 담았다. 그 중에서도 빛과 어울린 나무사진, 나무를 통해 자신에게 전해지는 빛 에너지가 사진의 테마였다.
* 스튜디오 갤러리에서 환하게 웃는 원종호 관장과 많은 영감과 위로를 주는 자작나무 산책길
백두산에서 자작나무를 만난 것이 새로운 인연
사진을 찍은 지 10년이 지난 어느 날 그는 백두산을 찾게 되었다. 백두산 천지에 이르는 길가에서 자작나무 숲을 보고 한눈에 반해버렸다.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그는 자작나무를 찍었다. 백두산 천지보다 강하게 그를 사로잡았던 자작나무. 그것이 자작나무와 맺은 인연의 시작이었다.
고향에 돌아온 그는 목장을 하던 자리에 자작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30∼40cm 크기의 자작나무 묘목 1만 2,000주를 산에 가득 심었다. 추운 지방에서 자라는 자작나무를 강원도 횡성의 야산에 심은 것은 모험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과실수를 심지 왜 그런 나무를 심느냐며 반대했다.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아내는 보험모집인 생활도 했다. 지금 그 많던 자작나무는 3분의 1만 남았다. 관리 소홀과 병충해 등이 그 이유라고 한다.
“왜 자작나무에 감동했을까요?”
“논리적으로는 설명하기 어렵죠. 여름에는 전혀 돋보이지 않다가 겨울이 되면 흰 줄기를 드러내는 모습이 멋져 보여요. 햇빛이라도 비치면 찬란하기 그지없습니다.”
농부사진가로 자작나무 숲에서 살며 산을 즐겨 찾던 그는 1992년 원주에서 치악산을 주제로 한 사진들을 대중에게 선보이는 최초의 개인전을 가졌다. 1994년에는 미국 버지니아 커뮤니티칼리지에서 초대전을 열었다.
속 깊은 기침을 오래하더니
무엇이 터졌을까
명치끝에 누르스름한 멍이 배어나왔다
길가에 벌(罰)처럼 선 자작나무
저 속에서는 무엇이 터졌길래
저리 흰빛이 배어나오는 걸까
잎과 꽃 세상 모든 색들 다 버리고
해 달 별 세상 모든 빛들 제 속에 묻어놓고
뼈만 솟은 저 서릿몸
신경줄까지 드러낸 저 헝큰 마음
언 땅에 비껴 깔리는 그림자 소슬히 세워가며
제 멍을 완성해가는 겨울 자작나무
숯덩이가 된 폐가(肺家) 하나 품고 있다
까치 한 마리 오래오래 맴돌고 있다
- 정끝별의 <자작나무 내 인생>
* 원종호 관장의 강원도 자작나무 사진과 백두산 자작나무 사진
2004년 미술관 개관, 때로는 직접 작품 해설도
2004년 봄, 그는 예술가라면 누구나 갈망하는 자신만의 갤러리를 갖게 되었다. ‘미술관 자작나무숲’을 개관한 것이다. 방문객에게는 커피 등 음료를 한 잔씩 무료로 제공한다.
원래 관장의 살림집과 스튜디오로 쓰던 곳은 작품 감상은 물론 책도 보고 차도 마시는 아늑한 휴게공간인 스튜디오 갤러리로 꾸몄다. ‘미술관 자작나무숲’은 스튜디오 갤러리와 기획전시실인 제1전시실, 상설 전시장인 제2전시실, 펜션 2개 동으로 꾸며졌다. 원 관장은 때로 매표소를 지키거나 큐레이터 역을 맡기도 한다. 사전 예약한 방문객들과 함께 갤러리를 돌면서 작품을 설명해주고, 사진 촬영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강원도 작가들에게 전시회를 열 수 있는 기회를 우선적으로 제공하는 제1전시실에서는 현재 횡성 출신 이승연 작가의 회화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어항 속의 갖가지 풍경이 관람객들의 미적 수준을 고양시켜준다. 자작나무 숲 사이로 난 산책길을 따라가면 원 관장의 작품을 상설 전시하는 제2전시실이 나온다.
* 이승연전이 열리고 있는 제1전시장과 관장의 작품을 상설 전시하는 제2전시장
물은 자작나무 숲을 통해 하늘로 흐른다
나무들마다 펌프질을 해서 하늘의 목마름을 달래준다
우리가 잠든 사이에도 자작나무는 하늘의 별을 우러르며
더 높은 더 맑은 이야기를 나누려고 귀를 세운다
모든 숲이 그러하듯 자작나무 숲도 새들의 보금자리를 위해
자리를 내어줄 뿐 아니라 그들을 위해 바람에 흔들리지 않으려고
온 힘을 다해 몸을 곧추세운다
비탈에 서있는 자작나무는 산을 업고서도 제 할 일을 한다
거센 바람에도 결코 허리를 굽히지 않는다 다만
자작나무는 최후를 맞이할 때까지 오직 한 자리에 서서
잎새에 이는 햇빛 무늬와 새 소리와 비나 눈 내리는 소리들을
나이테 속에 가지런히 묻어둘 뿐이다.
- 김상현의 <자작나무 숲>
숲속의 집에서 하룻밤 묵고 횡성한우도 맛볼까
제2전시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작은 액자가 눈에 들어온다. 푸른색 바탕에 하얗게 빛나는 자작나무 사진이다. 초점이 안 맞은 듯 풍경 사진이 마치 유화 같은 질감을 느끼게 한다.
“이것이 바로 백두산 입구에서 만난 자작나무입니다.”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찍었다는 사진은 영혼을 뒤흔드는 자작나무로 비쳐진다. 그의 사진들은 모두 필름카메라로 찍었다. 강원도의 산을 찍은 대부분의 풍경 사진에서는 어두운 산그늘을 배경으로 빛나는 나무 빛깔이 돋보인다.
왜 산을 찍느냐는 질문에 그는 원래 산을 좋아한다고 답한다. 산을 찍으면 나무가 찍히고, 나무가 찍히는 순간 나무의 에너지가 자신에게로 들어오는 것을 느낀다고. 그러고 보니 그의 작품 속 나무들은 저마다 강렬한 광채를 뿜어낸다.
그가 가장 아낀다는 오대산 명개리의 가을 풍경을 담은 사진 앞에 섰다. 마치 물감을 제멋대로 뿌린 듯한 인상을 풍긴다. 나무줄기에서 스산한 가을바람이 느껴지고 서늘한 음지 속으로 새어드는 한 줄기 빛이 보는 이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미술을 전공한 때문인지 그의 사진에서는 유화의 질감이 느껴진다. 커다란 캔버스에 물감을 마구 흩뿌린 미국의 현대화가 잭슨 폴록의 그림을 많이 닮았다.
미술관 관람이 끝나갈 즈음 원 관장의 사진론을 들어보기로 한다. 그는 사진을 절대 사실적으로 찍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시인이 은유적 표현으로 시를 쓰듯, 어떤 뉘앙스를 품은 사진을 찍고 싶다고 한다. 롤랑 바르트가 사진 평론에서 “사진은 그리움이다”라고 언급했듯, 그는 사진에 지나간 시간의 추억과 그리움을 담고 싶어하는 눈치다.
그는 감히 말한다. “좋은 사진이란 그 사진 앞에서 한 번쯤 눈을 감게 해야 한다.”
미술관 뒤편 언덕배기에는 아담한 펜션 두 채가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는 TV도 없고 컴퓨터도 없다. 자연을 벗 삼아 제대로 휴식하라는 무언의 의지가 느껴진다.
미술관 관람을 마친 뒤 시간이 넉넉하다면 횡성의 별미를 맛보자. 횡성의 별미는 횡성한우, 안흥찐빵, 더덕 등이다. 횡성한우는 생후 4~6개월 정도 된 수송아지를 거세하여 고급육 생산 프로그램에 따라 사육한다. 도축한 후에는 신선한 숙성실에서 4~6일간 숙성을 거쳐 횡성축협에서 직판하기 때문에 육즙이 풍부하고 감칠맛이 돌며 부드럽게 씹히는 맛이 인상적이다.
안흥은 고랭지 채소로 유명한데 1990년대 중반부터 찐빵마을로 유명해졌다. 면사무소와 안흥시장 사이 도로변에 찐빵집이 몰려 있다. 안흥찐빵의 인기는 추억의 옛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심리가 키워낸 것이다. 안흥찐빵은 시간이 지나도 쫄깃한 맛이 그대로 유지되고 팥의 단맛이 적당해서 물리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미술관 언덕에 있는 숲속의 집
* 횡성의 대표 별미인 횡성한우와 추억의 맛이 살아 있는 안흥찐빵
<여행정보>
문의 | 미술관 자작나무숲 033-342-6833
위치 | 강원도 횡성군 우천면 두곡리 5 둑실마을
가는 길 | 영동고속도로 새말나들목으로 나가 우천면 두곡리 방면으로 달리면 ‘미술관 자작나무숲’에 닿는다.
<출처> 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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