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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충청북도

충주 탄금대, 열두대 아래 고혼(孤魂)을 달래며 흐르는 강물

by 혜강(惠江) 2012. 1. 20.

 

충주 탄금대

 

열두대 아래 고혼(孤魂)을 달래며 흐르는 강물 

 

 

·사진 남상학

 

 

 

 

 

 

   충북 충주시 칠금동에 있는 명승지 탄금대(彈琴臺)는 본래 대문산이라 불리던 야산으로 그 밑에는 남한강과 달천이 합류되는 곳이며 산세가 평탄한듯하나 기암절벽에 소나무 숲이 제법 우거진 충주를 대표하는 국민관광지이다. 충남 부여의 낙화암, 부소산성 그리고 백마강과 그 풍광이 비슷하여 많이 비교되는 곳이다.


  탄금대를 찾는 이들은 탄금대 입구에서 탄금대유래비를 처음 만난다. 가로 2m, 세로 1m의 대형 돌에는 탄금대의 유래와 탄금대에 얽힌 역사를 설명한다. 잘 다듬어진 길을 따라 올라가면 왼쪽에 매점이 있고 그 옆에 악성 우륵선생추모비가 눈에 들어온다. 

 

 


  이곳 이름이 탄금대로 불리는 이유는 신라 진흥왕 때 우리나라 3대 악성(樂聖) 중 하나인 우륵(于勒)이 이곳에 와 풍치를 상미하며 항상 산상대석에 앉아서 가야금을 연주하던 곳이라 해서 붙여진 것이다. 우륵은 본래 가야 사람으로 가실왕(嘉實王)의 명을 받아 정정골(지금의 고령읍 쾌빈리)에서 중국의 쟁을 본 따 12현금(絃琴:가야금)을 창제했다.

 

  삼국사기에 보면 우륵은 가실왕당시의 가야사람으로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가야금을 가지고 신라에 귀화하였다. 조국 가야가 사라질 날이 가까웠음을 짐작한 우륵은 가야금도 함께 사라질까 두려웠다. 그가 선택한 길은 가야금을 안고 신라로 투항하는 길이었다. 

  그런데 왜 가야 사람 우륵이 신라 변방의 충주에 왔을까? 충주시 문화관광해설사는 가야사람인 우륵이 충주에 온 까닭은 진흥왕의 사민정책(徙民政策) 때문이라고 했다. 당시 신라 조정은 가야를 정복한 후 이른바 사민정책을 쓰게 되었고, 우륵은 신라의 사민정책에 따라 고구려, 백제와 대립하던 변방 충주로 옮겨와 살게 되었던 것이다.

 

  신라 진흥왕은 우륵의 귀화를 기뻐하여 우륵을 충주에 거주케 하고는 신라 청년 중에서 법지(法知), 계고(階古), 만덕(萬德)을 뽑아 보내 악을 배우게 하였다. 우륵은 이들의 능력을 헤아려 각기 춤과 노래와 가야금을 가르쳤다 한다. 그는 이곳을 우거지로 삼고 풍치를 상미하며 산상대석에 앉아 가야금을 타니 이 미묘한 소리에 사람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었다고 한다. 탄금대라 불리는 유래이다.

  또한 탄금대는 임진왜란 때 신립(申砬·1546~1592)이 8천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왜장의 군대를 맞아 격전을 치른 전적지이기도 하다. 신립장군은 이곳 탄금대에서 배수의 진을 치고 팔천여명에 이르는 병사들과 함께 왜적에 맞서다가 죽음을 각오하고 적과 싸우다가 전원 옥쇄 순절했던 곳이다. 

  광장 전면에는 이런 사연을 담은 탄금대사연 노래비가 있다. 충주 지역의 대표적 관광지인 탄금대를 소재로 한, 이 노래비에 올려진 ‘탄금대사연’은 충장공 신립 장군이 임진왜란 당시 왜적을 맞아 배수진을 치고 싸우다 장렬히 산화한 사연과 신라 때 악성 우륵이 가야금을 타고 풍류를 읊으며 후학을 양성했던 사연이 아련하게 표현돼 있다. 1968년 당시 KBS 충주방송국에 근무하던 이병환 씨가 글을 쓰고 향토작곡가 백봉씨가 곡을 붙여 지금까지 충주의 대표적인 향토가요로 애창돼 오고 있다. 


   탄금정 구비 돌아 / 흘러가는 한강수야
   신립장군 배수진이 / 여기인가요
   열두대 굽이치는 / 강물도 목메는데
   그 님은 어델 가고 / 물새만이 슬피우나.

   송림이 우거져서 / 산새도 우는가요
   가야금이 울었다고 / 탄금인가요
   우륵이 풍류 읊던 / 대문산 가는 허리
   노을 진 남한강에 / 님 부르는 탄금아가씨


 

 

 

  노래비 앞에서 ‘탄금대사연’의 가사를 읽어보고 우측 산책로를 따라가면 탁 트인 넓은 솔밭길이다. 이 길에는 군데군데 조각상이 세워져 있어 볼거리를 제공한다.  잠시 걷으면 우측에 높이 솟아있는 탑이 충혼탑이다. 이 탑에 봉안된 영령들은 해방 후 특히 6.25사변 때 국가의 방패가 되었던 충주지방의 전몰군경들이다. 특히 충혼탑이라는 글씨는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의 친필이며 매년 현충일에 이 곳에서 기념행사를 연다.  

 

 



  조금 더 가서 높이 솟아있는 탑은 팔천고혼 위령탑이다. 높이 솟은 탑 아래쪽에 칼을 빼든 충장공 신립장군과 병사들이 적과 전투하는 형상을 부각시켰다. 이 탑은 조국을 위해 몸을 던진 영령을 추모하는 동시에 그들의 숭고한 죽음을 후세에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한 것이다. 

 

 


  충혼탑 옆에는 충주 출신 항일시인이자 아동문학가인 동천(洞泉) 권태응(權泰應, 1918~1951) 선생의  ‘감자꽃 노래비’가 서있다. 비의 모양은 반 타원형의 돌기둥을 앞을 자르고 위에서부터 노래비라 적고, 그의 대표작 ‘감자꽃’ 가사를 적어 놓았다. 감자꽃은 일제강점기의 울분과 항일 정신을 동요에 담은 노래다. 

   자주 꽃 핀건 자주 감자

   파보나마나 자주 감자
   하얀 꽃 핀건 하얀 감자

   파보나마나 하얀 감자

 

 


  

  이 시는 뻔한 이야기 같은데 감동을 준다. 무디어진 어른의 눈이 감지해 내지 못하는 단순함이 보여주는 진실이 있기 때문이다.  또 오늘날 정보화. 산업화. 기계화 속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또 다른 삶의 모습을 느끼게 하고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보여준다.

 

  특히 이 시가 갖고 있는 시적 은유(Metaphor)는 민족적 동일성 혹은 우리 민족의 운명을 은유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동요「감자꽃」은 생명현상의 섭리를 식물을 대상으로 하여 당시 일본인들이 민족의식을 없애고 일본 천황의 국민으로 삼기 위하여 창씨개명을 강요하자 이에 반대하는 은유로 씌어졌다고 한다. 이 시인은 34년의 짧은 삶을 살다 갔지만 동심으로 삶의 무게를 안고 현실과 싸운 시인으로 기억될 것이다. 

 

 


  감자꽃노래비를 내려가면 투박한 매점과 그 위로 높은 언덕이 형성되어 있는데 자세히 보면 인위적인 둔덕임을 알 수 있다. 바로 탄금대 토성이다. 탄금대 토성은 대문산(탄금대)에서 가장 동북쪽으로 지세가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남한강 물길을 주시할 수 있으면서 대문산 전체를 감제할 수 있는 곳이다.

 

  흙으로 쌓아 올린 토성이지만 축성 당시 토성 주변에 많은 강돌들을 이용하여 그 위에 흙을 덮었으리라. 전체 둘레는 약 400여m지만 현재 남아 있는 부분은 약 120여m에 불과하여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성인지 쉽게 구별하기 힘들다. 

    토성 우측 언덕길을 따라 언덕 위로 오르면 소나무 우거진 숲 속에 기미독립선언문을 작성한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이 찬한 ‘탄금대비’와 현대식 정자가 운치를 더해 준다. 

 

  이곳의 탄금대비는 높이183cm, 폭66cm, 두께 34cm의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비문에는 충주의 연혁과 남산성에서 몽고군과 싸운 승장 김윤후 장군의 행적과 악성 우륵, 임진왜란 때 원통하게 자결한 신립 장군의 충절을 기리는 내용을 담고 있다.

 

 

 

 

  김윤후(金允侯)는 고려 고종 때 승장으로 충주산성 방호별감(防護別監)으로 있으면서 몽골군이 성을 포위하고 70여 일을 공격하였으나 군민이 일치단결하여 성을 사수하고 이를 격퇴시켰던 인물이다.

 

  그 옆에 높이 속은 정자는 탄금정(彈琴亭). 탄금정에 올라서면 남한강아래 전경이 펼쳐진다. 2층 누각으로 된 탄금정에는 시문을 적은 액자들이 사면에 걸려 있는데 모두 탄금대에 얽힌 사연과 탄금대의 아름다운 경치를 노래한 것들이다. 나는 선인의 글을 읽고 사진도 찍었다. 


 

   

      탄금대 시퍼런 물 질펀하게 흐르는데
      천고의 물결 속에 지난 일은 잠겼는가
      강물은 바위를 돌아 흐느끼는데
      돌에 부딪히는 물소리 으스스하기만 하고 
      날은 궂은데 희미한 무지개
      전각 앞에 비를 돌아 앞산을 넘는구나.  



 

  

      그 옛적 신공이 겪었던 최악의 싸움
      우리 군사 이 언덕에서 그 목숨 다하였도다
      반평생을 싸움터에서 끝내는 얻은 바 없이
      한 목숨 버림으로 다한 마음 속 서린 사연
      새재에 뜬 구름 그 행상 장하기만 하고
      탄금대 드리운 고목 울창도 한데
      나라일 위급할 때 뽑아 보낸 장군이여
      그대 사랑 앞에 눈물과 콧물 흘리며
      흐느껴 보는 것을.

 

 


  

      봄바람 동쪽으로 탄금대를 찾았더니
      전쟁터 드리운 구름 그때 울분 걷히지 않았네
      최후 일병 싸우쟀던 그 공도 없이
      한 서린 강산 지나는 나그네 술잔만 기울이네.
      어촌의 저녁 돛대 충주를 향해 물길을 거스르고
      남쪽 바다 거쳐 오는 봄소식
      조령을 다시 올라서는 그 때 그런 봄철인데
      해는 저물고 신 장수는 만날 수 없이
      아득하게 펼쳐진 모랫펄 백구만이 감도는구나.

 

 



   또, '청금정(聽琴亭)'이란 시는 

      청금정과 탄금대는 마주하여 있는데
      강산은 늙지 않고 
      예나 이제나 다름없이 떠도는 구름
      바람은 오락가락 가야금 소리
열두 구비 난간
      산 위에 뜨는 달이 남쪽을 가리키네.


 

 


  
  어디 탄금대를 소재로 한 작품이 이뿐이겠는가. 탄금대의 역사는 종종 문학의 소재가 되어 한시는 물론 소설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주제는 그들의 충성과 절개를 기리고, 패전을 반성·극복하자는 내용을 담고 있다.


  탄금정을 내려와 강 쪽으로 계단을 내려오면 신립장군순국지지(申砬將軍殉國之址)가 있다. 신립장군 순국지지 비문내용을 보면 “宣祖二十五年(一五九二年) 四月 二十八日 八道都巡邊使 申砬將軍이 從事官 金汝沕과 더불어 鳥銃砲火의 數十萬 倭賊을 槍劍弓矢의 八千軍士로 맞아 싸우다가 戰勢不利하자 金公과 함께 敵陣에 突入하여 數十賊을 擊殺한 뒤 彈琴臺 이곳 열두대에서 享年 四十七를 一期로 哀惜하게 爲國殉節하시다.”라고 적혀 있다. 당시의 상황과 신립장군의 최후 전투를 좀더 자세히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 1592년 4월 13일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왜병이 부산성을 공격했고, 이튿날에는 송상현이 지키던 동래성을 함락시켰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것이다. 왜군은 부산에 상륙한지 열흘 남짓한 4월 24일 백두대간 동쪽 턱밑인 상주까지 함락되었다.

  이에 선조는  4월 20일 당시 조선에서 최고의 명장 대우를 받고 있던 신립을 도순변사(都巡邊使)로 임명하여 왜구를 방어하는 임무를 부여함과 동시에 상방검을 하사하여 신립에게 선조 자신과 같은 권한을 부여했다. 이에 신립은 도성을 떠나 남하하면서 군사 8,000여명을 모아 충주에 도착한 뒤 4월 24일 부장 몇 사람과 조령으로 달려가 형세를 살필 때, 먼저 경상도로 남하하였던 순변사 이일이 상주에서 패하여 돌아왔다.

  이때 종사관 김여물 등이 “적은 수의 병력으로 왜적의 대군을 방어할 곳은 마땅히 지형이 험한 조령뿐이다.”라고 건의하였다. 왜냐 하면 고개는 상대적으로 높은 위치에서 길목을 차단하는 등 전술적인 이점이 있어, 수비와 방어의 요충이 돼 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신립은 그 말에 따르지 않고 “이곳에서는 기병을 쓸 수 없으니 마땅히 평원에서 일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26일 그는 드디어 충주의 서북 4㎞ 지점에 있는 탄금대에 백두대간 요충인 새재 대신 충주 탄금대 앞 개활지에 배수진을 치는 전략을 택했다. 신립이 왜 새재에 진을 치지 않았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추측컨대 적이 보병이고 아군은 기병이므로 개활지에서의 전투가 유리하다고 판단하였고, 또한 아군 병력이 대부분 훈련이 미숙하여 배수진을 치고 싸워야 용감하게 싸울 것이라고 판단하였으며, 조령까지 가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했을 가능성 등이 거론되고 있다.

  작전이 개시된 때는 장마철이어서 탄금대에는 기병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소나기가 쏟아졌다. 단월벌은 수렁으로 변해 신립의 장기인 기병은 제대로 역할을 수행할 수가 없었다. 숫적인 열세와 지형적인 불리에다 기후마저 도와주지 않아 신립이 이끄는 기병은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의 상대가 될 수 없었고, 결과적으로 신립이 이끄는 조선 최강 기병부대는 왜군의 총알받이가 되었을 뿐이었다. 여러 기록에 의하면 전투에 패배한 신립은 강물에 몸을 던져 자결하였고, 이종장과 김여물도 신립의 뒤를 따라 전사하였다.

  이로써 조정의 기대를 모은 신립 군대의 항전은 실패로 돌아가고 왜군은 충주성에 무혈 입성하였다. 신립의 패보가 조정에 전해지자 민심이 극도로 혼란해지고, 국왕은 서울을 떠나 평안도로 피난하게 되었다.

 

 

 

  신립장군순국지지(申砬將軍殉國之址)의 내용을 읽고나서 몇 걸음 앞으로 나가면 아스라이 강물이 내려다보이는 100척이나 되는 기암절벽 위 작은 공간이 나타나고 끝부분에 큰 바윗돌이 나타난다. 이곳이 열두대다. 신립 장군이 탄금대에 배수진을 치고 죽을 각오로 싸울 때 12번이나 오르내리며 활줄을 물에 적셔 쏘면서 병사들을 독려하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신립 장군이 이곳 탄금대에서 12번이나 싸웠으나 승산이 없자 이 곳에서 투신 자결했다고 해서 열두대라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다. 어느 이야기가 맞는지는 알 수 없으나 중요한 건 당시의 치열했던 전투와 신립 장군의 장렬한 최후를 부각시키고자 함에는 틀림없다. 

 

 



  이곳 바위에 올라서면 열두대 절벽 아래로 남한강을 갈라놓은 무인도인 용섬의 풍경이 한 폭의 그림처럼 보인다. 그리고 좌측으로는 달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합수머리의 강줄기가 보인다. 고개를 들어 멀리 시선으로 옮기면 신립 장군의 고혼을 달래며 흐르는 강물 뒤로 멀리 국보 6호인 중앙탑이 아스라이 보이고, 우측으로는 옛날 충주 비료 공장을 개조한 목행동 새한미디어 공장이 눈에 들어온다, 

 

 

 


  다시 탄금정 우측 방향으로 발길을 옮겨 언덕을 내려오는 길옆에는 우륵이 이곳 산상대석에 앉아서 가야금을 탔음을 상기시키는 돌비가 있다. 돌비 앞에서 충주목사를 지낸 조선시대 청백리였던 박상(朴祥)의 시를 떠올려 본다. 

 

 

      깊고 긴 강 위에는 단풍이 들어

      신선대만 외로이 구름 속에 솟았구나.

      가야금 타던 사람 학을 타고 달로 가고

      피리 부는 나그네만 솔바람 속에 있네.

      만사는 한번이라 흐르는 물 슬프구나!

      덧없음을 탄식하며 쑥대머리 매만지네

      뉘라서 호주목(湖州牧)을 그려낼 건가?

      석양에 거닐면서 미친 듯 읊조리네.

 

 



  다시 발길을 옮겨 충장공신립장군순절비와 궁도장 야외음악당 등으로 이어진 길을 밟으며 나는 생각했다. 신립장군의 탄금대 전투 패배는 임진왜란 발발이후 최대의 패배였으며 결국 선조대왕의 몽진으로 이어진 가슴 아픈 우리의 역사였다.

 

 


  그러나 어찌하랴! 용맹스러웠던 역사는 우리에게 자부심과 자신감을 주지만, 고통 속에서 이루어진 역사는 우리의 DNA를 자극하여 아픔을 공유하게 하는 정서적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최근 들어서는 탄금대를 찾는 일본인 관광객이 부쩍 늘어가고 있다. 그들의 진의를 따져 보기에 앞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과거의 아픔을 단지 아픔으로만 치부해 버린다면 발전은 없다. 그것을 거울로 오늘을 살아가고 내일을 대비해야 발전이 있고 밝은 내일을 보장잗을 수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탄금대 노래는 지금도 친서민적인 가요로도 불리고 있는 것이다.

   푸른 물결 흰 돛대가 흘러내리는탄금대 여울 속에 잠긴 사연들 
   아는 이 누구인가 말 물어 보자
무심한 달빛만이 너울거린다 
   달빛조차 어렴풋이 은근한 밤에
탄금대 누 마루에 홀로 앉아서 
   구슬픈 피리소리 가슴에 스며
애끊는 나그네만 옷깃 적신다.

 

 

   어디선가 가는 솔바람을 타고 구슬픈 가요 한 자락이 나그네의 귓가에 들려오는 듯하다. 우리는 늦은 점심을 위해 인근에 있는 한성감로정(충주시 칠금동 403-1, 043-845-6539)로 발길을 옮겼다.

 

 

탄금대 내에 설치된 조각작품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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