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 미륵불을 찾아서
평안을 기원하던 땅 안성(安城), 미륵의 얼굴서 희망을 보다
안성 = 글·사진 박경일기자
경기 안성(安城). 풀어보자면 ‘평안한 곳’쯤이 되겠지만, 실제 역사를 뒤적여보면 안성은 ‘평안한 곳’이었다기보다는 ‘평안함을 기원했던 땅’이라는 것이 더 맞을 듯싶습니다. 삼국시대는 물론이거니와 고려, 조선을 거치면서도 환난이 그치지 않았던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와 백제가 맞섰던 접경지역이었으니 더 말할 나위 없고, 고려 때는 원의 침입으로 초토화됐으며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 때 왜적의 통로가 됐던 곳이었지요. 그뿐일까요. 고려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학정과 수탈, 그리고 반역 또한 그치지 않았던 땅입니다.
그러나 안성에서는 절망이 아니라 희망이 피어났습니다. 안성 땅 곳곳에 남아 있는 수많은 미륵불이 그 희망을 증거합니다. 모르긴 해도 전국을 통틀어 안성만한 넓이에 미륵불이 이처럼 집중적으로 모여 있는 곳도 없을 겁니다. 툭 불거진 눈에 서툴게 새겨진 미륵불은 산속에, 마을 속에, 저잣거리에 우뚝 서 있습니다. 안성사람들에게 그만큼 미륵세상은 간절했던 것이지요. 가늠할 수 없는 시간이 지나가면서 어깨에는 푸른 이끼가 돋고, 얼굴은 비바람에 깎여나갔지만, 아직 안성 땅에는 미륵이 살아 있습니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도래하지 않아 여전히 소중한 꿈을 간직한 채…. 신년의 첫 여행지로 안성을 택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좌절과 절망 속에도 도래할 세상의 꿈을 향한 기원이 남아 있는 곳, 그것이 바로 안성 땅입니다.
안성에서는 또 신년에 대한 기대와 소망으로 가득한 이른바 ‘호작도(虎鵲圖)’도 만날 수 있습니다. 예로부터 정월이면 호랑이와 까치가 함께 있는 민화를 대문마다 붙여놓았답니다. 호랑이는 액운을 막아주는 이른바 ‘벽사(슌邪)’의 의미가 있는데다 까치는 기쁜 소식을 전해주는 길조이니 호작도는 새해를 맞아 액운을 떨치고 기쁜 소식을 기다린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악운을 쫓고 희망의 소식을 기다리던 그림입니다.
금광면 신양복리의 복거마을에는 벽화로 그리고 조형물로 담은 호랑이들이 있습니다. 복거마을에는 슬레이트 지붕 위에, 민가의 흙담벼락에, 골목의 담장에 호랑이들이 기웃거리고 있습니다. 호랑이는 토끼가 붙여주는 불로 곰방대를 빨고 있거나, 쇠붙이로 만들어져 마을 복판에 웃음을 띠고 서 있거나, 담벽에서 머리를 길가 쪽으로 내밀고 사람살이를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그림 속에 까치는 없지만, 마을의 둥구나무에 앉아 있는 까치들이 빈자리를 대신해서 한 폭의 호작도를 완성합니다. 복거마을의 이름도 복(福)이 크다(巨)는 뜻이니 신년의 여행지로 이만한 곳이 또 있겠습니까.
안성에서는 미륵불만 돌아본대도 하루나절은 어림도 없고, 이틀쯤으로도 부족합니다. 임꺽정의 기운이 남아 있는 칠장사를 찾아 나한전 뒤편 나옹선사가 심었다는 나옹송의 풍모를 들여다보거나, 뒤틀려 굽은 아름드리 나무를 통째로 가져다 기둥으로 삼은 청룡사 대웅전의 호쾌한 풍모를 둘러보는 것까지 더한다면 사흘쯤으로도 어림없을 듯합니다. 여기다가 천주교 죽산성지에는 가슴 뭉클해지는 순교의 사연이 있고, 칠장사 아래에는 고된 세상살이의 한탄과 원망을 다 들어주는 사찰인 ‘묵언마을’까지 있으니 한 두 번의 여정만으로는 다 돌아보기조차 숨이 차답니다. 안성, 가까이 있었으나 미처 몰라본 곳입니다.
‘1000년의 세월’ 돌고 돌아도, 미륵은 꿋꿋이 서 있네
# 고통 속에서 닿고자 했던 이상세계의 꿈을 그리다
경기 안성 땅에는 유독 미륵이 많다. 도처에 미륵이다. 안성의 미륵은 더러는 동구 밖의 솔숲에 덩그러니 서 있고, 더러는 깊은 산중의 호젓한 절집을 지키고 있고, 더러는 아파트를 배경으로 저잣거리에 나앉아 있기도 하다. 미륵은 하나같이 투박하고 거칠다. 서툴게 깎아내 몸체의 비례에 맞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손이며 자세도 부자연스럽다. 조형미는커녕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것들도 있다. 그나마 시간에 마모되면서 어깨에는 이끼가 앉고, 얼굴은 비바람에 깎여나갔다. 그럼에도 안성의 미륵은 어지러웠던 시대의 백성들의 이상세계의 꿈으로 여태 살아남아 있다.
미륵은 불교에서 석가모니불의 뒤를 이어 56억7000만년이란 까마득한 훗날 홀연히 출현해 세 번의 설법으로 중생을 구제한다는 미래의 부처다. 가늠할 수조차 없는 긴 시간. 그러나 아무리 먼 시간이라도 미륵 출현은 날은 잡혀 있는 것이니 도래의 희망만큼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 오랜 시간 뒤 미륵이 도래하는 미래세상은 고통이 없는 낙원의 땅임은 물론이다. 미륵불의 하생을 기다리는 땅. 안성에 남아 있는 미륵불에는 현실의 고통에서 신음하는 이들이 닿고자 했던 이상세계의 꿈이 담겨 있다.
그렇다면 하필 안성 땅에 수많은 미륵이 남아 있는 것은 어떤 연유일까. 역사를 뒤적여보면 안성은 그야말로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삼국시대 백제의 땅이었다가 고구려 영토가 됐고, 한때 신라의 땅이 되기도 했다. 고려말 조선 초 안성 땅에는 탐관오리들의 패악이 그치지 않았고, 임진란 때는 왜구의 피해가 극심했다. 전쟁과 내전이 있을 때마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던 곳, 이렇듯 시대가 어지럽고 고통스러웠던 만큼 안성의 백성들은 희망에 매달려 다가올 이상세계를 기다렸다.
그래서일까. 안성에는 스스로를 미륵으로 자처했던 궁예의 자취도 남아 있다. 궁예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것은 안성 땅에서였다. 궁예는 안성의 죽산땅에서 일어난 기훤의 수하에 들면서 비로소 역사에 모습을 드러낸다. ‘삼국사기’나 ‘고려사’를 들춰보면 궁예는 강퍅하고 잔인했던 인물이었다. 3척이나 되는 쇠 방망이를 달궈 하루에도 수백 명씩을 죽였다. 그러나 역사는 늘 ‘승자의 기록’인 것이니 이를 액면 그대로 믿을 수는 없는 일. 궁예가 그토록 포악한 인물이었다면 어찌 자신의 세력을 이끌며 태봉국을 열 수 있었을까. 그렇게 잔인했던 인물이었다면 그가 죽고 난 뒤 안성의 백성들이 미륵도래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궁예미륵 석불에 치성을 드려온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 미륵불 앞에서 궁예의 못다 이룬 꿈을 만나다
안성의 미륵을 돌아보겠다면 가장 먼저 찾아가 볼 것은 국사봉에 있는 ‘궁예미륵’이다. 삼죽면 기솔리 국사봉의 정상쯤에 절집 국사암이 있고, 그 국사암의 경내에 3기의 미륵이 서 있다. 국사봉을 오르는 길은 제법 가파르다. 시멘트포장도로가 놓이긴 했지만 마침 폭설이 쏟아진 이튿날이라 차를 타고 오를 수는 없었다. 코가 길에 닿을 정도로 가파른 오르막. 그러나 그 길에 펼쳐진 눈부신 설경은 걷지 않았다면 보지 못했을 터이니 오히려 잘 된 일이었다.
아담한 크기의 단정한 생김새. 보검과 약병을 들고 있는 국사봉의 미륵불은 어찌나 얌전한지 언뜻 문인석처럼 보이기도 한다. 나란히 서 있는 3기의 미륵은 왼쪽의 것이 문관, 오른쪽의 것은 무관, 가운데 좀 큰 석불이 바로 궁예미륵이다. 인근 북좌리에서 도를 닦던 궁예가 이곳으로 와서 미륵불을 만들었다고 전해지지만, 실제로 이 소박한 석불은 궁예의 후대에 그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안성사람들은 누대에 걸쳐 궁예미륵 앞에서 머리를 조아렸다. 예로부터 미륵불 아래 솟는 샘물이 영험하다는 소문이 났다. 애를 낳게 해달라는 소원부터 병을 낳게 해달라는 소망을 품고 백성들은 이곳에다 소원을 빌었다. 그곳에 흩어진 1000년의 시간 동안 그 앞에 풀어냈을 허다한 소망들, 그리고 스스로 미륵을 자처하며 미륵세상을 꿈꾸다가 스러지고만 궁예의 꿈. 그 꿈들은 지금 다 어디로 흩어졌을까.
궁예미륵이 서 있는 국사암의 지척에 있는 쌍미륵사에도 거대한 미륵 두 기가 우뚝 서 있다. 대웅전과 요사채 뒤편의 비탈진 산자락에 서 있는 미륵은 키가 5m가 넘는다. 기솔리 주민들은 두 미륵 중 체구가 좀 더 굵은 동편의 미륵을 남자 미륵, 가는 모습의 서쪽 미륵을 여자미륵이라고 불렀다. 얼굴의 윤곽은 비바람에 씻겨 닳았지만 거구의 몸체에 어울리는 위엄만큼은 남아 있다. 마침 소담스럽게 내린 함박눈을 어깨에 이고서 두 기의 미륵불이 발아래 세상을 굽어본다. 이른 아침, 새벽 눈길을 밟아 온 쌍미륵사의 스님이 미륵불 앞에서 마음을 다해 두 손을 모으고 머리를 조아렸다.
# 저잣거리의 미륵 앞에서 소망을 들여다보다
안성 사람들이 대표로 치는 미륵은 태평미륵이다. 영남에서 한양에 이르는 교통의 요지였다는 죽주산성 아래 태평미륵이 서 있다. 미륵당 안에서 동쪽을 바라보고 서 있는 태평미륵은 키가 6m에 달한다. 당당한 풍모의 미륵은 신기하게도 멀리서 보면 섬뜩한 기분이 들 정도로 험상궂은 모습이지만, 가까이 다가설수록 표정이 온화하게 바뀐다. 미륵불의 발치에서 올려다보면 환하게 미소를 짓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태평미륵은 몽골군에 맞서 죽주산성을 지키던 송문주와 처인성(용인)에서 원나라 장수 살례탑을 사살했다는 김윤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워졌다고 전해진다. 고려 때 안성 일대는 몽골군과의 최대 격전지였으니 당시 안성 땅은 피바다를 이뤘을 터다. 그곳에 몽골군을 제압한 장수들에 의탁해 안성사람들은 거대한 미륵불을 세우고 오가는 이들은 이 미륵 앞에서 태평성대의 세상을 바랐으리라.
안성의 미륵 중 가장 독특한 것을 꼽으라면 아양동 미륵을 댈 수 있겠다. 읍내의 아양동 미륵은 아파트와 슬레이트 집들을 병풍처럼 두르고 저잣거리 한복판에 서 있다. 산에서 내려와 마을로 들어온 전형적인 마을공동체 미륵인 셈이다. 키가 크고 차돌로 박은 동그란 눈동자가 선명한 미륵을 두고 주민들은 ‘할머니 미륵’이라고 불렀고, 그 옆의 작고 단단한 미륵을 할아버지 미륵이라 불렀다.
안성의 미륵은 이것 말고도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서운산 정상에도 있고, 청룡사 인근의 산평리에도 있다. 대농리에도, 동촌마을도, 죽주리에도 있다. 어떤 것은 갈색바위를 다듬어 만들어 석양에 금빛으로 반짝이고, 어떤 것은 허리를 땅에 묻고 곰솔 숲에 들어 있다. 오랜 세월 닳고 닳아 돌로 되돌아가려는 미륵도 있다.
이렇듯 많은 안성 땅의 미륵들은 또 얼마나 많은 백성들의 소망을 간직하고 있을 것인가. 누구는 미륵의 돌가루를 갈아 마셔 고대하던 아들을 낳기도 했을 것이고, 누구는 몇 날 며칠의 치성도 헛되이 병으로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그 인간사의 오욕칠정을 다 지켜보고 1000년의 세월을 지나와 안성의 미륵은 지금도 여전히 그 자리에 우뚝 서 있다. 56억7000만년 뒤의 미륵세상을 기다리며….
# 골목에 그려진 호랑이와 까치서 새해 기운을 받다
안성에는 신년 벽두에 꼭 찾아가볼 만한 곳이 또 있다. 금광면 신양복리의 복거마을이다. 120여 가구가 사는 자그마한 마을은 ‘미술마을 만들기’ 작업의 일환으로 담벼락과 지붕, 골목에 호랑이그림과 조형물로 장식됐다. 호랑이를 닮은 마을 뒷산이 앞의 작은 산을 향해 엎드린 형국이라 해서 ‘엎드린 호랑이’라는 뜻의 복호(伏虎)라 불렸던 옛 마을이름에서 착안해 진행된 작업이었다.
복거마을에는 온통 호랑이 일색이다. 슬레이트 지붕에도, 마을회관의 옥상에도, 시멘트 담벼락에도 그려지고 세워진 호랑이들이 기웃거린다. 허름한 한옥의 시멘트벽에는 호랑이가 곰방대를 들고 토끼가 붙여진 불로 담배를 빨고 있는 모습도 그려져 있다.
예로부터 정월이면 호랑이와 까치, 그리고 소나무가 함께 그려진 그림을 대문에 붙여놓다. 이름 하여 ‘호작도(虎鵲圖)’다. 하필이면 신년의 그림에 등장하는 것이 호랑이와 까치, 소나무일까. 호랑이는 범을 뜻하는 표(豹)와 ‘고할 보(報)’의 중국식 발음이 같다. 고로 범은 ‘알리다’는 뜻인 것이고, 까치는 알다시피 기쁜 소식을 전하는 길조다. 여기다가 소나무를 뜻하는 송(松)은 ‘보낼 송(送)’과 발음이 같다. 따라서 호작도를 들여다보면 호랑이와 까치, 소나무가 어우러져 ‘나쁜 것을 보내고 기쁜 소식이 오는 새해’라는 의미로 읽히는 것이다.
사실 복호동에 들러 호랑이 그림을 찾아 골목을 돌아다니다 보면, 이런 설명 없이도 새해를 맞는 기분 좋은 셀렘을 느낄 수 있다. 설명할 수 없는 유전자 때문일까. 굳이 따로 배우지 않더라도 해학넘치게 그려진 호랑이에서 상서로운 새해의 기운이 읽히기 때문이다.
가는 길
안성은 수도권에서 가까워 길이 간명하다. 경부고속도로 안성나들목으로 나오는 것보다 안성갈림목에서 평택∼제천 간 고속도로로 갈아타고 남안성으로 나가는 것이 가장 가깝다. 궁예미륵이 있는 기솔리로 가려면 영동고속도로 양지나들목으로 나와 17번 국도로 백암면사무소까지 가서 다시 325번 지방도로를 타고 삼죽면사무소를 거쳐 가면 된다.
묵을 곳·먹을거리
칠곡저수지를 끼고 있는 원곡면의 ‘프라다관광호텔’(031-653-4000)은 개관 1주년을 기념해 평일에 한해 4만원에 방을 내준다. ‘안성호텔 수’(구 안성비치호텔·031-671-0147)는 금광저수지를 끼고 있어 풍광이 빼어나다. 안성에는 가벼운 한정식을 뜻하는 ‘쌀밥집’들이 많다. 그중에서도 가현동의 ‘양반밥상’(031-671-4499)이 추천할 만하다.
<출처> 2011. 1. 5 /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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