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창녕
약간은 수줍은 가을 우포늪
철새와 나무 그리고 별 1억만년 동안 품어줘서 고맙다 우포야
우포늪(창녕)=어수웅 기자
가을 초입, 경남 창년우포(牛浦)를 다녀왔다. 인간이라는 참을성 부족한 종(種)에게는 지금이 이 늪을 찾을 적기다. 지난여름, 습기로 가득한 염천(炎天)의 늪은 숨이 턱턱 막혔고, 유난히 가혹했던 올여름의 비는 텃새들의 둥지마저 휩쓸었다. 하지만 지금, 철 내내 숨죽였던 혹은 과잉으로 부풀었던 우포의 생명들은 최적의 조화를 찾아가고 있었다. 왕버들, 칡넝쿨 아래 수줍게 숨어 있던 반딧불이마저도. 때로 낮보다 밤이 더 아름다웠던 2010년 가을, 우포 여행.
열 개의 문장으로 우포를 정리하면 이렇다.
인류가 살기도 전인 1억4000만년 전에 자리를 잡은 우리나라의 가장 큰 자연 습지. 쉽게 말해 물에 젖은 땅, 늪이다. 여의도 3배 정도 땅덩이(8.54㎢)에 모두 4개의 크고 작은 늪이 모여 있는데, 큰 것부터 소벌(우포), 나무벌(목포), 모래벌(사지포), 쪽지벌로 부른다. 하루에도 몇 번씩 변신한다고 팔색조, 천의 얼굴을 가진 늪, 1500여 생명체가 사는 야생 동·식물의 천국 등의 영광스러운 별명을 갖고 있다.
지금에야 자손만대 길이길이 물려줘야 할 은총의 땅 대접을 받고 있지만, 수십년 전만 해도 천덕꾸러기였다. 보릿고개 시절에는 늪 일부를 메워 논을 만들었고, 1978년에는 농어촌진흥공사도 개발 욕심을 냈으며, 1993년에는 생활쓰레기 매립장을 만들려는 시도까지 있었다. 1989년부터 늪에 들어와 보존운동을 벌이고 있는 이인식 우포늪따오기복원위원장은 "당시에는 늪에 냉장고가 둥둥 떠다닐 만큼 엉망이었다"고 했다. 이들의 노력으로 1997년에 환경부가 자연생태계 보전지역으로 지정했고, 물새 서식지로 국제적으로 중요한 습지임을 인정받아 1998년 람사르협약에 등록됐다. 일반인이 들어갈 수 없는 비무장지대 대왕산용늪을 제외하면, 한국 최초 등록이다. 여기까지는 공부 차원.
▲무성한 수초를 피하기 위해 뱃머리를 곧추세운 이마배가 우포를 가른다. 자라 등 껍데기 모양을 닮은 자라풀, 아카시아잎처럼 생긴 생이가래, 마름모꼴 모양 잎을 지닌 마름이 물 위에서 초록 융단이 됐다. / 영상미디어 유창우 기자
아홉 문장으로 추천하면 이렇다.
낮의 우포는 모두에게 익숙한 풍경. 하지만 밤의 우포에는 현실과 환상이 기묘하게 뒤엉킨 시간이 흐른다. 가로등 하나 없는 우포에는 밤이면 세 개의 별이 뜬다. 쏟아질 듯 빽빽한 하늘별, 네 개의 늪에 고스란히 내려앉은 물별, 그리고 1년 중 이맘때만 만날 수 있는 풀별, 반딧불이다. 소목 마을 주차장에서 걸어서 5분 거리,
우포가 희뿌옇게 내려다보이는 주매제방을 걸었다. 원시적인 둑길 양 옆으로 무성한 칡넝쿨을 조심스레 헤치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앙증맞은 풀별. 시각을 제외한 오감(五感)은 무한대로 부풀어오르고, 심지어는 희미해진 시각마저 극한으로 상상력을 펼친다. 조금 전 미루나무 옆 늪 가에서 튀어오른 놈은 가물치였을까, 붕어였을까, 아니면 이제는 많이 줄었다는 황소개구리였을까. 소쩍새가 밤의 고요를 종횡으로 가르는데, 유성 하나가 저 멀리 화왕산 쪽으로 꼬리를 그으며 떨어졌다.
새벽의 우포를 여덟 문장으로 소개한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더 많은 먹이를 잡는 이유를 아시는지. 단지 부지런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우포 특유의 새벽 안개와 이슬에 젖은 풀벌레들은 몸이 마를 때까지 꿈쩍 못하고, 해오라기·중대백로·왜가리·물총새·딱새·박새·멧비둘기 등 우포의 터줏대감과 계절 손님들은 박제된 희생양을 자유분방하게 즐긴다. 자전거를 타고 3㎞ 가까운 대대제방을 달린다. 오른쪽으로는 황금빛으로 물들어가는 대대마을의 논이 휘황하고 왼쪽에는 생이가래·자라풀·가시연이 만든 초록 융단 위에서 눈처럼 흰 중대백로가 분주하다. 1억4000만년의 시간이 고여 있는 곳. 우포의 아침이 깨어나고 있다. 새벽 5시 30분.
▲ 대대제방에서 바라본 우포. 부풀었던 여름은 이제 다소곳하게 가을을 받아들이는 중이다. / 영상미디어 유창우 기자
누구는 쪽배로, 또 누구는 나룻배라 부르는 우포의 명물. 언제나 발목을 잡는 수초를 뿌리치려고 뱃머리 '이마'를 곧추세운 한 조각 목선이다. 이 민물고기 천국의 잉어·붕어·가물치·메기·동자개는 소목마을에 사는 9명 어부 몫이다. 환경부가 1997년 생태계 보전지역으로 지정한 뒤, 이전부터 마을에서 물고기를 잡아온 이들에게만 주어진 권리다. 원래는 열한 명이었지만, 그 사이 두 명이 세상을 떠났다. 새벽 5시. 가득한 물안개와 물풀을 장대로 헤치고, 소목마을 나루터를 이마배가 떠난다.
조금 지루하지만 다시 학습 시간. 우포의 기원을 여섯 문장으로 압축하면 이렇다.
빙하가 녹고 바닷물이 육지 안으로 밀려들면서 한반도 남쪽 땅은 여러 번 몸을 뒤채었다. 그 중 하나가 낙동강 바닥이 우포 옆을 흐르는 토평천보다 높아진 것. 산에서 휩쓸려 내려오던 돌과 흙이 저 멀리 남해까지 내려가지 못하고 바닷물에 막혀 쌓였기 때문이다. 지금 우포에서 7㎞ 떨어진 낙동강 자연제방의 높이는 14~17.5m, 토평천의 해발고도는 9.6m. 여름에 물이 불면 낙동강 물이 우포로 역류하고 평상시에도 잘 빠지지 않아, 우포는 고여 있는 늪이 됐다. 1억4000만년이 걸린 역사다.
▲ 늪의 밤은 때로 낮보다 아름답다. 주매제방의 밤
또 하나의 우포 명물인 왕버들을 다섯 문장으로 추천한다.
네 늪 중에서 목포(木浦)를 향해 달린다. 인근 장재마을, 노동마을, 토평마을 일대에 많았던 소나무 덕에 붙은 이름이다. 장재마을 입구로 향하는 삼거리에 비경이 있다. 대여섯 그루의 왕버들이 밑동의 반은 늪 아래로, 나머지 반은 물 위로 드러낸 채 그 자체로 한 폭의 동양화를 완성한다. 여름에 불어난 물이 덜 빠져나갔을 때만 가능한 장관이니, 이 역시 지금 우포를 찾아야 할 이유다.
우포의 사계(四季)를 역시 네 문장으로 정리한다.
가을에만 늪을 찾으라고 추천하는 건, 철마다 다른 얼굴을 지닌 우포에 대한 모욕. 당연히 사계가 지닌 아름다움이 있다. 버드나무가 초록 생명을 움틔우고 자줏빛 자운영이 축제를 벌이는 봄, 빈틈이라고는 찾을 수 없을 만큼 완벽한 초록이 지배하는 여름, 그리고 수만 마리 철새가 하늘을 뒤덮을 겨울 초입까지. 하지만 나에게는 조금 수줍은 풍경의 가을 우포가 가장 사랑스럽다.
우포의 희망을 세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지금 우포가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건 따오기의 복원이다. 우리나라에서 1979년 이후 멸종된 천연기념물 198호다. 2008년 중국이 선물해 번식센터장으로 온 따오기 한 쌍은 지금 7마리로 불었다.
최악으로 우포를 즐기는 방법을 두 문장으로 정리해보면 이렇다.
전망대로 달려갈 것. 단, 우포에서 보낼 수 있는 시간이 30분밖에 없는 경우.
한 문장으로 정리해보면 이렇다.
자동차나 자전거보다는 되도록 걸어서 우포의 물과 땅과 1500종 생명을 만날 것.
한 단어로 우포를 표현하면 이렇다. 고맙다. 자연에게나, 인간에게나, 우리 모두를 위해서나.
1박2일 찜질한 붕어조림 몸보신에 "딱!"
묵을 곳과 먹을 곳
나루터와 주매제방이 걸어서 5분 거리인 소목마을에는 민박집이자 식당이 단 하나 있다. 우포늪민박나라(055-532-6202). 우포에서 60년을 터 닦고 살아온 노기열(68)씨와 그 아내 윤갑이(66)씨 집이다.
민박은 1박 3만원. 4명까지 이 가격에 잘 수 있다. 방은 4개. 식사 요금은 별도. 마을에서 욕쟁이 할아버지로 알려진 노기열씨는 "할머니 무릎 아플까 봐 단체손님은 안 받는다"고 했다.
좀 더 현대식 숙박시설을 찾는다면 차로 15분 거리인 창녕읍내로 나와야 한다. 온천장이 있는 부곡하와이(055-536-6331)는 약 30분 거리. 창녕군 홈페이지(www.cng.go.kr/main)에서 숙박업소 전화번호를 안내한다.
우포늪민박나라의 추천 요리는 붕어조림이다. 굵은 뼈를 발라내려는데 할머니가 한 마디 툭 던진다. "웬만하면 그냥 먹어도 될낀데예" 아닌게아니라 살짝 이를 대자 부드럽게 바스러진다. 이 집의 붕어조림은 마당에 있는 아궁이 가마솥에서 1박2일을 견디고 나온, 거의 '보약' 수준이다.
할머니가 설명한 요리 방법은 이렇다. 가마솥 바닥에 통 크게 자른 무를 한 줄 깔고 그 위에 지느러미 하나 건드리지 않은 붕어 예닐곱 마리를 덮는다. 여기에 시래기 한 채를 위에 올리고 양념장을 바른다. 대략 뚜껑을 덮는 높이에 이를 때까지 이 작업의 무한 반복. 해뜨기 전에 시작한 불때기는 해가 질 때까지 계속된다. 밤이 깊어 불이 사그라지면 다음날 아침까지 그대로 둔다. 이후 냄비에 넣어 냉동보관한 뒤, 손님 주문에 맞춰 데워 낸다. 대 3만원, 소 2만원. 비슷한 시간을 곤 붕어·가물치 곰탕도 있다. 한 그릇 6000원. 공깃밥 별도 1000원. 비리지 않다.
■ 가는 길(서울 기준) 서울에서 우포늪으로 가려면 대구와 마산을 잇는 중부내륙고속도로를 이용해 창녕IC로 나간다. 이후 교차로에서 우회전 후 이정표를 따라 대략 10분(5.8㎞) 거리다. 고속버스는 창녕시외버스터미널 하차.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1일 5회 4시간 20분.
■ 감상 지점 밤의 주매제방에서 반딧불이를 만날 것
. 지금은 보물찾기 수준이지만 추석 즈음이면 이 풀별들이 아예 춤판을 벌일 것이다. 이마배를 볼 수 있는 소목마을 나루터는 마을 주차장에서 걸어서 5분 거리. 어부들의 출항을 보려면 새벽 5시에는 나와 있어야 한다.
우포늪생태관 아는 만큼 보이는 법. 우포에 도착하면 우선 생태관(055-530-1552)에서 최소 30분을 보내자. 노용호 관장은 "우포늪사이버생태공원(www.upo.or.kr/main)을 먼저 인터넷에서 둘러보고 온다면 100배 더 즐길 수 있다"고 했다. 입장료 1000원.
보너스 마을 주민들이 운영하는 자전거 대여소(055-530-1552)도 있다. 2시간 3000원. 해설사 도움도 받을 수는 있지만 인력난으로 단체만 가능한 상황이다. 해설사 예약은 창녕군 생태관광과(055-530-1559), 환경부 산하 우포생태학습원(055-532-9892), 푸른우포사람들(055-532-8989). 하나 더. 쌍안경을 꼭 가져갈 것.
<출처> 2010. 9. 16 / 조선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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