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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광주. 전남

전남 광양의 황홀한 봄마중, 초록·빨강·노랑 다랑밭

by 혜강(惠江) 2010. 2. 28.

 

 

전남 광양

 

초록·빨강·노랑 다랑밭… 황홀한 봄마중

 

 

박경일기자

 

 

 

▲ 중흥사로 오르는 길에서 내려다본 전남 광양시 옥룡면 운평리의 다랑밭. 광양은 겨울에도 따스한 기후 때문에 묘목 농사가 흔하다. 다랑밭에 보리와 함께 심어진 동백나무, 철쭉, 광나무, 치자나무 묘목들이 조형적으로 어우러져 마치 꽃밭을 방불케한다.

 

 

 전남 광양의 섬진강변 매화마을에 아직 매화의 꽃소식은 당도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매화가지에는 탱탱하게 물이 올랐고, 가지마다 작은 꽃눈이 다닥다닥 달렸습니다. 섬진강변 풀숲의 버들강아지 어린 잎자루에도 솜털이 보송보송합니다. 요즘처럼 따스한 날들이라면 아마 며칠 뒤에는 매화가 폭죽처럼 터지면서 봄의 꽃잔치가 시작되겠지요.

 매화가 채 꽃망울을 터뜨리기 전에 광양을 찾아간 것은 ‘광양의 봄’을 그저 매화로만 기억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었습니다. 섬진강변의 광양 땅은 매화가 ‘너무도’ 유명합니다. 그래서 광양을 찾은 이들은 대개 섬진강변의 다압마을에서 흐드러진 매화만 둘러보고 돌아가곤 하지요. 하지만 봄날의 광양 땅에는 매화만 있는 것이 아니랍니다.

  매화를 빼놓고 광양에서 가장 매혹적인 목적지로 꼽을 만한 곳이 도선국사가 창건했다는 절집터인 옥룡사지 동백 숲입니다. 광양 사람들이 너나없이 ‘징허게(아주) 좋다’고 손꼽는 곳입니다. 도선국사가 옛 절집 주위에 심어 대를 잇는 동백나무가 7000여그루나 됩니다. 이즈음 이곳에는 동백나무 시이로 산책을 할 수 있도록 데크공사가 한창입니다. 동백이 만개할 무렵이면 단장을 끝낸 나무데크 위에는 후드득 붉은 동백꽃이 떨어져 깔리겠지요. 유독 매서웠던 올해 겨울의 한파 때문일까요. 아직 꽃눈을 닫고 있는 이곳의 동백들은 섬진강변 매화의 개화에 맞춰 함께 활활 불붙으려나 봅니다.

  백운산 자락의 절집 중흥사로 오르는 길에서 예기치 않게 건너편 구릉 아래로 펼쳐진 운평리의 다랑밭과 마주쳤습니다. 보리밭과 함께 남천, 소나무, 동백나무, 광나무, 치자나무가 줄지어 심어진 다랑밭은 초록과 빨강, 노랑의 이파리들이 햇볕에 황홀하게 빛나 마치 꽃밭을 방불케했습니다. 그 길을 넘어가서 마주한 고즈넉한 중흥사의 기왓담도, 절집 위쪽의 작은 저수지 중흥제의 초록 물빛도 온통 봄빛으로 가득차 출렁거리고 있었습니다. 중흥제의 고요한 물가의 푸릇푸릇한 풀밭에 앉아 잔잔한 수면 위로 드리운 소나무 그늘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봄의 향기에 온몸을 흠뻑 적실 수 있을 듯했습니다. 그러다 혹여 지루해진다면 절집 위쪽의 저수지를 지나 이어지는, 짧지만 웅장한 편백나무 숲길로 들어서 가볍게 산책이라도 한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요.

  통곡리 동동마을 앞 옥룡천변 바위에 우뚝 솟은 학사대도 놓치고 돌아온다면 아쉬울 곳입니다. 옥룡천 건너편에서 올려다보는 푸른 소나무 곁 정각의 모습도 빼어나고, 정각에서 내려다보는 옥룡천의 물빛도 봄의 기운으로 가득했습니다. 제철소가 들어서면서 광양의 바다는 매력을 잃었지만, 배알도가 바라다보이는 망덕포구 쪽에는 윤동주 시인의 유고를 보관했던 집과 바다와 딱 붙여 새로 세워진 윤동주 시비도 있답니다.

  혹여 올봄에 섬진강변으로 매화꽃을 보러 가시겠다면, 이런 곳들을 두루 들러보셨으면 합니다. 비록 흐드러진 매화만큼 화려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행락객들의 차량들로 꽉 막힌 소란스러움보다 어쩌면 이런 소박하고 고즈넉한 정취가 봄날과 더 잘 어울리지 않겠습니까.

 

 

▲ 중흥사 위쪽의 자그마한 저수지 중흥제. 주위를 둘러친 상록활엽수와 소나무의 초록빛이 드리워져 물빛이 더할 나위없이 곱다. 저수지 주변은 봄의 기운으로 가득하다. 이 저수지를 끼고 위쪽으로는 짧은 편백나무 숲길이 있고, 제방 아래에는 중흥사가 있다

 

 

열릴듯 말듯… 애간장 태우는 시간도 행복하여라

 

# 올해는 광양에 매화와 동백이 함께 온다

 

  외지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지만, 광양 사람들이 첫손으로 꼽는 제 땅의 명소가 바로 백운산의 지맥인 백계산 자락의 옥룡사지다. 신라 말 풍수지리 대가로 일컬어지는 도선국사가 35년 동안 머물다 입적했다는 절집 옥룡사는 터만 남기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말았지만, 도선국사가 절집을 지으면서 땅의 기운을 보강하기 위해 심었다는 동백나무는 1000년의 시간 동안 대를 이어가며 뿌리를 내리고 서있다.

  주춧돌이 흩어진 옛 절집으로 향하자면 울창한 동백나무 숲을 관통해야 한다. 숲은 뒤틀린 동백나무 둥치와 무성한 잎으로 어둑하다. 풍수를 읽어냈다는 도선국사가 땅의 기운을 보(補)하려고 심은 것이라니 동백나무 숲에서는 왠지 상서로운 기운이 느껴진다. 예년보다 매서웠던 지난 겨울의 추위 탓인지, 올해는 이곳의 동백꽃 소식이 유독 늦다. 꽃망울은 맺혔으되 붉은 기운은 단단하게 닫혀있다. 간혹 하나 둘 성급하게 꽃을 틔운 것도 있었지만, 그것들도 붉은 기운이 그다지 선명하지 않다.

  동백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그렇겠지만, 이곳 옥룡사지가 가장 화려한 아름다움으로 빛나는 때는 봄의 한가운데 꽃이 떨어질 무렵이다. 그때쯤이면 동백의 꽃모가지가 툭툭 떨어져 길을 흥건하게 붉은빛으로 적신다. 화려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처연하기도 한 그 모습이 가히 동백숲의 백미의 풍경이라 할 수 있겠다. 이즈음 옥룡사지에서는 울창한 동백숲 사이로 관람데크를 놓는 공사가 한창이다. 공사는 이달 말쯤이면 마무리된다.

  아마도 올봄의 옥룡사지 동백소식은 섬진강변 매화와 함께 당도할 모양이다. 매화가 한창일 즈음에 이곳의 동백도 절정의 풍경으로 들어설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올봄에 봄꽃 소식을 좇아 광양을 찾게 된다면, 고결한 순백의 매화에다 비장한 선홍색 동백꽃의 맛까지 함께 느낄 수 있겠다. 말 그대로 ‘금상첨화’다.

 


# 중흥사 그리고 고운 물빛과 짧은 편벽나무 숲길



  옥룡면에는 아담한 절집 중흥사가 있다. 건물은 근래들어 새로 지은 것이라 옛맛은 전혀 느낄 수 없지만, 절집의 내력은 깊다. 거슬러 올라가자면 통일신라 때까지 짚을 수 있다. 1000여년의 내력을 지닌 절집 마당의 고색창연한 삼층석탑이 그 시간을 증거한다. 그 오랜 시간에도 석탑의 몸돌에 돋을새김된 사천왕상이 또렷하다. 석탑 곁에는 쌍사자가 받치고 선 석등이 서있다. 말끔한 화강석 몸돌과 경박한 자세가 한눈에 봐도 요즘 만든 모조품이다.

  애초에 이곳에 국보로 지정된 쌍사자 석등이 있었는데 지금은 국립광주박물관으로 옮겨져 있다. 석등이 본래의 자리를 잃고 이리저리 떠돌던 내력이 기구하다.

  석등은 일제강점기 대구 사는 일본인 부자가 집 정원에 두려고 면사무소 앞까지 가져다놨는데, 관청에서 이를 제지하고 도지사 관사로 옮겼다가 1937년쯤 서울로 가져갔다. 이어 이승만 정권 시절에는 경무대 안으로 가져갔다가 1960년에는 덕수궁으로, 1972년에는 다시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전했다. 그러다가 1990년 8월 국립광주박물관까지 가게 됐다. 사자가 등을 이고 선 모습을 자세히 들여다보자면 감탄을 금할 길 없다는데, 석등은 이즈음 박물관이 공사중인 관계로 박물관 수장고에 분리 보관중이어서 오는 9월 이후에나 볼 수 있단다.

  사실 중흥사에서는 절집보다 절집 위쪽의 자그마한 저수지 중흥제와 그 저수지를 끼고 있는 편백나무 숲이 더 매혹적이다. 저수지의 크기는 자그마하지만 워낙 물빛이 고운데다, 물가에 둘러선 나무들이 고요하게 수면 위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모습이 더할 수 없이 낭만적이다. 절집이 제방 아래 자리잡고 있어 물빛 너머로 중흥사 팔작지붕의 기와가 걸쳐진다. 저수지를 끼고 중흥산성 옛터가 있는데, 그 너머로 이어진 편백나무 숲길이 제법 운치있다. 하늘을 찌를 듯 선 편백나무 숲은 좋긴 하되 너무 짧아 아쉬운 길이다.

 


# 500리 섬진강이 바다로 흘러드는 광양만. 그곳에서 만나는 시인 윤동주



  광양을 섬진강으로만 기억하는 이들에게는 새삼스럽겠지만, 광양은 넓은 만을 이루며 바다를 끼고 있다. 제철소가 들어서면서 잊어지고 말았지만, 한때 광양만은 전국 최대의 김 생산지로 이름을 날렸다. 광양만은 조선시대 김양식이 처음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묘비 비문을 통해 조선 인조 때 김여익이라는 사람이 당시에는 섬이었던 태인동 일대에서 김 양식을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산죽과 밤나무가지로 김 양식을 창안했다는데, ‘김’이라는 명칭도 김여익의 성에서 따왔다고 알려져 있다.

  이제 더이상 광양만에서 김을 찾아볼 수는 없지만 대신 섬진강 500리 물길이 끝나는 강 하구 태인대교와 망덕포구 일대에서는 이른바 ‘벚굴’이라 불리는 강굴이 나온다. 굴껍데기가 어찌나 큰지 손바닥이 다 가릴 정도다. 큰 것은 웬만한 어른 신발보다 더 크다. 강굴은 봄이 제철. 이제 막 강굴잡이가 시작됐다. 다이버가 잠수해서 따낸 강굴을 까서 입에 넣으니 바다의 싱그러운 냄새와 봄의 향기가 입안에 가득하다.

  광양에서 바다의 정취를 만나려면 진월면 망덕리 망덕포구 쪽으로 향해야 한다. 망덕(望德). 덕유산이 보인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망덕포구 앞에는 소나무가 우거진 배알도가 있다. 섬이 망덕산을 향해 절하는 형상이어서 ‘배알(拜謁)’이라고 불린다. 가을철 전어로 유명세를 누리고 있는 망덕포구를 찾아가면 예기치 않게 ‘시인 윤동주’를 만나게 된다.

  일제강점기이던 1941년 윤동주는 시집을 발간하려 했으나 일제 탄압으로 여의치 않게 되자, 자필원고를 절친한 후배 정병욱에게 맡기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알본 유학중 시인은 항일운동 혐의로 일본 경찰에 검거돼 1945년 2월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그러나 시인의 유고는 마룻장을 뜯어내고 보관했던 후배에 의해 1948년 간행됐다. 이로써 ‘서시’ ‘별헤는 밤’ 등의 시가 담긴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빛을 보게 됐다. 포구에는 훗날 서울대 국문과 교수가 된 고 정병욱씨가 시인의 육필원고를 숨겨두었던 가옥이 남아있다. 포구 한쪽에는 윤동주 시인의 시비도 서있다.

 

 

“내 목숨 살리려 60년 써온 일기… 사는 모양새도 바꿔놓더라고∼”

 

■ 광양시 율천리 장한종

 

  “본정리의 최강 계장이 순천에 갔다. ‘이수암’(술집 이름)에서 한잔 묵고(먹고) 11시30분 택시편으로 광양읍에서 집까지 왔다. 차임(택시요금)은 40환이었다. 1959년 1월16일.” “몹씨(몹시) 무더운 날이다. 곧 소나기가 올 것같다. 콩밭 일하다 땀이 흘렀다. 오후 볏(볕)으로 보리를 말렸다. 1979년 7월25일.”

  전남 광양시 옥룡면 율천리의 장한종(89·오른쪽 사진)씨는 맨눈으로 단기 4294년 서울 이우사에서 발행한 손바닥보다 작은 일기수첩에 펜으로 잉크를 찍어 쓴 깨알같은 글씨를 잘도 읽어내려갔다. 52년 전의 기록을 담은 수첩은 어찌나 잘 보관됐는지 마치 어제 산 것처럼 깨끗했다.

  장씨는 6·25전쟁 중이던 1950년부터 시작해 지금껏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일기를 써왔다. 마을 뒤 백운산 자락에 은거하던 빨치산 잔당들이 집을 뒤져 1958년까지 쓴 일기를 모두 가져가 1959년부터 보관된 일기수첩은 매년 1권씩 모두 52권에 달한다. 장씨의 일기에는 근현대의 역사가 모두 담겨있다. 지난 50여년간의 날씨며 물가는 물론이고,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마을 주민들의 대소사까지 일기 속에 빼곡히 적혀있다. 과거사를 놓고 시비라도 붙을라치면 마을 주민들이 가장 먼저 장씨를 찾아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내 앞에서는 거짓말을 못하네. 하루의 일들을 하나 하나 다 적어두고 있거든. 마을 주민들이 옛일을 놓고 시비가 붙으면 내 일기가 재판관이 되기도 하지.”

  그렇다면 그는 왜 일기를 처음 쓰기 시작했을까. 이야기는 6·25전쟁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6·25전쟁이 한창 불붙던 그해 가을 무렵 면서기 일을 하던 장씨는 동갑내기 친척과 함께 출근을 하다가 경찰의 검문을 받았다. 그는 곧 풀려났지만, 해방직후부터 이른바 ‘소작폐지’ 운동을 했던 친척은 경찰에 붙들려갔고, 이틀 만에 주검으로 발견됐다.

  “그런 세상을 살았다네. 살려면 알리바이를 만들어야 했고, 그러자면 일기를 쓰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지. 누군가에 붙잡혀 ‘며칟날 누구를 만나서 무슨 얘기했느냐’고 치도곤을 당할 때 내보이려고 시간대별로 한 일을 적었던 게 일기가 됐던 거지.”

  이제는 ‘알리바이’가 필요없는 세상이 됐지만, 그는 아직도 땅을 갈아먹는 ‘농부’로 하루하루를 기록하고 있다. 장씨는 요즘 젊은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그는 “앞만 보고 살지 말고 지난날들을 기록하고 되돌아봤으면 한다”며 “하루를 기록하다 보면 사는 모양새도 달라질 것”이라고 했다. 그의 말대로 자신의 생활을 촘촘히 기록한다면 어쩌면 좀 더 ‘착한 삶’이 가능할 것도 같았다. 늦은 밤, ‘건강하시라’는 인사를 건네고 막 돌아서려는데, 장씨는 주섬주섬 꺼내든 일기수첩에 기자와의 만남을 적기 시작했다.

 

 

 

 

 


가는 길



  수도권에서 가자면 여러 경로 중의 하나를 택할 수 있다. 대전-통영선을 타고 진주갈림목에서 남해고속도로로 갈아탄 후 광양나들목으로 나가도 되고, 호남고속도로 고창갈림목에서 고창-담양간 고속도로로 갈아탄 후 다시 호남고속도로에 올라 순천을 지나 광양까지 가도 된다. 광양의 매화마을에서 매화를 보겠다면 행락객들이 붐비는 시간을 피해 섬진강변의 매화마을을 들르는 것으로 일정을 짜는 것이 좋겠다. 매화가 필 무렵이면 일대의 도로가 주차장을 방불케 한다. 오전에 서울을 출발한다면 첫날은 옥룡사지 일대를 돌아보고, 이튿날 오전 일찍 매화마을로 향하는 편이 낫다.

 


묵을 곳 & 먹을 것



  광양에서 가장 깨끗한 숙소는 호텔 필레모(061-761-8700). 호텔 예약 인터넷사이트 등을 이용하면 아침식사를 제외하고 12만∼13만원에 묵을 수 있다. 광양읍의 그랜드모텔(061-761-3600)과 새천년모텔(061-762-8345) 등도 시설이 깔끔하다. 중마동과 광영동 일대에도 로비스힐(061-793-9932) 등의 모텔들이 즐비하다.

  광양의 먹을거리라면 단연 광양불고기. 유배된 선비들이 백운산의 숯막에서 숯을 가져다가 구워먹었던 것이 유래가 됐다고 전한다. 보통 불고기와는 달리 국물없이 양념을 바른 쇠고기를 석쇠에 구워먹는다. 광양불고기 맛은 고기 질보다는 감칠맛 나는 양념과 숯맛이다. 가격은 식당마다 별 차이가 없다. 1인분에 1만3000원짜리는 호주산을 쓰고, 1만7000원짜리는 한우다. 매실한우(061-762-9178), 금목서(061-761-3300), 대중식당(061-762-5670), 삼대광양불고기집(061-762-9250) 등이 있다.

 

 

 

<출처> 2010. 2. 24 /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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