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평 돌머리 해안의 낙조 황홀경
어둠아 어둠아∼ 걸음을 멈춰다오!
박경일 기자
▲ 함평 돌머리 해안의 낙조풍경. 바위 끝에 세워진 초가 정자가 이국적인 풍광을 만들어낸다. 두꺼운 구름으로 뒤덮인 날이었지만 해질 무렵 띠처럼 길게 열린 하늘이 노을로 물들었다.
벌써 한 해가 저물어 갑니다. 그래서일까요. 이즈음에는 서해안의 낙조가 유난히 장엄합니다. 해는 매양 핏빛 노을을 만들며 서쪽 바다로 지는 것이지만, 한 해를 마무리하는 이 무렵의 낙조가 유독 아름다운 것은 저물어가는 것의 아쉬움이 더 깊기 때문이겠지요.
함평(咸平). 두루(咸) 화평한(平) 땅. 며칠 남지 않은 한 해를 보내는 낙조를 만나러 간 곳이 함평의 돌머리 해안이었습니다. 두꺼운 구름이 몰고온 차가운 겨울비가 막 그친 뒤여서 새빨간 햇덩이를 보지는 못했지만, 서쪽으로 길게 열린 하늘이 붉은 기운으로 물드는 장면은 그야말로 황홀했습니다.
함평의 진면목에 대해 말하자면, 우선‘기산영수(箕山潁水)’를 말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중국 요임금이 은둔하던 선비 허유에게 자신의 뒤를 이어 천하를 맡아달라는 부탁을 하자, 허유는 정중이 거절하고 기산아래 강물에 귀를 씻었답니다. 그때 소를 끌고 나온 촌부가 허유에게 귀를 씻은 연유를 묻고는 “그 귀를 씻은 물이라면 소조차 먹일 수 없다”며 위쪽 상류로 가더라네요. 허유가 살았다던 골짜기 이름인 ‘기산영수’는 그대로 고사(古事)가 돼 세속의 명리를 멀리하는 대쪽같은 은자의 덕에 대한 최고의 상징으로 읽힙니다.
세조의 왕위찬탈에 벼슬을 내던지고 함평에 은거한 선비 이안은 스스로 허유를 자처하며 정자에 영파정(潁波亭)이란 현판을 올렸습니다. 이때부터 함평읍의 뒷산은 ‘기산’으로, 함평천은 ‘영수’로 불렸습니다. 함평이 곧 절개와 은자의 덕을 뜻하는 ‘기산영수의 땅’이 된 것이지요.
함평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곳이라면 한옥과 돌담의 옛 정취와 근대의 추억, 그리고 거기에 깃든 이야기들이 넘쳐나는 모평마을입니다. 모평마을에는 1000년이 넘도록 맑은 물이 솟는 안샘이 있고, 메주며 시래기를 매달아 놓은 고택들이 들어서 있습니다. 마을 뒤 언덕에는 대숲과 편백숲이 울창하고 야생 차나무들이 초록으로 빛납니다. 고택과 정자의 현판에서도 어김없이 ‘기산영수’의 ‘영수(潁水)’를 뜻하는 강이름 영(潁)자가 보입니다. ‘영귀정(潁歸亭)’이란 고택 사랑채가 그렇고, ‘영양재(潁陽齊)’란 정자가 그랬습니다.
함평을 찾은 날은 마침 장날이었습니다. 차가운 초승달이 하늘에 걸린 이른 새벽. 천변의 우시장에는 흰 입김을 쉭쉭 뿜어내는 한우들의 길고 또 깊은 소 울음소리와 떠들썩한 흥정소리가 새벽을 깨웠습니다. 우시장이 파할 무렵 손마디 굵은 장터사람과 함께 어깨를 맞대고 앉아 김이 펄펄 나는 뜨끈한 국밥을 앞에 뒀습니다. 국밥 한 그릇에 새삼 불끈 희망이 솟았습니다.
정겹다, 새벽 우시장의 ‘옥신각신’ 흥정소리
모평마을 지나 우시장까지… 함평 둘러보기
▲ 오전 5시쯤 함평우시장에 삼삼오오 모여들어 장이 열리길 기다리는 사람들. 중개인과 농민들이 흰 입김을 뿜으며 우시장에 나온 송아지들을 둘러보고 있다. 함평 우시장에서는 하루 120여마리의 소들이 사고 팔린다.
▲ 대나무숲과 높은 돌담을 둘러치고 있는 모평마을의 안샘. 1000년 전처럼 지금도 차고 맑은 물이 솟아난다.
# 함평 돌머리 해안의 붉은 낙조
함평의 바다는 사실 이웃 영광이나 무안에 비해 보잘 것 없다. 해안도로의 낭만은 북쪽 영광에 비할 바가 아니고, 너른 개펄도 무안에다 대면 명함을 내밀기 어렵다. 그렇지만 함평읍 석성리 석두마을 돌머리해안의 황홀한 낙조풍경만큼은 다른 데 비할 바가 아니다.
함평읍내에서 돌머리로 가는 길은 쇠락하고 저물어가는 것들을 보여준다. 한때 일대의 고깃배들이 몰려들어 억센 팔뚝의 어부들을 상대하던 술집들이 어찌나 많았던지 ‘술 주(酒)’자에 ‘항아리 항(缸)’자를 쓴다는 주항포에서부터 함평의 바다는 시작된다. 몇몇 낡은 횟집들만이 덩그러니 남아서 옛 영화를 그리워하고 있는 주항포를 지나면 곧 돌머리다. 한때 이곳도 석두포가 있던 포구였지만, 모래가 밀려들어와 포구의 구실을 못한 지 이미 수십년이 됐다.
하필 이름이 ‘돌머리’일까. 그건 바로 이쪽 바다에 기암괴석들이 늘어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여년 전쯤 해안에 굴 양식장을 조성하면서 기암괴석을 다 폭파해버려 운치를 잃고 말았다. 기암괴석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돌머리 해안은 해수욕장으로 조성됐다. 썰물이면 바다가 멀리 밀려가고 너른 개펄이 드러나는 곳이라 밀물 때 들어온 물을 가둬 마치 해수풀장처럼 조성해 해수욕장으로 이용한다. 해는 그 너머로 진다. 돌머리 해안을 붉게 물들이면서 떨어지는 낙조는 초가지붕을 이고 있는 몇개의 종자가 가둬진 맑은 물빛과 붉은 기운과 함께 어우러지면서 가장 아름다운 경관을 빚어낸다.
해가 질 무렵이면 돌머리 해안에는 외지인들은 물론이고 인근의 주민들까지 돌머리 해안을 장엄하게 물드는 낙조를 보러 온다. 겨울철이라 해가 남쪽으로 빗겨 새빨갛게 달구며 떨어지는 해를 정면에서 마주하지 못하지만, 하늘이 붉은 빛으로 차츰 물들어가는 장면만으로도 충분히 황홀하다.
# 모평마을로 드는 길에서 만난 풍경
돌머리 해안에서 낙조를 마주할 요량이라면 거처는 모평마을에 정하는 것이 마땅하겠다. 모평마을은 늙은 고객과 돌담과 정자들이 늘어선 옛 마을이다. 한때 함평 모씨의 세거지였다던 모평마을은 조선 세조때 윤길이 무오사화에 연루돼 제주도로 귀양갔다 돌아오다 이곳에 마음을 뺏겨 정착하면서 파평 윤씨의 집성촌이 됐다. 일찌감치 바깥 세상의 속도에서 벗어난 모평마을에는 아직도 집성촌의 전통이 이어져 마을주민의 95%가 파평 윤씨들이다.
모평마을에 들어서면 해보천을 따라 늘어선 느티나무 팽나무, 왕버들나무 30여그루로 이뤄진 마을 숲이 먼저 마중을 나온다. 족히 300년이 넘었음직한 거목들이 잎을 다 떨구고 활개를 치듯 서있다. 모평마을을 찾은 때가 마침 밤이라면 더 좋겠다. 838번 지방도로에서 모평마을까지 저수지를 끼고 이어진 4KM 남짓의 길에는 마을은 물론이고 작은 전등불 하나 없다. 어둠만이 고여 출렁거릴 뿐이다. 도회지에서는 물론이고 웬만한 시골에서도 이런 깊은 어둠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그 길에서 차를 멈추고 내려서서 별만 초롱초롱 떠있는 진짜 한밤중을 꼭 만나보시길….
모평마을에는 시간의 흔적과 이야기들이 묻어있는 풍경들로 가득하다. 먼저 울창한 대숲과 높은 돌담을 둘러치고 있는 안샘. 1000년의 시간에도 마르지 않고 여전히 맑고 찬 물이 찰랑거린다. 그 오랜 세월동안 마을 주민들은 이 물을 길어다가 밥을 지었을 것이고, 촌로들은 장독대 위에 정한수를 떠놓고 손을 모아 고향을 떠난 자식의 평안을 기원했을 터다.
# 1000년 샘…되살아나는 옛 마을
마을 어귀 언덕의 중턱쯤에 올라서 들녘과 나무와 하늘을 품고 있는 영양재의 풍모도 빼어나다. 기둥마다 내걸린 편액에는 ‘예가 아닌 것을 보지도, 듣지도, 말하기도 행하지 말라는 금언이 돋을새김돼 있다. 보는 이의 시선을 따라 왼쪽에서도 오른쪽에서도 글씨가 읽히도록 걸어놓은 편액이 독특하다. 영양재 아래는 몇개의 비석이 서있는데, 그중 유독 눈길을 끄는 것이 충노(忠奴) 도생과 충비(忠婢) 사월비석이다. 도생과 사월이란 이름의 두 노비는 정유재란때 왜병에 살해당한 윤해와 부인 신천 강씨의 아들을 충심으로 길러내 과거에 급제시켰다고 전한다.
모평마을에는 고택만 일곱채. 여기다가 마을 곳곳에 한옥들이 새로 들어서고 있다. 고향을 떠난 이들이 하나 둘 되돌아오면서 한때 쇠락했던 마을은 성성하게 살아나고 있다. 안샘을 끼고 있는 ‘모평헌’도 윤여운·이수옥씨 내외가 도회지 생활을 마무리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낡은 한옥을 새로 손보고 별채에 한옥 민박을 들였다. 대나무 숲과 차밭을 끼고 있는 한옥에서는 그윽한 정취가 물씬 느껴진다.
모평마을 뒤편의 언덕에는 빼어난 산책로도 있다. 영양재 옆으로 난 산길을 숨이 차지 않을 만큼만 오르면 소나무, 편백나무, 삼나무, 대나무, 차나무들이 교대로 우거진 평탄한 황토흙 숲길이 이어진다. 숲을 이룬 수목들은 늘푸른 나무들인 데다 훤칠하게 자라는 것들이어서 겨울철에도 초록의 기운으로 가득하다. 마을 뒤편에 난 길이라 믿어지지 않을 만큼 숲은 깊다.
메주가 익어가고, 무청시래기가 잘 말라가고 있는 옛 마을 한옥집의 뜨끈한 아랫목에서 보내는 하룻밤은 더할 나위 없다. 소담하고 정갈한 옛 한옥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맛은 안동일대의 솟을 삼문의 으리으리한 종갓집이나 대갓집의 한옥민박에서와는 또 다르다. 이른 아침 마을어귀의 돌담길을 하릴없이 느긋하게 산책하다가 대숲 아래 안샘에서 졸졸 물소리를 내며 흐르는 맑디 맑은 샘물을 떠서 한모금 마시는 운치를 어디에다 비할까.
# 함평 우시장에서 솟는 희망
함평을 찾는다면 되도록 2, 7일에 서는 함평 장날을 맞추는 것이 좋겠다. 함평장은 수년전 새로 단장됐으나 드물게도 옛 장터의 정취를 흩뜨리지 않았다. 곡성이며 남도의 대부분의 장이 멋대가리 없는 시멘트건물로 들어가버린 지 이미 오래지만, 함평장은 여전히 기와지붕을 얹은 난전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농기구를 파는 대장간에는 활활 타오르는 화구와 풀무가 있고, 팥죽이며 국밥을 파는 음식점은 자그마한 한옥에 들어서 있다. 시장의 규모도 여간 큰 것이 아니어서 갖가지 채소들과 홍어와 조기 같은 생선은 물론이거니와 곰삭은 젓갈까지 없는 것이 없다.
그중 최고의 볼거리라면 함평 장날에 함께 서는 함평 우시장이다. 우시장에서 보아야 할 것은 우시장을 휘감는 드센 기운이다. 우시장에서는 툭툭 불거지는 근육과 힘줄처럼 힘찬 기운이 느껴진다. 장터의 함평천 건너 천변의 우시장은 겨울철에는 오전 6시에 문을 연다. 소를 몰고 나온 농민들과 중개인들은 오전 5시도 되기 전에 삼삼오오 우시장에 모여 장작불을 쬐고 있다. 장날 이곳 우시장에서 거래되는 소들은 대략 120마리. 이즈음 한우의 시세가 좋아 우시장의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송아지들이 먼저 쪽문을 통해 우시장으로 들어온 뒤, 오전 6시에 대문을 열어젖히자 일제히 소들이 우두두두 쏟아져 들어온다. 차가운 날씨에 소들이 흰 입김을 연방 뿜어낸다. 낮고 긴 소울음소리가 우시장을 가득 채웠다. 북적북적 곳곳에서 소의 이빨을 열어보기도 하고, 트집과 실랑이가 벌어진다.
이즈음이야 오전 나절에 반짝 거래가 이뤄지지만, 우시장이 번성했던 시절에는 하루종일 소울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고 했다. 간혹 흥정이 결렬되면 육두문자가 오가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주먹다짐까지 벌어졌다고 했다. 지금이야 그런 일은 없지만, 시장은 흥정에 나선 이들의 고함에 한껏 달아오른다. 아침 햇살이 퍼질 무렵이면 하나둘 거래가 끝나고 소를 차로 실어보낸 우시장 사람들은 국밥집으로 향한다. 그들과 어깨를 맞대고 김이 펄펄 나는 국밥을 앞에 놓는다면, 한해 끝머리의 아쉬움보다는 희망의 새해를 살아갈 기운으로 가득 채워지겠다.
질 좋은 함평한우 1인분 2만원… 육회·홍어비빔밥도 별미
#함평 모평마을 가는 길=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영광나들목으로 나온다. 영광에서 23번 국도를 따라 좌회전해서 해보 방면으로 향한다. 영광읍내 한전교차로에서 좌회전해 808번 지방도로를 타고가다 종산교차로에서 좌회전해 22번 국도로 올라선다. 이 길을 따라가면 해보교차로에 가 닿는데 이곳에서 함평·해보 방면으로 우측으로 빠져나가면 곧 산내마을에 닿는다. 산내마을을 지나 모평마을까지는 4km 남짓이다. 돌머리 해수욕장은 모평마을에서 23번 국도로 서해안고속도로 함평나들목으로 방면으로 향하다 금산교차로에서 손불 방면으로 우회전한 뒤 목교삼거리에서 좌회전, 신흥삼거리까지 가면 이정표를 만날 수 있다.
#어디서 묵고 무엇을 맛볼까=함평읍내에는 모평마을이 단연 최고의 숙소다. 모평헌(010-5034-6078)을 비롯해 황토영화민박(061-323-0300) 한림민박(016-9252-0219) 등 한옥민박들이 있다. 모평마을 사무장(010-4704-0977)에게 연락하면 민박을 연결해 준다. 함평에는 한우와 뻘낙지 등 먹을거리들이 많다. 돌머리해수욕장 쪽으로 향한다면 주항포의 주포횟집(061-322-9331)을 들러볼 만하다. 모평마을의 대흥식당(061-322-3953)에서는 질 좋은 함평한우를 1인분에 2만원으로 저렴하게 맛볼 수 있다. 갓 잡은 싱싱한 한우를 사용한 육회도 별미다. 이밖에 함평읍내 주변에 육회비빔밥, 홍어비빔밥 등을 하는 식당들이 즐비하다.
<출처> 2009-12-16 /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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