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의 이른 봄
'매화야, 마음이 급했나 보구나…'
박경일 기자
▲ 경남 거제시 일운면 구조라리에는 우리 땅에서 가장 먼저 피는 매화나무 5그루가 있다. 한달 전쯤 첫 꽃망울을 터뜨린 매화가 이제 막 절정을 넘어섰다.
순백의 매화가 팝콘처럼 타닥타닥 꽃망울을 터뜨렸습니다. 가지마다 어찌나 탐스럽게 꽃송이가 열렸던지, 어쩐지 좀 헤픈 것처럼 보였을 정도였다니까요. 겨울 추위가 어느 때보다 혹독했던 탓일까요. 훈풍에 실려온 봄꽃 소식이 반갑고 또 반갑습니다. ‘봄볕’이라 하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는 이곳은 경남 거제시 일운면 구조라리의 작은 폐교입니다. 구조라초등학교의 매화나무를 찾은 거제 꼭 1년 만입니다. 이 지면을 열심히 읽으셨던 분들이라면, 지난해 봄에도 이곳에서 일찌감치 보내드린 첫 매화 소식을 기억하시겠지요.
그때도 일찌감치 꽃을 피운 매화에 감회가 새로웠지만, ‘어쩌다 보니 올해만 이리 일찍 피어났겠거니’ 했습니다. 그러나 2010년의 첫 꽃소식도 이곳에서 시작됐습니다. 이곳의 첫 매화가 꽃망울을 막 터뜨렸다는 전갈을 받은 것이 지난 1월10일 쯤이었으니, 꽃소식이 이르다 해도 이렇게 이를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이로써 구조라초등학교 교정의 3그루와 노인정 뒤쪽의 1그루, 그리고 마을 초입의 1그루까지 모두 5그루의 매화나무는 한반도 내륙에서 가장 먼저 꽃망울을 틔워올리는 매화나무라고 ‘공인’해도 괜찮지 싶었습니다. 멀리 바다 건너 제주 땅의 매화 소식도 이렇게 이르지 않았으니, 어쩌면 이곳의 매화가 대한민국의 첫 꽃소식을 전하는 나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거제에서 이즈음 만날 수 있는 꽃이라면 동백도 빼놓을 수 없겠습니다. 거제의 동백이라면 지심도의 울창한 동백숲이 이름나 있지만, 와현마을에서 더 들어가서 만나는 공곶이의 동백터널은 그야말로 환상적입니다. 공곶이의 동백은 지심도의 동백과는 달리 붉은 꽃잎이 겹쳐 피어나는 ‘겹동백’입니다.
공곶이의 매력이라면 단연 은밀한 맛입니다. 해안으로 내려가는 제법 가파른 330개의 돌계단을 따라 아름드리 동백나무들이 좁은 꽃터널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 숲에 들면 붉은 꽃망울과 짙은 숲그늘로 정신이 다 아득해질 정도입니다. 그뿐인가요. 동백나무숲을 지나면 종려나무들이 우뚝 서 이국적인 정취를 빚어내고 있습니다. 일대를 온통 노랗게 물들이는 수선화는 아직 일렀지만, 이제 막 진초록의 잎들을 틔워내기 시작했습니다.
▲ 다포항 부근의 바다에 떠있는 오리. 갯바위에 진초록 감태가 붙었다.
▲ 동백나무와 종려나무가 가득한 공곶이의 수선화가 싹을 밀어올린 모습.
봄볕이 따사로워 내친 김에 소매물도까지 건너갔습니다. 소매물도의 행정구역은 통영이지만, 거제도의 저구항에서 출발하는 편이 훨씬 더 가깝습니다. 등대섬이 내려다보이는 소매물도 언덕에 올라서니 붉은 동백꽃을 간질이는 훈풍에 남해안을 딛고 오는 봄이 손으로 만져질 듯했습니다. 봄을 맞이하는 데 이처럼 완벽한 곳이 또 있을까요. 아름다운 쪽빛 바다를 가르는 고깃배들을 보면서 아직 도회지의 겨울에 갇혀 있는 이들에게 따스한 봄 소식을 담은 엽서라도 한 장 쓰고 싶은 생각이 들었답니다.
에티오피아 황제가 걷던 길? ‘뻥’이 너무 심한것 아닙니까
황제의 길’. 최근 발간된 거제시 관광안내 책자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명소입니다. ‘황제의 길’이란 거제 망치해안에서 학동몽돌해안까지 4.5㎞의 해안도로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거제도를 찾은 에티오피아의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가 이 길에서 일곱번이나 멈춰 ‘원더풀’을 외쳤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랍니다.
그런데 고개가 갸웃거려졌습니다. 에티오피아 황제가 이 먼 땅 거제까지 왔었다고? 사료를 뒤져보니 과연 에티오피아의 셀라시에 황제가 1968년 5월 한국을 방문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외교부는 물론이고 어디에도 거제도를 방문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거제시청 관계자는 자못 불쾌하다는 어조로 “황제가 ‘비밀리’에 거제를 방문했기 때문에 사진이나 자료는 남아있는 게 없다”고 했습니다.
이 관계자의 말대로 황제가 ‘비밀리’에 온 것이라면 거제시는 그같은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었을까요. 공무원들은 죄다 “‘누군가’로부터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 ‘누군가’와 그에게 말해준 다른 ‘누군가’를 찾아서 몇 단계를 거쳐 올라가자 슬며시 오기가 발동했습니다. 수소문 끝에 황제 방문의 첫 발설자로 지목된 A씨를 찾아냈지만, 공교롭게도 그는 몇 해 전부터 노환과 치매로 투병 중이어서 거동은 물론 말도 한마디 할 수 없을 정도로 위중한 상태였습니다.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 42년 전 셀라시에 황제의 3박4일의 방한일정을 짚어봤습니다. 일정은 빠듯했습니다. 당시 기자들이 황제 일행을 따라붙어 일거수일투족을 보도했는데 도무지 거제도를 다녀갔을 만큼 여유 있는 일정이 아니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당시 황제 일행을 수행했던 지갑종 유엔한국전참전국협회 회장과 연락이 닿았습니다. 그는 황제방문 당시 협회 사무총장을 맡아 황제의 입국부터 출국까지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수행했답니다. 지 회장은 “셀라시에 황제는 참전기념비 제막식 참석을 위해 춘천에 다녀온 것 말고는 서울을 한 발짝도 떠나지 않았다”고 확인해줬습니다. 지 회장은 “그해 1월에 김신조 사건이 발생했던 터라 경호에 비상이 걸린 상황에서 황제가 거제도까지 갔다는 주장은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거제시가 자랑했던 ‘황제의 길’. 그 길은 결과적으로 ‘뻥’이었던 것이지요. 자료를 확인해보니 1972년 9월에 에티오피아의 데트라 디쇼메 재무부 재정차관보가 내한했던 기록이 있었습니다. 지 회장은 그가 “부산을 다녀갔다”고 기억했습니다. 추측하건대 아마도 재정차관보가 부산을 들러 거제도를 방문했던 것이 ‘황제’로 둔갑했던 모양입니다. 관광 홍보도 좋고, 관광에 이야기를 입히는 ‘스토리텔링’도 좋습니다. 하지만 호객꾼들처럼 ‘누가 그랬다더라’는 말만 듣고 이렇듯 ‘뻥’을 쳐서야 되겠습니까. 하기야 이런 것이 어디 거제시만의 일이겠습니까. 아무튼 원더풀을 외친 것이 황제였든 차관보였든 망치해안에서 구조라까지 잇는 해안도로는 여전히 아름다웠습니다.
수줍은 동백꽃도 빨간 얼굴을 살포시…
▲ 거제도를 딛고 건너간 소매물도에도 지금 동백이 한창이다. 소매물도는 통영시에 속해 있지만, 거제도 저구항에서 가는 편이 훨씬 더 가깝다. 동백 뒤쪽으로 보이는 바위는 등대섬이다.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봄소식이 닿는 곳은 어디일까. 입춘이 지난 이즈음이면 전남의 해남 땅에도, 진도 땅에도 보리밭이 진초록으로 펼쳐져 있을 터다. 경남 남해에도 초록빛 마늘밭이 성성하게 자라고 있겠고, 전남 여수의 해안에도 동백꽃이 붉게 타오르겠다. 그러나 꽃소식으로 봄이 당도했음을 따진다면 봄이 가장 먼저 오는 곳은 단연 거제도다.
거제시 일운면 구조라리의 폐교된 구조라초등학교 교정 옆에 아름드리 매화나무 3그루에는 지금 매화가 한창이다. 지난 1월10일 첫 꽃망울을 터뜨린 매화는 지금 절정의 순간을 막 넘어서고 있다. 가지마다 온통 순백의 꽃을 매달고 있다. 초등학교 옆 노인정 뒤쪽의 매화나무도 가지마다 꽃을 달고 있다. 구조라 마을로 드는 초입, 포구를 내려다보고 있는 자그마한 매화나무에도 꽃망울이 타다닥 터졌다.매화향은 폐교 교문 밖에서도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짙지만, 그래봐야 구조라의 매화나무는 고작 5그루. 본격적으로 꽃구경을 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숫자다. 섬진강변의 전남 광양 매화마을만 해도 야산을 뒤덮고 피어나는 매화가 수십만 그루를 헤아리지 않는가. 그럼에도 거제도 허름한 폐교의 몇그루 매화나무가 소중한 것은, 우리 땅에서 가장 먼저 봄 기운을 알아채기 때문이겠다.
더구나 이번 겨울의 혹한은 얼마나 매서웠던가. 그 엄동의 혹한에서도 봄의 기운을 감지하고 꽃을 틔운 매화가 새삼 장하고 기특하다.
거제에서 봄의 기운을 만끽하겠다면 드라이브만 한 게 없다. 거제도에서는 해안도로를 따로 찾아갈 필요가 없다. 거제 해안선 길이는 총연장 355.9㎞. 이 해안선을 따라 거의 모든 도로가 나있으니 어느 길에 올라서든 바다풍경을 만끽할 수 있다. 봄이 가까워오면 거제의 바다는 쪽빛이 한층 더 짙어진다.
사실 거제에서 가장 빼어난 드라이브 코스라면 단연 여차~홍포간 해안도로를 첫손에 꼽을 수 있다. 비포장 흙길로 이어진 3.5㎞ 남짓한 이 길은 이즈음에 워낙 유명세를 얻고 있는 곳이라 그 길의 정취를 예서 새삼 따로 이야기를 덧붙이지 않아도 되겠다.
여차~홍포 해안도로가 거칠고 짧은 길이라면 반대로 부드럽고 긴 해안 드라이브 코스도 있다. 바로 망치에서 학동을 거쳐 해금강까지 이어지는 도로다. 망치에서 구조라까지 구간은 산허릿길이라 바다 전망이 빼어나고, 구조라에서 학동을 거쳐 해금강으로 이어지는 구간은 온통 반짝이는 진초록 이파리 사이로 붉은 꽃이 피어난 학동동백림을 관통해서 달린다. 거제에는 알려지지 않았으되 걷기 좋은 길도 있다. 남부면 저구리 저구마을에서 탑포리 쌍근마을을 잇는 길이다. 왕조산의 허리를 감아도는 6~7㎞ 남짓한 길인데 그 길 어디서나 바다의 풍광이 장쾌하게 펼쳐진다. 시멘트포장이 돼있긴 하지만, 차량 운행이 통제돼 탄탄한 포장길을 따라 호젓하게 걸을 수 있다.
거제에서 동백을 보겠다면 지심도를 찾아가면 된다. 그러나 근래 들어 지심도의 매력이 TV 방송 등에 소개되면서 찾는 이들이 늘어나 여간 번잡스러워진 것이 아니다. 예전 외딴 섬의 호젓한 느낌은 좀처럼 맛보기 어렵다. 어쩐지 지심도의 동백이 예전만 못한 것 같다는 느낌도 이 때문인 듯싶다.
그렇다면 이곳은 어떨까. 거제의 와현해수욕장 깊숙이 들면 비경 ‘공곶이’가 있다. 예구마을에 차를 세우고 언덕을 따라 흙길을 20분쯤 걸으면 공동묘지가 나오고, 그 아래로 전혀 예상치 못한 풍광이 펼쳐진다. 묘지 아래 비탈면에 붉은 꽃이 선혈처럼 낭자한 동백나무와 이국적인 풍광의 종려나무들이 빼곡하다. 해안까지 닿는 330개의 돌계단은 아예 동백나무들로 터널을 이루고 있다. 빛 한 줌 새어들지 않을 정도로 울창한 동백나무숲에는 붉은 겹동백이 피어 있다. 돌계단 바닥은 동백이 지면서 떨군 꽃잎들이 마치 양탄자처럼 깔려 있다.
공곶이는 평생 이 땅을 일구며 살아온 한 노부부의 평생 삶이 온전히 바쳐진 곳이다. 50여년 전 이곳에 정착한 노부부는 척박한 산비탈을 일일이 돌을 쌓아 계단식 밭으로 만들어 놓고 갖가지 꽃과 나무를 심었다. 9만여㎡에 이르는 돌투성이 땅을 오로지 호미와 삽, 곡괭이를 이용한 근육의 힘으로 손수 일궈낸 것이다. 노부부의 농장에는 짙은 초록의 종려나무, 조팝나무, 설유화, 잎새란, 후피향나무, 팔손이들이 자라고 있다. 모두 다 남녘에서나 만날 수 있는 상록수들이다.
거제도를 찾았다면 내친 김에 소매물도까지 들어가보자. 소매물도의 행정구역은 통영시이지만, 통영에서보다 거제도에서 가는 편이 훨씬 더 가깝다.
저구항에서 소매물도까지는 40분 남짓. 소매물도는 그 빼어난 아름다움이 널리 알려진 곳이다. 워낙 섬의 경관이 아름다워 딱히 계절을 가려 찾지 않아도 그 정취를 만끽할 수 있다. 소매물도 선착장 부근 비탈진 사면에 다닥다닥 붙은 섬마을의 낡은 집들이 죄다 헐리거나 빈집으로 남아있고 그 대신 그 자리에 펜션들이 들어서면서 공사판이 돼버린 것이 아쉽긴 하지만, 마을을 지나 소매물도 전망대에 오르면 건너편의 등대섬이 탄성을 지를 정도로 아름답게 떠있다.
하지만 소매물도 최고의 경치는 봄에 가야 만날 수 있다. 소매물도 전망지점에 오르니 남녘의 봄볕이 이리 따스할 수 없다. 외투를 벗어들고 데크를 따라 깎아지른 해안 벼랑을 산책하는데 콧노래가 절로 난다. 건너다보이는 등대섬은 아직 풀밭이 누렇게 죽어있지만 봄의 훈풍이 이리 따스하니 곧 푸릇푸릇 초록기운이 감돌게 되리라. 소매물도를 돌아보고 등대섬으로 건너가려면 음력 보름과 그믐의 사리 무렵에 찾아가야 한다. 조수간만의 차이가 작은 조금 무렵에는 등대섬으로 건너갈 수 없다. 하지만 굳이 등대섬으로 건너가지 않고 이쪽에서 건너다보이는 풍광만으로도 매물도를 찾을 만한 이유는 충분하다.
가는 길
경부고속도로나 중부고속도로를 타고 대전 판암갈림목에서 대전~통영선 고속도로로 갈아타고 통영까지 간다. 통영에서 14번 국도를 타고 신거제대교를 건너면 거제도다. 여기서 동쪽 해안에 붙어서 14번 국도를 따라 신현~옥포~장승포~지세포~와현~구조라~해금강 쪽으로 돌 수도 있고 서쪽 해안의 1018번 지방도를 따라 반대쪽으로 돌 수도 있다. 구조라초등학교의 매화를 보겠다면 14번 국도를 택하는 편이 낫다. 공곶이는 지세포에서 해금강 방향으로 향하다가 와현해수욕장으로 들어서 길끝까지 들어가 예구마을에 차를 세우고 걸어가야 한다. 거제도 가는 여객선은 저구항에서 하루 4번 뜬다. 오전 8시30분에 첫 배가 운행한다. 왕복 2만원.
먹을 것 & 묵을 곳
함목에서 도장포를 지나 해금강 마을로 가는 길 옆의 ‘블루마우리조트’(055-632-6377)를 추천할 만하다. 리조트 확장공사가 이제 막 끝나 다소 번잡스럽긴 하지만, 객실에 들어 바라보는 바다 풍광이 이곳만큼 아름다운 곳은 드물다. 14번 국도를 달리면 교차로마다 세워진 펜션 안내간판으로 머리가 어지러워질 정도다. 와현해수욕장 곁 해안도로변의 ‘거제 씨팰리스호텔’(055-730-1000)은 깔끔한 호텔을 선호하는 이들에게 좋겠다.
거제의 대표적인 맛집으로는 장승포의 ‘항만식당’(055-682-3416)과 신현읍 고현리의 ‘백만석’(055-637-6660)이 있다. 항만식당은 육수를 사용하지 않고 된장을 풀어 끓인 해물뚝배기를 내놓는데 맛이 깔끔하고 담백하다. 양은 풍성한 편이지만, 가격이 다소 부담스러운 편. 백만석은 다져서 네모꼴로 냉동한 멍게와 김가루, 참기름 등을 넣고 비벼먹는 멍게비빔밥을 내놓는다. 이즈음 거제에는 양식굴이 한창이니 서정리 ‘거제도 굴구이’(055-632-9272)도 찾아가볼 만하겠다.
<출처> 2010. 2. 10 /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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