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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수상 및 후보시

2010 경남 신춘문예 당선시 - 허氏의 구둣방 / 이미화

by 혜강(惠江) 2010. 1. 2.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허氏의 구둣방

                                            - 이미화

발 끝에 달을 달고 저녁 강을 건너고 있는 허氏

구름처럼 떠돌았으므로 그의 생은

한쪽만 유난히 닳은 구두처럼 삐뚜름하다

그의 구두처럼 다 허물어져가는

옥봉동 산 1번지 아파트에

조등처럼 별이 걸릴 때 저녁하늘은

가난한 마을의 착한 지붕을 건너가면서

지상의 가장 낮은 바닥부터 따뜻하게 어루만져준다

이동전화기 판매점에 다니는 착한 처녀의

구두 뒷굽을 갈아 끼우던 허氏의 남루한 저녁에

잠깐 화사한 웃음이 번진다

이동식 컨테이너 박스에 맞춘 그의 굽은 등 뒤로

따각 따각 처녀의 발걸음이 이동전화기 전화 연결음으로 터진다

중심을 놓고 뒷굽을 맞춘 구두가 흔들린다

일용할 하루의 노동이 땀 내음 밴 구둣방을 넘보기도 하지만

늘 기우뚱 한쪽으로만 기우는 그의 세상에서

수선 중인 구두는

기운 없는 그의 한 쪽 무릎에서 완성되는 절망이 키운 꿈이다

다시 언제 그의 세상이 흔들릴지 모르지만 이미 구두 뒤축이나

밑창만으로 키워 놓은

환한 세상이 그에게선 자라고 있다

하나 둘 찾아와 박힌 별들의 뒷자리로 들던 그가

창문에 걸린 어둠을 후다닥 걷어내고

달빛 속에서 주춤거린다

볼이 넓고 우직한 신발 속 그의 한쪽 발이

나머지 발의 오늘을 타전한다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심사평

시적 긴장 아쉽지만 가능성에 기대

  지난해보다 응모 작품은 줄었지만 작품 수준은 뛰어났다

는 것이 올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의 중평이었다. 예심에서 본심으로 올려 보낸 작품 중에서 ‘오르골’ ‘몽골숙희’ ‘허씨의 구둣방’ 등 3편의 시를 최종심에 두고 심사자의 숙독과 토론이 있었다.

 

  ‘오르골’은 맑고 아름다운 시다. 시 속에서 오르골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런 서정적 특성에 비해 주제가 약한 것이 흠이었다. 남들이 쉽게 공감하는 주제가 아니라 신춘문예 당선작이 가지는 독특성이 부족하다는 말이다. ‘몽골숙희’는 다문화시대를 대변하는 개성 있는 주제의 시다. 그 시선도 건강하다. 그러나 시를 끌고 가는 변주가 평범하다. 평면적인 구성이 아닌 좀 더 입체적인 구성이 앞으로의 시 창작에도 필요할 것 같다.

 

  ‘허씨의 구둣방’을 두고 심사자 간의 이견이 컸다. 시를 두고 장시간의 토론도 있었다. ‘허씨의 구둣방’은 따뜻한 시고, 세상으로 보내는 시적인 메시지가 희망적이다. 그러나 시적인 긴장이 다소 늘어지는 것이 문제였다. 함께 투고한 시들도 마찬가지였다. 나사를 죄는 듯한 압축이 필요했다.

 

   심사자들은 올 시 부문에 당선자 없음에 대해서도 논의했다. 그러나 1년에 한 번의 기회가 돌아오는 신춘의 자리인 만큼 다른 시들에 비해 더 많은 가능성을 가진 ‘허씨의 구둣방’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당선자는 난산 심사 끝에 시인으로 출발하는 만큼 앞으로 경남신문 신춘문예가 배출한 한국 시단의 좋은 시인, 치열한 시인으로 빛나길 바란다. 본심에 오른 분들과 ‘하늘에 상현달이 뜬다’ ‘꽃무릇’ ‘보따리 판타지’ ‘장수풍뎅이 우화기’의 투고자들에게도 격려를 보낸다. <심사위원 정일근·김선학>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소감- 이미화

 

또 다른 변이를 꿈꾸며

  그와 나의 공통점은 한쪽으로 세상을 바라보기에 늘 삐뚜름하다는 것이며, 차이점은 늘 그는 웃고 나는 운다는 것이다. 구두의 굽이 덜거덕거리면 지금까지 걸어온 구두의 길을 들고 그에게 달려가곤 했었다. 그때마다 그는 구름에서 떨어져 나온 조각을 뒷굽에 끼우고 유난히 빛나는 별을 붙여 주며 나의 슬픔을 동여매어 주었다. 단단히 뭉쳐진 슬픔이 변종이 되어 나를 울렸다. 그럴 때마다 시가 마려웠다. 가끔씩은 시를 짓이겨 강가에 풀기도 했었다. 검은 보자기에 나의 생을 던져 놓고 여행을 떠난 적도 많았다.

 

  눈이 잘 오지 않는 분지의 도시에서 낯선 아침을 맞이하는 날, 어제는 함박눈이 앞산을 가렸다. 함박눈이 다 져 갈 즈음 마침내 당선 통보를 받았다. 내 안에 다시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하고 속으로는 펑펑, 알 수 없는 회한의 격랑이 소용돌이쳤다. 분명 울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웃고 있었다. 실실, 웃고 있었다. 그렇게 하루 종일, 분지의 도시에서 1박을 이룬 아침이었다.

 

  당선 소식은 울음이 변이되어 나를 웃음으로 가두어버렸다. 그냥 내버려뒀다. 나는 천천히 보자기를 풀어 삶의 연결고리를 풀고 내 이름 석 자를 날려 보냈다. 사유에 갇혀 무겁던 나에게 날개를 달아 주려 한다. 당선은 또 다른 나의 변이 과정이 될 것이기에.

 

  겹겹으로, 그리고 천성적으로 슬픔을 달고 다니는 내게 웃을 수 있는 길로 인도해 주신 분이 계시다. 세상의 변방에 선 넓으면서도 낮고, 커다랗고도 여리며, 작고 아픈 것들을 배려하는 맘, 그런 연애의 대상을 찾아 가슴 절절히 사랑하라고 가르쳐 주시고 시보다 하루의 양식이 다급했을 때 뜨거운 격려로 다잡아 주신 김경 지도 선생님께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시의 정신을 일깨워주신 박종현 선생님, 김용락 선생님, 창신대 문창과 이상옥 교수님께도 감사 말씀을 드린다. 함께 어둠을 찢고 시의 종자를 찾으러 다니던 시 읽는 앉은 자리 문우들, 낮은 곳을 동행하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마루문학 동인들, 작고 여린 변방을 찾아다니며 시를 노래했던 그림내시낭송회 팀들, 감사드리고 싶은 분들이 함박눈처럼 쏟아진다.

 

  칠순을 넘기셔도 결코 텃밭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어머니, 아버지 올해는 남은 배추만 봐도

눈물이 난다 하셨죠. 이젠 스스로 김장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은비, 은빈, 진녕아. 시와 일을 포기하지 않는 엄마로 인해 마음자리 많이 비우게 해서 미안해.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분들의 이름들에 뼛속까지 감사의 맘이 젖는다. 보답하는 길은 열심히 습작하고 노래하는 것임을 명심하려 한다. 여리고 낮은 것들이 삐뚜름하게라도 일어서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부지런히 그들의 이름을 불러 주려 한다. 시를 보듬을 수 있도록 부족한 글에 따뜻한 손을 얹어 주신 심사위원들께 감사드린다.

 

△1964년생 △창신대 문예창작과 졸업 △마루문학 회원 △그림내시낭송회 사무국장 △시 읽는 앉은 자리 회원

 

 

<출전> 2010. 1. 1 / 경남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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