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한국일보 신춘문예/시]
검은 구두
- 김성태
그에게는 계급이 없습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좁은 동굴이며
구름의 속도로 먼 길을 걸어온 수행자입니다
궤도를 이탈한 적 없는 그가 걷는 길은
가파른 계단이거나 어긋난 교차로입니다
지하철에서부터 먼 풍경을 지나
검은 양복 즐비한 장례식장까지
그는 나를 짐승처럼 끌고 왔습니다
오늘 나는 기울기가 삐딱한 그를 데리고
수선가게에 갔다가 그의 습성을 알았습니다
그는 상처의 흔적을 숨기기 좋아하고
내가 그의 몸을 닳게 해도 불평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와 정면으로 마주한 적은 없지만
가끔 그는 코를 치켜들기 좋아합니다
하마의 입으로 습기 찬 발을 물고 있던 그가
문상을 하러 와서야 나를 풀어줍니다
걸어온 길을 돌아보는 마음으로 그를 만져보니
새의 날개 안쪽처럼 바닥이 움푹 파였습니다
두 발의 무게만큼 포물선이 깊어졌습니다
그의 입에 잎사귀를 담을 만큼
소주 넉 잔에 몸이 가벼워진 시간
대열에서 이탈한 코끼리처럼
이곳까지 몰려온 그들이 서로 코를 어루만지며
막역 없이 어깨를 부둥켜안고 있습니다
취한 그들이 영정사진처럼 계급이 없어 보입니다
그가 그에게 정중한 인사도 없이
주인이 바뀐 지도 모르고
구불구불 길을 내며 집으로 갑니다
|
"당선도 당선이지만 저만의 시로 인정받았다는 것이 정말 기쁩니다." 김성태(24)씨에게 시가 '들어온' 것은 지난해 7월이었다. 대학 입학 때부터 사귀어왔던 절친한 친구를 사고로 막 잃고 나서다. 접신(接神)의 시간처럼 가을 내내 시를 쓰며 그 허무함과 절망감을 달랬다. 당선작은 그 친구의 장례식에 가서 마구 뒤섞여 있는 구두들을 보며 착상한 시다. '구두에는 계급이 없구나. 구두는 살아온 인생과 살아갈 인생의 흔적을 보여주는구나'라는 생각에서 시는 출발했다. 김씨는 기성 시인들의 지도를 받지도, 시인 지망생들의 합평 모임에 참석하지도, 문학아카데미에서 공부하지도 않았다. 철저히 혼자서 습작기를 보냈다. "어떻게 써야 할지 잘 몰라서 시인들로부터 조언을 받을까 하기도 했지만, 시 쓰는 기술보다는 제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는 그는 머리맡에 시집을 두고 틈만 나면 시를 쓰고 지우며 스스로를 연단했다.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는 것이 좌우명"이라는 그는 시상이 떠오를 때마다 포스트잇에 메모를 하는 버릇이 있는데, 방 한쪽 벽은 포스트잇으로 도배가 돼 있다고 한다. 시만큼이나 연극을 좋아하는 취향과 무관하지 않게, 그의 시에는 '이야기'가 있다. 공익근무를 하면서도 지난해에만 70편 이상의 연극과 뮤지컬을 봤고 희곡도 100편 이상 읽었다. 다양한 예술 장르에 관심의 촉수를 뻗치고 있는 그는 환한 하늘과 어두운 집, 하늘을 나는 신사 등 이질적 풍경 속에 대상을 배치해 상상을 자극하는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에서 영감을 얻기도 한다고 말했다. 최근 니체의 <비극의 탄생>을 읽다가 '무서운 깊이 없이 아름다운 표면은 없다'는 구절에 밑줄을 그었다는 그는 "이 구절이 무서운 성찰 없이 울림 있는 시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으로 읽혔다"며 "행과 행, 문장과 문장 사이에 울림이 있는 시를 쓰고 싶다"고 말했다. |
●심사위원 김광규(시인·한양대 명예교수), 이시영 (시인·단국대 초빙교수), 김기택(시인)
|
<출처> 2010. 1. 1 / 한국일보
'문학관련 > - 수상 및 후보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0 세계 신춘문예 당선시 - 모른다고 하였다 / 권지현 (0) | 2010.01.02 |
---|---|
2010 경향 신춘문예 당선시 - 직선의 방식 / 이 만섭 (0) | 2010.01.02 |
2010 문화 신춘문예 당선시 - 골목의 각질 / 강윤미 (0) | 2010.01.01 |
2010 동아 신춘문예 당선시 - 붉은 호수에 흰 병 하나 / 유병록 (0) | 2010.01.01 |
2010 조선 신춘문예 당선시 - 풀터가이스트 / 성은주 (0) | 2010.01.0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