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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광주. 전남

전남 순천의 명소들(다랑이마을과 낙안읍성)

by 혜강(惠江) 2009. 10. 7.

 

전남 순천

 

‘남도 여행 1번지’ 전남 순천의 명소들

 

전남 순천 다랑논 마을의 ‘가을 풍경’과 낙안읍성

 

 

박경일 기자

 

 

 

▲ 조계산 자락 산척마을의 다랑논에 벼가 누렇게 익어가고 있다. 구불구불 유려한 곡선을 그리고 있는 다랑논의 조형미 넘치는 모습이 마치 예술작품과도 같다. 노인들이 다랑논을 오르내리며 고되게 지어 거둔 쌀은, 추석명절에 고향을 찾아온 자식들의 밥상에 오르는 뜨거운 밥이 되리라.

 

 

만추로 가는 ‘황금 계단’… 산골 백발 농부의 풍년歌

 

 

전남 순천시 송광면 봉산리의 산척마을.  조계산 자락에 푸근하게 자리잡은 이 마을에는 다랑논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락 비탈진 사면에 층층이 석축을 쌓아 만든 다랑논에 익어가는 벼가 물결칩니다.  땅 한배미만 있어도 물길을 대고 써레질을 해서  대대로 농사를 지어온 산골 마을의 온부들에게 가을은,  그것만으로도 축복이지요.  젊은이들은 다 도시로 나가고 남은 노인들이  아픈 허리를 두드려가며 쉬엄쉬엄 짓는 농사이니 출이라야 제 먹을 것도 빠듯한 정도지만,  그래도 논둑에 서서 누렇게 익어가는  논을 바라보는 노인들의 표정은 환합니다.


산척마을에는 폭이 고작 두 세 뼘이나 될까 싶은 작은 논부터 온계를 넣을 수 있을 정도의  제법 너른 논까지 산자락을 타고 층층이 펼쳐져 있습니다. 그저 산자락 능선의 굴곡과 땅의 기울기에 따라 다지고 터를 골랐을 뿐일 텐데 층층이 펼쳐진 다랑논이  그려내는 곡선은 미술작품처럼 조형적입니다. 사실 이런 가을 풍경이 어디 산척마을뿐이겠습니까.


우리 농촌 어디서나 가을 들녘의 풍경은 이와 다르지 않지요. 이삭이 익기 시작한 논은 노란 형광빛으로 물들어가고, 마을 뒷산에는 탐스러운 굵은 밤들이 밤송이 안에서 곧 터질 듯 부풀었고, 흙담 안쪽의 감나무에 매달린 감은 뾰족한 끝부터 노랗고 빨갛게 익어가고 있습니다. 나무에 휘어질 듯 달린 대추들도 하루하루 가을바람에 맛이 들어가고 있습니다.

 

흔히들 ‘남도 답사 1번지’로 전남 강진을 꼽습니다만, ‘남도 여행의 1번지’ 자리는 전남 순천의 것이지 싶습니다.  어느 계절이나 그렇긴 하지만 특히 가을날의 순천에는 어찌나 가볼 곳이 많던지 갈림길마다 망설여진답니다. 가을걷이를 앞둔 다랑논이 황금빛으로 물들어가고 있는 조계산 자락의 산골마을들. 가을볕이 초가지붕 위로 반짝이는 낙안읍성의 오래된 정취. 하루하루 붉은 기운이 더해가는 칠면초와 이제 막 꽃을 피운 갈대가 무성한 순천만.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꼬막잡이 뻘배가 하나 둘 여자만의 바다로 나가는 벌교까지도 다 순천의 땅이지요. 순천은 드물게 농촌과 어촌의 고향을 함께 그려보이는 곳입니다. 따지고 보면 도회지 사람이라 해도 열에 아홉 쯤은 한두 세대만 거슬러 올라가면 모두 이런 시골마을에 '추억의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이 가을에 구태여 남도 땅 순천을 찾아가라 권하지는 않겠습니다. 곧 추석명정입니다. 저마다 그리움의 보따리를 안고 귀향하는 길. 그 길에서 새삼 계절의 아름다움을,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향수를 일깨울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지요. 유년시절의 아릿한 기억을 길어올릴 수 있는 고향 땅이 누구에게나 ‘가장 훌륭한 여행지’임을 아는 까닭입니다.

 

 

조선시대 그대로 ‘낙안읍성’·6.5㎞ 낭만 숲길 ‘굴목이재’…

 

 

‘남도 여행 1번지’ 전남 순천의 명소들

 

 

 

▲ 순천시 별량면 학산리 화포마을의 초가집 뒤로 순천만의 차진 개펄이 이어져 있다. ‘엄마가 섬그늘에…’로 시작하는 동요 ‘섬집아기’가 떠오르는 풍경이다. 초가로 지붕을 이은 건물은 주민이 거주하는 집은 아니고, 갯일을 나갔다가 돌아와 잠깐 숨을 돌리는 쉼터 역할을 하는 곳이다.

 

 

▲ 송광사의 말사인 천자암의 쌍향수. 800년 수령의 두그루 곱향나무는 우람하다 못해 신령스러운 기운마저 느껴진다.

 

 

# 다랑논 마을 가을 햇살 속에 여물어가는 벼 이삭

주암호를 끼고 도는 호반길에서 산자락을 타고 오르면 다랑논으로 가득한 산척마을이다. 눈을 돌리는 이쪽도, 저쪽도 층층이 겹쳐진 다랑논이 구불구불 이어진다.

농사일이 힘에 부친 마을 노인들이 고된 벼농사를 포기하면서 깨나 콩, 고추를 심었거나 아예 버려져 묵은 논의 흔적들이 곳곳에 있었지만, 남은 다랑논만으로도 입이 딱 벌어질 만했다. 작고 옹색한 층층이 다랑논이 이렇듯 장엄하게 아름다운 것은, 논을 이루는 조형미보다는 한 그릇의 뜨거운 김나는 밥을 지을 쌀을 내는 까닭이다.

“삿갓 하나로 논 한 배미를 다 덮을 수 있다 해서 ‘삿갓배미’라고도 했고 죽 한 그릇, 밥 한 그릇하고 바꿀 정도로 작다 해서 ‘죽배미’, ‘밥배미’라고도 했지. 옹색하긴 했지만 ‘없는 사람’들도 여기 들어오면 다 먹고 살았어. 논금(논값)이 워낙 헐한데다가 괭이 한자루에다 몸뚱이만 있으면 거친 산자락이 다 논이 됐으니까.”

마을회관 앞 정자 아래서 다랑논을 내려다보던 노일수(66)씨는 너나없이 어렵긴 했으되 ‘지금보다는 더 살 만했다’던 시절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마을 주민들이 어찌나 작은 논들을 촘촘이 붙였는지, 채 두 뼘도 되지 않는 좁은 논에는 쟁기마저 들어가지 않아 호미로 논을 갈기도 했단다.

그렇게 고된 노동으로 거둔 쌀도 이듬해 봄이면 다 떨어졌고 장리 쌀을 얻어 연명했다. 한말을 빌리면 그해 가을에 한말반으로 갚아야 했다. 그저 먹고 사는 것만으로도 팍팍했던 시절이었지만, 백중날이나 추석이면 마을 사람들이 한데 모여 덕석(멍석)을 만들어 남자들은 씨름도 하고, 아낙들은 누가 삼베를 더 잘 짜는지 내기를 벌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쌀 한가마니’ 같은 제법 묵직한 상품이 걸리곤 했는데, 어려운 형편의 이웃들에게 슬며시 져주는 일쯤은 예사였다고 했다.

한때 90여호를 넘었다던 산척마을의 가구 수는 이제 40호 남짓. 마을 주민 60여명 중에서 남자는 22명에 불과하다. 마을회관 앞 정자는 마루에 한뼘 높이의 칸막이를 달아 어른자리와 젊은이 자리로 구분했던 것이, 젊은이들이 다 떠나면서 남자자리와 여자자리로 나눠졌다. 급기야 이제는 넓은 쪽은 할머니들 차지가 됐고, 할아버지들은 좁은 자리로 밀려나고 말았다.

그래도 정자는 늘 적적하다. 주민들 대부분이 몸이 아프거나 거동이 불편한 탓이다. 거동이 좀 나은 노인들은 마당에 나와 멍석을 깔고 고추를 말리거나 깨를 터느라 하루 해가 짧다.

 

# 오래돼 잊어진 것들을 찾아나서는 추억의 여정

농촌마을의 옛 풍경이 다랑논이 펼쳐진 산척마을에 남아 있다면, 도시에서의 추억의 시간은 순천시 조례동의 오픈세트장에 박제처럼 남아 있다. 한때 지자체들이 앞다퉈 세웠던 촬영세트장들은 드라마나 영화 상영 중 관광명소로 각광받다가 종영 후 기억에서 잊어지면서 애물단지가 되곤 했다. 그러나 순천의 오픈세트장은 다르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근대의 시간을 구역별로 배치한데다, 설계 당시부터 관광지 개발을 염두에 두고 탄탄하게 지었다.

세트장에는 1960년대 태백의 탄광마을과 1980년대 서울 변두리, 그리고 1970년대 서울의 달동네가 완벽하게 재현돼 있다. 시간의 태엽을 40년 전쯤으로 감은 탄광마을의 골목. ‘행복사진관’에서는 금세라도 흰 와이셔츠를 입은 사진사가 나와 마그네슘 플래시를 펑 터뜨리며 사진을 찍을 것 같고, ‘꽃마차 다방’을 들어서면 금붕어 어항이 있는 나른한 오후의 풍경이 펼쳐질 것만 같다.

세트장에 조성된 마을 중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곳은 완벽하게 재현해낸 서울의 달동네. 언덕을 따라 촘촘이 어깨를 맞대고 늘어선 누추한 집들이 거미줄처럼 얽힌 길을 따라 펼쳐져 진짜 달동네로 들어온 것 같은 착각을 안겨준다. 도시 변두리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이들이라면 누추한 달동네의 골목을 돌며 이리저리 집구경을 하다가 어느 순간 잊고 지냈던 추억들이 왈칵 밀려오리라.

시간을 더 뒤로 돌리겠다면 낙안면의 낙안읍성을 찾아가자. 민속마을이 조성된 낙안읍성은 너른 평야에 축조된 성곽으로 성내에는 관아와 100여채의 초가가 옛 모습 그대로 보존돼 있다. 실제로 85가구 229명이 살고 있는 마을로 들어서면 조선시대 어디쯤으로 시간이동을 한 듯하다.

낙안읍성에서는 한창 붉게 익어가는 감나무 아래서 고즈넉하게 성내 마을을 산책하는 맛도 좋지만, 다채롭게 펼쳐지는 체험행사도 참가해볼 만하다. 매일 짚풀공예와 길쌈 등의 전통 문화체험이 상설운영되는데, 대부분 무료로 진행되며 천연염색이나 도자기만들기, 목공예 체험 등에 한해 재료비(5000~1만원) 정도만 받는다. 이와 함께 매주 일요일에는 읍성내 객사에서 시조창과 살풀이, 가야금산조, 판소리 등의 풍류놀이도 펼쳐진다.



# 선암사에서 송광사로 굴목이재의 편백나무

 

 

 

▲ 굴목이재 편백나무 숲



순천에서는 이름난 두 절집 선암사와 송광사를 빼놓을 수 없다. 같은 조계산을 끼고 있는 동쪽에는 선암사가, 서쪽에는 송광사가 자리잡고 있다.

한국불교의 양대 산맥으로 일컬어지는 두 곳의 절집을 다 둘러보려면 산자락을 타고 넘는 굴목이재를 따라 걷는 여정이 최고다. 조계산의 8분능선을 넘어 선암사에서 송광사를 잇는 산길은 6.5㎞ 남짓으로 서너시간이면 족하다.

산 길은 굴참나무, 상수리나무 등의 활엽수림이 드리운 짙은 숲의 터널이다. 이 길을 따라 선암사와 송광사 스님들이 오가며 도반의 우정을 나눴을 것이고, 이 길을 따라 꽃가마를 탄 승주의 처녀가 낙안읍성 마을로 시집을 갔을 터다.

선암굴목이재와 송광굴목이재의 중간쯤에는 보리밥집이 있다. 다리쉼을 하며 느티나무 아래 평상에 앉아 동동주에 곁들여 된장을 넣어 쓱쓱 비벼먹는 보리밥은 오로지 그것만을 목적으로 굴목이재를 넘는 이들이 있을 만큼 일품이다.

송광사에서 샛길로 접어들면 부속암자인 천자암의 곱향나무를 만날 수 있다. 가지를 휘감으며 800년을 자랐다는 두그루의 우람한 곱향나무는 귀기마저 느껴질 정도로 위용이 대단하다. 조계산에서 수도하던 보조국사가 제자 담당국사와 중국에 돌아올 때 짚고온 지팡이를 나란히 꽂아놓은 것이 뿌리가 내려 자랐다고 하는데, 마치 넝쿨처럼 휘감듯 자라난 우람한 두그루의 나무는 커다란 두마리의 용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스승과 제자가 서로 절을 하고 있는 모습 같기도 하다. 어찌 저런 모습으로 800년의 세월을 보냈을까.

굴목이재를 따라 선암사에 당도하기 직전에는 거칠 것 없이 하늘을 찌르고 선 편백나무 숲이 있다. 촘촘이 심어져 올곧게 자라난 편백나무 숲에 들면 청신한 기운이 온몸을 감싼다. 절집에 이르기 전에 이곳에서 마음과 몸이 정갈하게 씻기는 기분이다.

본디 송광사는 화려하면서도 웅장하고, 선암사는 고즈넉하면서도 고요하지만 이즈음 선암사는 ‘10만 연등 불사’가 한창인데다 팔상전 해체복원 공사까지 벌어지고 있어 여간 번잡스러운 것이 아니다. 굴목이재를 넘는 길은 송광사나 선암사 어느 쪽에서 출발해도 좋지만, 선암사에서 시작해 송광사까지 걸은 뒤 고즈넉한 절집의 정취를 느끼는 것이 번잡스러움을 피하는 방법이겠다.

순천에서 또 지나칠 수 없는 곳 중의 하나가 순천만이다. 이즈음 순천만의 대대포구에는 막 피어난 갈대꽃이 바람에 몸을 누이고 있고, 개펄 위에 펼쳐진 칠면초는 하루하루 붉은 기운을 더해가고 있다. 용산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부드럽게 휘어진 개펄의 물길도 좋지만, 화포에서 보는 일출 풍경이나 솔섬 쪽에서 보는 일몰 풍경도 그에 못지않다.


 

가는 길·묵을 곳·먹을거리

수도권에서 출발하자면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장성분기점에서 고창~담양간 고속도로로 갈아타고 다시 담양분기점에서 호남고속도로에 올라 주암나들목(송광사)이나 선암사나들목(선암사), 서순천 나들목(순천만)으로 나오면 된다. 송광사와 선암사가 있는 조계산과 순천만은 사뭇 거리가 멀어, 최종 목적지를 순천만으로 정하고 오가는 길에 송광사나 선암사를 들르는 편이 낫다.

순천만의 드넓은 개펄에 바짝 붙어 지어진 에코비치캐슬을 최고의 숙소로 추천할 만하다. 순천시내에는 모텔들이 즐비한데, 특히 신도심인 조례동 일대에 아우디모텔, 칼튼모텔등 새로 지은 깨끗한 모텔이 많다.

순천에는 맛집들이 즐비하다. 그중 별미로 꼽히는 것이 짱뚱어탕. 대대포구에 식당이 여럿 있는데 학산리 해변의 전망대가든( 0...)이 가장 유명하다. 송광사 인근에는 길상식당(061-755-2173)이, 선암사에는 진일기사식당(061-754-5320)이 첫손으로 꼽히는 곳이다.

 

 

<출처> 2009. 9. 30 /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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