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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광주. 전남

전남 담양 금성산성, 어둠의 전설조차 푸르다

by 혜강(惠江) 2009. 9. 21.

 

전남 담양 금성산성 

 

 어둠의 전설조차 푸르다

 

 

 글 : 김신영 기자

 

 

 

▲ 담양 금성산성

 

 

   옛날 옛적 축대 하나를 쌓아 올리라는 명을 받은 어린 형제는 작업을 마치지 못하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규칙 때문에 쉴 새 없이 일했다. 주변에서 쉬라고 권하는데도 축대를 완성하지 못하면 늙은 부모에게 그 일이 맡겨질 것을 걱정하며 천신만고 끝에 작업을 마친다. 그러나 너무나 지친 형제는 축대가 완성되는 순간 쓰러졌고 결국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견고해서 아름다운 전남 담양 금성산성을 쌓기 위한 '아픈 사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핏빛 역사'로 이어진다. 단단한 산성에서 1894년 동학군과 관군의 혈전이 벌어졌고 동학군 수령 전봉준은 부하의 배신으로 잡혀갔으며 한국전쟁 때는 빨치산들의 거점으로 여러 차례 불길에 휩싸였다(담양 답사여행 안내서 '푸르름을 보려거든 담양으로 오라' 중).

 

 
 

 

 

  경이로운 풍경 속엔 종종 슬픈 이야기가 숨어 있다. 금성산성(金城山城)이 그렇다. 산성의 남문(南門) 격인 충용문(忠勇門)에서 바라본 성곽 끄트머리 보국문(輔國門)은 아가씨 손바닥같이 맨드르르하고 도도한 돌벽을 짙은 녹음 위로 단정히 치켜들고 눈길을 유혹한다. 미끈한 호리병처럼 보인다. 붓으로 내쳐 그린 듯한 겹겹의 산과 둥둥 흐르는 흰 구름, 묵직한 물이 고인 담양호의 구불구불한 테두리가 배경을 꽉 채우면 그림 하나가 완성된다. 어쩌면 그 처절한 얘기들은 산성의 아름다움을 역설적으로 더 돋보이게 하는지도 모른다.

  아름답기는 해도, '담양 하면 대나무'라는 명성이 높아 금성산성까지 굳이 찾아오는 이들이 그다지 많지는 않았다. 그러나 방송 중인 MBC 드라마 '선덕여왕' 1·2회의 공개 화백회의 장면이 금성산성에서 촬영됐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물어물어 찾아오는 이들이 늘고 있단다. 화려한 배우들의 의상과 최적화한 조명으로 치장한 HD(고화질)TV 속 금성산성이 원색적 유화(油畵) 같았다면 6월 초 찾아가본 산성은 색 적게 쓴 담채화처럼 잔잔하다.

  한강 남쪽에서 유일하게 남한산성에 비길 만한 큰 규모를 자랑하는 금성산성은 둘레가 6486m. 정확히 언제 만들어졌는지 전해지진 않지만 고려 시대 역사 책인 '고려사절요'에 '고종 43년(1256년) 몽골군이 담양에 주둔했다'는 기록이 전하는 것으로 보아 이전에 산성이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짐작할 따름이다.

  아픈 역사에 입을 다문 듯, 수도권 산성 주변이 식당으로 붐비는 것과 달리 금성산성 주변은 썰렁하리만큼 조용하다. 산성 옆에 으레 있어야 할 듯한 백숙 집 하나 없다. 나쁘게 말하면 허전하고 좋게 말하면 고즈넉한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던 데는 쉽게 자신의 '멋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비교적 용이하지 않은 접근성이 한몫했다.

  차로 진입할 수 있는 부분은 금성산 입구 주차장까지다. 주차장에서 보국문까지 닿는 데는 내리 오르막을 40분 정도 걸어야 한다. 그늘도 별로 없어 충용문에 닿을 즈음이면 땀으로 셔츠가 흠뻑 젖는다.

 

 

 

보국문 아래를 지나 3분 정도 걸으면 금성산성 안내 지도와 충용문이 나온다.

 

  충용문에서 약 30분 정도 걸리는 철마봉에서 산성은 '궁극의 몸매'를 드러낸다. 거리로는 약 1.4㎞로 엄청 멀진 않지만 이전 길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굴곡이 험해 다리가 뻐근해 온다. 팔 뻗으면 닿을 정도로, 성곽을 바로 옆에 두고 능선을 따라 걷는 길엔 그늘이 없어 얼굴이 따갑다. 인간의 '땀'에 산성은 장쾌한 풍경으로 화답한다. 철마봉으로 한 걸음 다가갈 때마다 성곽과 담양호의 곡선은 한결 선명해진다.

  철마봉에 오른 후 발길은 세 가지로 갈린다. 온 길을 다시 내려가거나, 성곽을 시계 방향으로 한 바퀴 돌거나, 성곽 따라 조금 더 걷다 중간에 가로질러 내려오는 중에 선택할 수 있다. 왔던 길 돌아가긴 어쩐지 시시하고 경사 심한 긴 성곽 한 바퀴 돌기는 웬만한 근력으론 버겁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철마봉에서 서문까지 갔다가 보국사 터 지나 내려오는 '제3의 길'을 선택한다.

  철마봉부터는 성곽에서 약간 떨어져 걷는 시원한 숲 속 그늘 길이다. 온갖 새와 곤충들이 찌르르 꽥꽥 쪼이쪼이 하면서 수천 개 '자연 스피커'로 사람 발길 드문 산길을 수놓는다. 서문 지나 조금 더 걷다 보면 계곡이 나온다. 계곡 지나 오른쪽으로 난, 좁지만 잘 닦인 흙길을 따라 20분 정도 걸으면 보국사 터에 닿는다. 지금은 텅 빈 폐허뿐인 휑한 '터'를 지나 20분 정도 더 걸으면 다시 충용문이다.

  풍경과 역사와 현재를 아울러 보듬어주는 건 시간을 끌어안고 언제 그랬냐는 듯 무성하게 자라난 나무들이다. 보국사 터에서 충용문으로 이어지는 보드라운 숲 길 주변엔 가까운 두 나무가 합쳐져 한 나무가 된 '연리목' 십여 그루가 줄지어 서 있었다. 연리목은 보통 같은 종이 합쳐지기 마련인데 이 산성의 숲에선 미끈한 피부의 팽나무와 거친 줄기를 가진 물푸레나무가 짝을 이룬 모습이 눈을 휘둥그렇게 한다. 손 꼭 잡듯 하나로 합쳐져 어우러지는 구불구불한 나무들이 사연 많은 이 단단한 산성의 굴곡을 쓰다듬고 있는 듯 보였다.

 

 

 [담양 가사(歌辭) 여행]

 

거든 길지 말거나, 푸르거든 희지 말거나   

 

 
 
  요즘 같으면 카페나 호텔이 들어섰을 경치 좋은 자리에 옛 사람들은 정자(亭子)를 지었다. 담양은 우리 말과 글을 사용해 우리의 느낌을 표현했던 조선 시대 대표 문학인 가사(歌辭)의 중심지로 송강 정철(1536~1593)과 그의 스승 면앙정 송순(1493~1593) 등이 오래 머물며 한글 문학의 '명주실'을 뽑아냈던 곳이다. 이들이 풍류를 즐겼던 정자들은 지형이 변해 옛 모습을 많이 잃었을지언정, 바람 좋고 나무 좋은 옛 문인들의 감성에 기대볼 수 있는 여유를 선물한다.
 
 
 


▲ 구비구비 계곡과 어우러지게 정자와 정원을 만든 소쇄원은 조선 가사문학의 산실이 되었다. 

 

 

오래전 풍경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곳은 한국가사문학관(061-380-3240 ·남면 지곡리 319번지) 바로 옆 언덕에 있는 식영정(남면 지곡리 산75-1)이다. 송강 정철이 담양 성산의 경치를 노래한 '성산별곡'이 탄생한 정자에 서면 해질 무렵 나무 너머 반짝이는 광주호의 풍광이 마음을 씻어준다. '푸른 시내 흰 물결이 정자 앞에 둘렀으니/ 직녀의 좋은 비단 그 누가 베어 내어/ 잇는 듯 펼치는 듯 요란도 하는구나…'('성산별곡' 중) 같은 아름다운 표현이 흘러나올 수밖에 없을 듯하다.



  송강정(고서면 원강리 산1)도 있다. 송강 정철이 4년가량 머물며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을 쓴 정자 주변엔 굵은 소나무들이 오랜 세월을 증언한다. 서울 출신인 정철은 정치적 위기에 몰릴 때마다 담양군 봉산면에 있는 송강(松江)을 찾았다고 전해진다. 송강정과 가까운 면앙정(봉산면 제월리 402)에선 가사문학의 백미라 여겨지는 송순의 '면앙정가'가 탄생했다. '옥천산 용천산 내리는 물이 정자 앞 넓은 들에 올올이 펴지는 듯/ 넓거든 길지 말거나 푸르거든 희지 말거나/ 쌍룡이 뒤트는 듯 긴 비단을 펼쳐 놓은 듯…'('면앙정가' 중) 지금은 앞에 큰길이 뚫려 옛 정취를 찾기 힘들지만 모든 글 쓰는 이들의 무릎을 치게 하는 기막힌 문장이 탄생한 정자에 올라 소리 내어 가사 읽는 여유를 부려봐도 좋겠다.



  한국가사문학관(입장료 1000원)에선 가사 18개를 원문·현대역·해제와 함께 실은 책 '담양의 가사문학'을 5000원에 판매한다. 가사문학관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엔 조선시대 민간 정원의 '대표' 격인 소쇄원(061-382-1071·남면 지곡리 123·입장료 1000원)이 발걸음을 이끈다. 옛 한옥에 등을 기대고 앉으면 '운치 여행'의 여운이 마음을 울린다.

 

* 가는 길 * 
 

◆자가용: 호남고속도로 광주 나들목→88올림픽고속도로 담양 나들목→29번 국도 타고 10㎞쯤 가다 보면 '금성산성' 표지가 나온다.

대중교통: 서울 반포동 센트럴시티 터미널에서 매일 오전 10시10분, 오후 4시10분 담양 가는 버스(성인 편도 1만6200원부터)가 출발한다. 센트럴시티 터미널에서 5~10분 간격으로 출발하는 광주광역시 터미널행 버스(1만6100원)를 타고 광주터미널에 내려서 약 10분 간격으로 출발하는 담양행 버스를 타도 된다.

승일식당(061- 382- 9011)은 숯불에 구어 내주는 숯불 돼지갈비(1인분 9000원)가 유명하다. 식당에 들어서면 줄지어 앉아 양념 돼지갈비를 주물러 굽고 있는 아주머니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덕인관은달콤짭짤한 떡갈비로 유명하다. 담양읍사무소 부근에 있던 본점은 공사 중이고 담양읍 백동리 신관(061- 381- 7882)이 문을 열고 있다.

◆금성산성 부근 담양리조트는 스파 시설과 호텔, 리조트를 겸한 복합 숙소로 인근 숙소 중 가장 고급스럽다. 주중 11만9250원부터, 주말 15만9000원부터. 061- 380- 5000. 담양읍에 있는 그린파크모텔(061- 383- 5858)은 이 부근에 촬영 온 연예인들이 많이 묵은 깔끔한 숙소다.

담양군청 문화관광과 (061- 380- 3154) 

 

 
 
<출처> 2009. 6. 11 / 조선일보 주말매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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