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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 및 정보/- 이탈리아

박해의 현장에서 빛난 성도의 위대한 신앙(카타콤베와 카파도키아)

by 혜강(惠江) 2009. 1. 8.

 

로마의 카타콤베와 터키의 카파도키아

 

박해의 현장에서 빛난 성도의 위대한 신앙 

 

 

글·사진 남상학

 

 

 

 

▲아피아 도로 곁에 있는 무덤 지대

 

 

 기독교에 대한 박해의 흔적을 찾는다면 그 대표적인 것이 로마 인근에 있는 카타콤베(Catacombe)와 터키에 있는 카파도키아(Cappadocia)를 들 수 있다. 내가 카타콤베를 방문한 것은 1994년 10월이었다. 중등교원 유럽지역 교육시찰 연수의 일환으로 유럽 5개국을 방문했을 때, 첫 방문지인 로마를 둘러보는 중에 카타콤베를 방문한 것은 신앙을 가진 나로서는 큰 행운이었다.

 카타콤베는 로마인의 지하 무덤으로 기독교를 공인하기 전에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 지내던 지하 교회나 무덤을 가리킨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듯이, 로마제국이 세계를 지배하던 시대에 로마 제국은 세계의 중심무대였고, 당시 아피아 도로(Via Appia Antica)는 고대 로마의 국도(國道)로서 광대한 지배지로 향하는 구실을 했다.   카타콤베를 비롯한 많은 지하 무덤들은 아피아 도로를 따라 교외에 흩어져 있다.


■로마의 카타콤베 - 성칼리스토의 지하묘지



  로마 시 부근의 아피아 옛 가도(街道)에는 로마 시대에 박해를 받던 초기 기독교도들의 집회장소를 겸한 지하묘지 30여 곳이 산재해 있어 성지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그 중 대표적인 곳이 초기 교황들의 묘지와 성인 체칠리아의 무덤이 있던 산 칼리스토의 지하묘지와 다른 하나는 사도 베드로와 바울의 유골이 안치된 산 세바스티아노 교회의 지하묘지, 그 외에 로마 최대 규모의 도미틸라 지하묘지 등이 있다. 

  지하묘지로 일컬어지는 그리스어 ‘카타콤베’는 ‘낮은 지대의 모퉁이’라는 뜻으로, 로마 아피아 도로에 가까운 성(聖) 세바스티아노 묘지가 두 언덕 사이에 있었기 때문에 3세기에 이 묘지의 위치를 표시하기 위해 이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는데, 16세기에 초기 기독교인들의 지하묘지가 발견되고부터 모든 지하묘지를 통틀어 ‘카타콤베’, 혹은  ‘카타콤’으로 부르게 되었다. 로마의 지하 공동묘지를 형성하고 있는 땅굴의 총 연장길이는 약 900km이며, 300년 동안 약 6백만의 시신이 매장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모든 카타콤베는 각각 고유한 이름을 갖고 있는데, 그 이름들은 카타콤베 안에 있는 성인이나 또는 땅을 희사한 봉헌자들의 이름을 따서 부르는 것이 보통이다. 우리가 방문한 산 칼리스토 카타콤베(Catacombe di San Calisto)는 순교자 교황 성 칼리스토스(217-222)의 이름을 따서 부르고 있었다. 산 칼리스토 카타콤베는 3세기경부터 기독교인들의 공식적인 묘지가 되었으며 현재 보존이 가장 잘된 곳이기도 하다. 

  카타콤베의 역사는 로마제국의 기독교 박해와 직접 관계가 있다. 로마제국 시대에 기독교인들은 많은 박해를 받게 되었다. 초대교회 초기의 선교활동은 로마 근교에 살던 가난하고 신분이 낮은 계층의 사람들에게 주로 행해졌으며, 그들이 살던 지역은 주로 테베레 강 어귀와 아피아 가도 주변이었다. 그런데 네로황제를 비롯하여 10명의 황제가 기독교를 적극적으로 탄압함으로써 네로황제(54)부터 디오클레티아우스(305)년까지 양 250년간 잔인한 피의 복수가 자행되었다.


  이렇게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면서, 신자들은 예전처럼 자유롭게 모임을 가질 수가 없게 되어, 자연히 신자들은 주위의 눈을 피해 로마의 성 밖에서 은밀히 모였는데 그 중에서도 아피아 가도 주변에 많이 있던 지하 무덤이 가장 안전한 은신처가 되었다. 당시 로마법에 따르면 묘지는 신성한 곳으로 여겨 함부로 침범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땅속이라 로마 군인들의 눈을 피하기가 용이하였고, 만일의 경우 발각되었을 때에도 지하 묘소의 통로가 미로처럼 얽혀 있어 피신하기에 이보다 좋은 곳이 없었다.


  그런데 박해가 계속되자 이 은신처는 기독교인들의 삶의 터전이 되었고, 급기야는 신자들의 무덤도 그 안에 마련되면서 지하 무덤, 즉 카타콤베의 면적이 점점 더 늘어나기 시작했다. 따라서 카타콤베는 그리스도인들의 현실적인 피난처였으며,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교회였고, 또한 죽어서도 가까이 있고 싶어 했던 그들만의 보금자리였다. 갈수록 심해지는 모진 박해 속에서 믿음의 공동체인 신자들은 오직 구원자이신 하나님께 의지하는 길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미로(迷路)처럼 얽힌 구조



  산 칼리스토 카타콤바(Catacombe di San Callisto)는 로마의 가장 크고 비중 있는 카타콤베 중의 하나이다. 서기 2세기 중엽에 만들어지기 시작하였으며, 그 규모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대단하다. 지하에 소재하는 묘역(墓域)만도 4만 5천 평에 달한다. 지하에 파놓은 무수한 갱도들이 그물처럼 얽혀져 있는데 이것들을 합하면 대략 20km가 넘는다. 갱도들은 여러 층으로 파여 있어 깊숙하게 들어간 곳은 지하 20m가 넘을 정도이다. 이 카타콤베에는 순교자가 10여명 묻혔고, 교황이 16명이 묻혔으며, 또 이곳에 묻힌 그리스도인들의 숫자는 대략 10만여 명이 된다고 하니 가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거대한 지하 무덤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이 의문은 가이드의 설명으로 쉽게 이해가 되었다. 이곳의 토양이 응회질이어서 부드러워 맨손으로도 얼마든지 파낼 수 있고, 일단 공기가 닿으면 시간이 흐르면서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지는 특수한 토양이기 때문에 토양이 공기와 맞닿아 응회암으로 응고되는 과정에서 시체의 썩는 냄새와 썩은 물을 완벽하게 흡수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산 사람들이 지하 묘소 속의 지하도를 팔 수 있고, 그 지하도를 왕래하며 피신하기도 용이했다. 더욱이 죽은 자의 시체가 안치된 벽감 앞 혹은 아래에서 가족들이 죽은 자를 기리며 거리낌 없이 음식을 나눌 수도 있었던 것이다.

   이 카타콤베 지하 묘소는 지하 6층까지 있고, 여러 구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하 10∼15m의 깊이에 대체로 폭 1m 미만, 높이 2m 정도의 통랑(通廊)을 종횡으로 뚫어 계단을 만들고 그 계단이 여러 층으로 이어져 있다. 모든 길이 미로(迷路)로 되어 있어 가이드가 없으면 길을 잃기 십상이다. 조그마한 통로 양쪽 벽에 시신 하나가 들어 갈만한 정도의 구멍이 층층이 패여 있었는데, 넓은 방처럼 되어 있는 곳은 지도자급 성인들의 묘실로 되어 있고, 유리 상자 안에 뼈만 남은 전시물도 있었다. 또 통랑의 벽면에 시체를 두는 벽감(壁龕)을 일정한 규칙으로 설치하였는데, 어떤 곳은 가족묘도 있다. 

  지하 묘지는 깊이 내려 갈수록 묻힌 사람들의 연대가 가깝다. 루치나 경당, 교황들의 구역, 성체칠리아 구역은 가장 오래되었고(2세기) 핵심적인 곳이다. 다른 구역들에도 명칭이 붙어 있는데 성밀티아데스 구역(3세기 중엽), 성가이오와 성에우세비오 구역(3세기 말), 서부 구역(4세기 전반기), 리베리오 구역(4세기 후반기: 중요한 경당들이 많이 모여 있는 구역이기도 하다) 등이다.

  교황들의 경당이 있는 곳은 이 카타콤바에서 가장 성스럽고 가장 중요한 장소이며, 9 명의 교황이 묻혔으며, 그리고 3세기 교회의 고위성직자 8명도 함께 묻힌 것으로 추정되므로 일명 "작은 바티칸"이라고도 불린다. 경당의 사방 벽에는 다섯 교황의 비석이 그리스어로 새겨져 있었고 그 원문이 지금도 남아있다. 네 개의 비석을 보면 교황의 이름 옆에 "주교"(EPISCOPOS)라는 칭호가 붙어 있는데, 교황을 로마 교회의 수장으로 간주하였기 때문이며, 두 비석에는 그리스 문자로 MPT(순교자)라는 약어가 함께 새겨져 있다. 


  교황들의 경당 바로 곁에 성체칠리아 경당이 있는데 이 성녀는 음악의 수호성인으로 사람들에게 떠받들어지고 있다. 로마 귀족 가문 출신으로 3세기에 순교하였다. 성녀의 석상이 있는 바로 그 자리에 매장되었으며, 성녀의 석상은 1599년 조각가 마데르노(Maderno)의 유명한 작품을 모사한 것이다.

  사방벽이 벽화와 모자익으로 치장되어 있었다(서기 9세기초의 작품). 석상 가까운 벽에는 성체칠리아의 고대 화상이 있는데 기도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그보다 약간 아래 조그만 벽감에는 구세주가 그려져 있으며 손에 복음서를 들고 있는 모습이다. 채광창의 벽 한 곳에는 세 순교자의 영상이 벽화로 그려져 있다. 

  사각형 벽감 묘혈이 무수히 파진 거대한 갱도들을 몇 개 지나면 다섯 개의 작은 방, 그야말로 가족 묘지가 다섯 군데 나오는데 이곳을 "성사들의 방"이라고 부른다. 그 벽화 때문에 각별한 비중을 갖는 장소이다. 벽화들은 3세기 작품으로 추정되며 세례와 성찬의 성사를 상징적으로 표상하고 있다. 그곳에는 부활의 상징으로서 요나 예언자도 그려져 있다.   

  지하묘소에는 양들에게 에워싸인 착한 목자 그리스도를 표상하는 벽화가 있을뿐더러 세례와 성찬의 성사를 상징하는 성서 일화들도 그려져 있고, 다른 곳에는 성찬의 상징으로 물고기 두 마리와 광주리에 담긴 다섯 개의 빵이 그려져 있다. 이곳에 남겨진 원시 기독교 예술 - 즉 벽화, 조각, 그림, 형상을 통해서 예술사적인 관점에서 고대 이교미술(異敎美術)과 중세 그리스도교 미술의 변천과정을 살펴볼 수 있게 한다. 


  실제로 카타콤베 속으로 들어가 옛날 시체가 안치되어 있던 층층의 벽감들 사이 지하도를 걸으면서 필자는 그 웅대한 규모에 압도당할 수밖에 없었다. 입구에 들어설 때만 해도 무덤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불길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신앙적인 경건(敬虔)함이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리스도 교도들이 숨어 지냈던 지하무덤 카타콤베. 카타콤베야말로 그리스도교 초기의 교회가 순교자들의 교회였고, 일상생활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사랑을 실천하고 증언한 진정한 그리스도인들로 이루어진 교회였음을 보여주는 역사적인 증거물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카타콤베 관광의 핵심은 무엇보다도 로마제국의 박해를 무릅쓰고 종교적 신앙을 수호하며 살았던 그들의 확신에 찼던 신앙열정과 아름다운 순교정신을 배우는 데 있다.

 

 



■터키의 카파도키아 - 기암괴석(奇巖怪石)의 동굴 교회

 

 

  이탈리아 로마에 카타콤베가 있다면 터키의 카파도키아에는 기암괴석(奇巖怪石)의 동굴 교회와 거대한 지하 도시가 있다. 내가 카파도키아를 탐방한 것은 2002년 8월, 학교에서 함께 근무한 선생님들, 그리고 그 가족들과 함께 진행되었다.


  여행 계획은 이스탄불을 비롯하여 에게 해안을 따라 터키 서부에 펼쳐 있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버가모 교회, 서머나 교회, 에베소 교회, 라오디게아 교회 등)와 이즈미르의 폴리캅 기념교회를 중심으로 남쪽 방향으로 진행되었고, 다시 터키 남부의 앗시리아와 콘야를 거쳐 터키 내륙 중앙부에 있는 카파도키아까지 10일간의 여행으로 진행되었다. 다행히 이 지역은 사도 바울의 전도여행과 밀접한 지역이어서 성지순례의 성격이 짙었고, 카파도키아 지역은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 살던 지역이어서 여행을 마무리하기에 아주 좋았다.

  카파도키아는 터키의 수도인 앙카라에서 남쪽으로 300Km 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카파도키아란 지명은 기원 전 이곳에 있던 카파도키아 왕국의 이름을 딴 것인데, 이곳의 특징은 기암괴석의 동굴교회와 땅속에 펼쳐진 거대한 지하도시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기괴한 요정의 나라’라고 불리는 이곳은 마치 동화 속에서나 볼 수 있음직한 갖가지 모양의 기암괴석들이 드넓은 계곡지대에 펼쳐져 있다. 황량하고 황폐한 지형에 원추형과 버섯모양의 기괴한 암석들이 즐비하게 서 있고, 그 속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교회가 형성되어 있어 자연과 인간의 능력에 대해 놀라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카파도키아는 6천만 년 주변의 예르지예스산(3917m)과 하산 산의 화산활동으로 형성되었다. 활화산에서 분출된 화산재는 세월이 지나면서 응회암이란 암석으로 굳어졌고, 오랜 세월 계속된 풍화작용으로 이 암석은 부드럽고 쉽게 깎이는 습성 때문에 마치 거대한 버섯 같은 기이한 모양으로 변하게 되었다.  특히 젤베 계곡에 있는 돌기둥은 그 모습이 괴기하여 요정의 굴뚝이라고도 불린다. 이곳의 돌기둥은 아래가 넓고 위로 올라갈수록 가늘어 지면서 한 덩어리의 현무암이 모자를 씌워놓은 것과 같은 모습으로 놓여 있어 현무암이 얹혀 있는 돌기둥의 모습은 남근(男根)을 연상하게 한다.   

  원추형의 돌기둥은 평균 30m의 높이로 늘어서 있는데 이런 돌기둥에는 여러 개의 구멍이 나 있다.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지형은 거주지로서 편리한 점이 많았다. 지형을 이루고 있는 응회암은 암석이라고는 하나 쉽게 깎이는 탓에 거주공간이 좁다 생각될 경우 주변의 돌을 더 파내기만 하면 되었을 뿐 아니라 덥고 건조한 기후를 피할 수 있고, 여름에는 더위로부터 그리고 겨울에는 한파로부터 보호해주는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었다.

  구멍을 통하여 돌기둥 안으로 들어가 보면 오래전부터 삶의 터전을 마련한 흔적이 있는데, 바로 이곳이 로마의 카타콤베와 같이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숨어 살면서 기도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역사적으로 볼 때 카피도키아에 지하 동굴을 처음 파기 시작한 것은 기독교인들이 아니었다. 기원전 1200년 경에 이타이트 제국이 멸망하자 소아시아 반도는 암흑기로 접어들면서 여러 왕국이 세력을 확장하기 위하여 각축전이 벌어졌고, 그 이후에 수많은 왕국의 교체가  진행되면서 전쟁 패잔병들이 이곳 토굴에 은신해 살아왔다. 그 후 기독교인에 대한 로마 제국의 박해가 심해지자 소아시아를 비롯한 각 지역의 기독교인들이 대거 몰려옴으로써 오늘의 역사적 현장을 만들었다. 

  바위를 깎아 만든 이들의 거주 공간은 쉽게 적들에게 노출되지 않아 종교탄압시기에 기독교인들의 훌륭한 피난처가 되었다. 이러한 응회암 집의 입구는 대부분 지상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쉽게 옮길 수 있는 사다리나 밧줄을 통해 올라갈 수 있게끔 되어 있다. 많은 그리스인들은 이곳에 자신들의 거주지 이외에도 교회와 지성소, 사원들을 만들어냈다.  


  일설에 의하면, 카파도키아의 동굴교회는 일반교회가 아니라 한때 이곳에 영향을 미친 수도원 운동의 일환으로, 초기 기독교인들이 이곳 동굴교회에서 수도생활을 했을 것이라는 설도 있으나, 아무튼 이곳에는 수도원과 교회들이 1,000여 개가 넘고, 성화가 그려져 있는 교회만도 150여 개가 된다고 한다. 

  석굴 교회군이 있는 괴뢰메 계곡은 천연의 자연 조각품(?)을 감상하기에 좋은 곳이다. 좁은 계곡 양측의 절벽에 많은 암굴들이 뚫어져 있고, 암굴과 암굴은 좁은 통로로 서로 이어져 있다. 이들 암굴 속에는 프레스코와 성화들이 교회마다 장식되어 있다. 이 지역에 이슬람 세력이 들어오면서 동굴교회 내 사람 손이 닿는 부분의 성화는 아예 없어졌거나 훼손된 것이 많으나, 토칼르 교회 같은 곳은 거의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다.


  사과교회, 집시교회, 성바르바르 교회 등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공생애의 기적들, 최후의 만찬, 유다의 배반, 십자기의 죽음과 부활 등이 그려져 있다. 천정 모퉁이에는 성경 기록자들의 성화도 그려져 있다. 카파도키아 동굴 교회의 내부의 이들 회화들은 비잔틴 예술의 보고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중요한 유산이다.  필자가 여행해 온 에게해 지역의 초대 일곱 교회가 실체가 없는 영적인 교회인데 반해, 이곳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남긴 교회의 현장이다.

  

 

 

 

지하 20층의 거대한 지하도시 - 데린쿠유



 버섯모양의 기암괴석으로 장관을 연출하고 있는 카파도키아를 더욱 경이롭게 하는 또 하나의 요소는 데린쿠유와 카이막클르에 있는 지하 20층의 지하도시이다. 최대 3만 명까지도 수용이 가능하다고 하니 그 규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곳의 형성시기에 관한 정확한 자료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히타이트 시대 즈음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이 지역 주민들은 AD 7세기부터 끊임없이 출정하는 군대의 위협 하에서 때로는 이곳 자연 동굴을 그들의 은신처로 삼기도 했지만, 로마의 기독교 탄압을 피해 쫓겨 온 기독교도들이 이곳에 정착하여 교육기관과 교회, 와인 저장고 등을 축조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거대한 지하 도시를 건설했다. 작은 규모의 마을부터 거대한 도시에 이르기까지 총 40여개에 달하는 거주지가 발굴되었으나 오늘날 일반인에게는 소수만이 공개되고 있다. 

  이 중에서도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곳 중 하나가 데린쿠유 지하도시이다. 이 지하 도시는 용암재가 굳어진 약한 사암(砂巖)을 일일이 쪼아가며 파들어 간 인공 동굴이다. 피난민들이 늘어날수록 더 넓은 공간이 필요하게 되자 옆으로 혹은 지하로 계속 파 들어가 복잡한 미로(迷路)를 형성한 것이다. 지하 120m까지 내려가는 지하 도시는 12층이나 관광객의 안전을 위하여 8층까지만 공개하고 있는데, 무려 1,200여개의 방이 있다. "깊은 우물"이라는 뜻인 데린쿠유는 1965년에 처음 일반인에게 공개되었으나 실제로 관람할 수 있는 구역은 총 면적의 10%에 지나지 않는다. 위험이 닥쳤을 때 이 지하 은신처는 10,000명 이상이 피할 수 있는 도피처였다. 

  지하 도시의 통로 입구는 연자방아 모양의 커다란 둥근 돌로 막혀 있는데, 이 돌은 내부에서는 쉽게 열리지만 외부에서는 열려고 해도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외적의 침입을 차단하기 위해 설치한 돌들은 통로 중간 중간에 설치되어 있다고 한다. 허리를 굽히고 땅 속으로 난 좁은 통로를 들어서자 다른 세계가 나타난다. 바깥은 한여름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데, 지하에는 냉기가 몸을 식혀 준다. 안내자를 따라 지하로 혹은 옆으로 계속 파 들어간 복잡한 미로를 따라 가면 용도가 다양한 공간들이 나타난다. 미로처럼 얽혀있는 좁다란 통로 곳곳은 무너져 내린 곳도 많지만 놀랍게도 내부의 환기시설은 아직도 잘 작동하고 있다.

  지하 1층과 2층에는 돌로 만든 두개의 긴 탁자가 놓여져 있는 식당을 비롯하여 부엌, 지하수를 식수로 사용하는 우물, 축사, 곡물 창고, 포도주 저장실 등이 위치하고 있다. 3, 4층에는 거주지와 교회, 신학교, 병기고 등 완전히 도시 기능을 갖춘 것이다. 교회는 초대교회 시절 기독교인들이 지하에 숨어서 예배를 드렸던 곳으로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지하도시에 신학교까지 있는 것을 보면 피난 생활이 장기화할 것에 대비하여 장차 교회 지도자들을 양성하려 한 것이다.   

  신학교에서 우리 일행은 동행한 교목(校牧)의 인솔로 자연스럽게 간단한 예배를 드렸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 하노니,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롬1:6)”라는 말씀을 중심으로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순교열정을 말씀해 주셨다. 그리고 소리 높여 찬양을 불렀다. “환난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 이 신앙 생각할 때에 기쁨이 충만하도다 …”복음을 위하여 갖은 고초를 겪었던 역사의 현장 신학교에서 앞서간 성도들을 기리며 부른 찬송 소리는 더욱 힘차고 은혜로웠다.    

  또 이 지하도시에는 긴급히 다른 도시로 피신할 수 있는 지하터널이 9㎞ 뚫어져 있다. 그런데 이 지하도시에는 괴뢰메 계곡과는 달리 일체의 성화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기독교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그리고 지하 감옥 및 묘지는 더 아래층에 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지하 도시로 쫓겨 살다 여기서 죽어갔던 사람들의 무덤 앞에 서니 가슴이 떨려온다. 초대 성도들의 굽힘 없는 절개의 믿음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커다란 교훈을 던져 준다. 비록 순교를 당한 건 아니지만, 성도의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환난과 핍박을 견디다 죽은 영혼들 앞에서 나의 존재는 무엇인가.   

 

 

 

 

 

  예수의 탄생부터 시작된 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초대 예루살렘 교회를 비롯해서 교회 역사에 끊임없이 크고 작은 핍박이 있어 왔다. 기독교에 대한 로마제국의 박해는 주후 64년에 네로 황제에 의하여 처음 일어났다. 도미티아누스 황제 치하(주후 81-96)에서 상황은 또 심각해졌다. 로마제국의 박해기간동안 핍박을 견디지 못하고 배교한 사람도 많지만, 헤드마스(Hermas),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Ignatius), 서머나의 폴리갑(Polycarp) 등은 순교의 길을 택했다.

  기독교는 처음부터 핍박을 받고, 그 속에서 자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초대 1세기와 2세기의 박해 그리고 수세기 동안 온 세계를 돌면서 복음은 수많은 순교자를 만들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기독교는 많은 핍박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가 되어 교회는 꾸준하게 성장하였다. 핍박이라는 기독교 장애물이 오히려 기독교를 성장시키는 수단이 되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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