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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조선일보 사랑시

사랑시[24] : 원시(遠視) -오세영

by 혜강(惠江) 2008. 10. 18.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詩)] [24]
 
                         원시(遠視) - 오세영

 

 

 

                                       

                                        ▲ 일러스트=이상진

 

 

                                멀리 있는 것은 아름답다.
                                무지개나 별이나 벼랑에 피는 꽃이나
                                멀리 있는 것은
                                손에 닿을 수 없는 까닭에
                                아름답다.
                                사랑하는 사람아,
                                이별을 서러워하지 마라,
                                내 나이의 이별이란 헤어지는 일이 아니라 단지
                                멀어지는 일일 뿐이다.
                                네가 보낸 마지막 편지를 읽기 위해선 이제
                                돋보기가 필요한 나이,
                                늙는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멀리 보낸다는
                                것이다. 
                                머얼리서 바라볼 줄을
                                안다는 것이다.

                                   <1992년>

 

 

 <해설> 닿을 수 없는 까닭에 아름다운 사람아

  - 김선우·시인
 

   '나이 듦'을 스스로 인정하게 되기까지 넘게 되는 고비가 있다고 한다. 한동안은 자신의 원시(遠視)를 감추게 된다고. 눈앞이 가물거려도 깨알 같은 글씨로 쓰인 레스토랑 메뉴판을 멀찍이 들고 보는 일 같은 건 절대 하지 않는다는 것. 그렇게 갈등하는 시기를 지나다 보면 어느 순간 자신의 '나이 듦'을 인정하게 되는 때가 오는데, 이제 돋보기가 필요하겠다고 앞에 앉은 사람에게 솔직히 털어놓게 된단다. 그리고 말한다. '젊은 척' 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부터 얼마나 편안한지 모르겠다고! 나이 든 내 언니들 얘기다.

  사랑은 아름답지만 젊음에 집착하는 것은 아름답지 않다. 세월을 막을 수 있는 육체는 없다. 반면에 청춘의 시절엔 절대로 알 수 없는 세계가 나이 들면서 펼쳐진다는 측면에서 인생은 영원한 미지다. 오세영 시인은 나이 들며 생기는 이 새로운 미지를 원시(遠視)라는 키워드로 사뿐히 들어올린다. 그리하여 시인에겐 조금 멀어지는 일이 이별이다. 그것은 손에 닿을 수 없는 까닭에 아름답다. 무엇이든 내 손안에 쥐고 있어야 안심하는 젊음으로부터 여러 걸음 떨어진 뒤안길에서 손에 닿지는 않지만 내 손끝에서 악기가 되어 울리는 사랑. 이렇게 여러 겹의 무늬로 인생이라는 긴 여행의 벗이 되는 사랑은 참으로 신비이지 않은가. 

   이 시 〈원시(遠視)〉는 지금까지 17권의 시집을 낸 시인의 여섯 번째 시집 《꽃들은 별을 우러르며 산다》에 실려 있다. 지천명의 나이에 출간된 아름다운 연시집인 이 시집의 서문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다. '완전한 삶이란 무엇일까. 나는 아직 모른다. 그러나 내게 있어 시가 그에 가까워지려는 노력의 소산인 것은 분명하다. 나는 또한 그것이 사랑 같은 것의 토대 위에서 이루어지는 어떤 정신적 가치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사랑'이라고 말하지 않고 '사랑 같은 것'이라고 쓰고 있는 시인의 마음을 헤아려본다. 원시(遠視)의 여유와 지혜. 내 식대로 단정 짓지 않고 '머얼리서' 바라보는 원시의 원숙함이 평생토록 시작(詩作)과 함께 시론을 탐구해온 그에게서 오롯이 드러난다.

  한 잔의 차를 마시며 헤어짐을 생각하는 시인의 눈에 '무지개'며 '별'이며 '꽃'들이 가물가물 흔들린다. 시인의 눈동자에 잔잔히 피어오르는 일몰은 누가 보낸 편지일까. 김명인 시인은 오세영 시인을 가리켜 '은근한 댄디'라 했다. 김승희 시인은 '무아의 바람 속을 달리는 보헤미안'이라 했다. 이제 꿈꾸는 가을은 스스로 저만치 멀어져서 꿈꾸는 가을이며, 이별은 멀리서 껴안아보는 이별이다. 이별은 노시인의 연인이 되어 가슴에서 달 가듯이 함께 간다. '이별을 서러워하지 마라'고 시인이 어깨를 툭 친다. 따뜻한 거리, 원시의 총총한 눈도장들!

 

<출처> 2008. 10. 18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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