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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조선일보 사랑시

사랑시[23] : 질투는 나의 힘 - 기형도

by 혜강(惠江) 2008. 10. 18.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詩)] [23]
 
                   질투는 나의 힘 - 기형도

 

 

                     

                      ▲ 일러스트=클로이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1988년>

 

 

      <해설> 유일하게 남은 희망이 '질투'라니!

           - 장석남·시인·한양여대 교수  

 

 

   저녁 거리에 서서 물끄러미 추억을 바라본다. 오래 된 책을 펼칠 때 툭 발등으로 떨어져 내리는 것을 만난 적 있을 것이다. 그곳엔 오래 전, 그러니까 지금보다 훨씬 눈이 밝았을 때, 지금보다 훨씬 외로웠을 때, 지금보다 훨씬 미숙했을 때의 자화상이 들어있게 마련이다. 사랑하던 사람이 하나쯤 그때 모습 그대로 어룽거리며 걸어 나온다. 그 중 십중팔구는 지금은 만날 수 없는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이미 화석이 된, 그 가슴 에이는 '사랑의 시간'을 미리 떠나가서 뒤돌아보는 시가 바로 이 시다. 그는 죽음을 미리 예감한 것만 같다.

  '사랑'이란 말은 생각의 양, 즉 '사량(思量)'의 변형이라는 설이 있다. 기형도(1962~1989)는 마음에 상념이 얼마나 많았으면 '공장을 세웠'다고 했을까. 사랑이 아니라면 그만한 상념일 수는 없으리. 그러나 그 '너무나 많은 공장'의 생산물들을 기록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왜냐하면 '탄식'만을 남겼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남은 희망이 '질투'라니! 잔인하다. 질투만 없어도 사랑은 얼마든지 할 만한 것 아니던가! 질투는 그래서 사랑의 저주일지도 모를 일. 이 질투를 앓는 자, 지금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 두었다. 그 청춘이 얼마나 긴 그림자를 남겼는지는 여백에 속한다.

  기형도의 유품 중 어느 책갈피엔가 지금도 이러한 글귀가 적힌 쪽지가 꽂혀 있을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릿하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인생은 사랑을 찾아 헤매다 죽는 것인가? 아마 그럴 것이다. 그 사랑의 농도를 열정이라 하리라. 그는 침침한 심야의 극장에서 그만 청춘의 마지막 숨결을 놓아버렸다. 사후에 나온 유일한 그의 시집은 이후 90년대에 등장하는 젊은 시인들에게 강력한 자기력을 띤 것이기도 했다.

  "너 좋아하던 시인이 죽었대…." 신경숙 선배의 더듬거리는 전화 목소리가 들려오던 그 가을날의 스산한 오후가 엊그제 같다. 기형도 시인은 태생지가 내 이웃의 섬이어서 친연성이 있었던지 내 시를 유심히 읽어주고 격려해주던 고마운 선배였다. 인사동의 한 카페에서 한 달에 한 번 열렸던 시 합평회가 끝나면 우리들은 돌아가면서 노래를 불렀다. 우리 모두 가난한 손님들이었던 시절 듣던 그의 노랫소리는 이후로도 오랫동안 마음을 먹먹하게 했다.

  그날 저녁 적십자 병원 영안실의 차디찬 형광불빛을 빠져나오며 나는 한없는 아쉬움에 가슴이 조였다. 따져보니 내년이 20주기다. 유서와 다름없는 그의 마지막 시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빈집〉). 어느 침침한 술집에 들어 촛불이라도 켜놓고 읽어야 하리라.

 

<출처> 2008. 10. 17 / 조선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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