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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조선일보 사랑시

사랑시[18] : 서울역 그 식당 - 함민복

by 혜강(惠江) 2008. 10. 11.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18]

 

                              서울역 그 식당 - 함민복

 

 

                        

                          ▲ 일러스트=이상진

 

 

 

                     그리움이 나를 끌고 식당으로 들어갑니다
                     그대가 일하는 전부를 보려고 구석에 앉았을 때 
                     어디론지 떠나가는 기적소리 들려오고
                     내가 들어온 것도 모르는 채 푸른 호수 끌어
                     정수기에 물 담는 데 열중인 그대
                     그대 그림자가 지나간 땅마저 사랑한다고
                     술 취한 고백을 하던 그날 밤처럼
                     그냥 웃으면서 밥을 놓고 분주히 뒤돌아서는 그대
                     아침, 뒤주에서 쌀 한바가지 퍼 나오시던
                     어머니처럼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마치 밥 먹으러 온 사람처럼 밥을 먹습니다
                     나는 마치 밥 먹으러 온 사람처럼 밥을 먹고 나옵니다

 

 

 

<해설>  그대 그림자가 지나간 땅마저 사랑합니다
             - 김선우·시인

 

  함민복(46) 시인이 강화도에 들어가 산 지 10년이 넘었다. 이제 시인은 동네의 어부 형님들을 따라다니며 철마다 다른 이름의 물고기를 잡고 뻘 낙지를 잡아 낮술도 할 줄 아는 어민 후계자 시인이 되었다. 다행이다. 그는 가난하다. 그런데 그의 가난은 춥고 궁핍한 느낌보다 어쩐지 다른 사람에게 위로가 되는 '따뜻한 가난'의 느낌을 풍긴다. 시인의 가난이라 그런 것일까.

 

  가령 이런 얘기는 어떤가. 1998년 무렵. 그가 문화관광부에서 주는 '오늘의 예술가상'이라는 상을 하나 받았다. 상금이 500만원인, 당시로는 제법 쏠쏠한 상이었다. 참말 오랜만에 거금을 쥐어보게 될 시인은 내심 들떴으리라. 그런데 이게 웬걸! 마침 IMF한파를 맞았던 그 해에만 상금이 사라져 버렸다. 상금 대신 트로피를 주었다는데, 그 트로피 조각상이 청동인지 돌인지 하여간 엄청 무거웠다고 한다. 상금 없이 달랑 트로피만 주어졌으니 그 마음이 오죽했을까. 무거운 트로피를 들고 이 술집에서 저 술집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시인은 내내 중얼거렸다. "이 무거운 게 쌀 가마니였으면 얼마나 좋아!"


  눈물 나는 얘기를 들으면서도 결국은 빙긋이 웃게 되는 일들과 시인은 인연이 많다. '서울역 그 식당'과의 인연도 그렇다. 그대를 보려고 식당 구석에 앉아있는 시인. 그대가 가져다 준 밥. 시인은 '마치 밥 먹으러 온 사람처럼 밥을 먹고' 나온다. 그대가 어떤 그대인가. '그대 그림자가 지나간 땅마저 사랑한다'고 시인이 고백했던 그대다. 그런 그대가 밥을 가져다 주었으니 나는 그저 밥을 먹고 나온다. 술을 가져다 주었으면 술을, 상처와 고독을 한 양푼 가져다 주었으면 상처와 고독을 그저 달게 받았으리. 사랑하는 그대가 내게 주는 것이므로! 가장 함민복스러운 '긍정의 힘'이 '서울역 그 식당'에도 뻗어 있어 슬그머니 미소가 떠오른다.

 

  '시 한 편에 삼만 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 시집이 한 권 팔리면/ 내게 삼백 원이 돌아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굵은 소금이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긍정적인 밥〉)



  그의 초기시들엔 반생명, 비인간적인 자본주의 현실에 대한 불안, 공포, 분노가 번뜩인다. 독설도 마다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런 그가 강화도 사람으로 10년 넘어 살고 나니 부드럽고 강인한 갯벌의 침묵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그는 이제 날 선 절규 대신 조용한 침묵으로 시를 짓거나 침묵에 가깝게 노래한다. 부드러운 수평을 유지하며 스스로를 지켜가는 갯벌처럼. 갯벌에서 하루 종일 반죽을 개며 노는 그에게서 '말랑말랑한 힘'을 가진 시들이 '쌀 가마니처럼' 쏟아졌으면!

 


<출처> 2008.10.11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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