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국내여행기 및 정보/- 인천. 경기

경기 여주 ‘강변 여행’ - 가을빛 정취, 내 마음 강물되어 흐르네

by 혜강(惠江) 2008. 10. 8.

 

경기 여주 ‘강변 여행’

 

고요한 물빛, 가을빛 정취, 내 마음 강물되어 흐르네

 

 

문화일보 박경일 기자

 

 

 

▲ 해가 지고 어둠이 강변의 숲을 서서히 빨아들일 무렵, 흰뺨검둥오리 한 마리가 경기 여주시 강천면 적금리 남한강변의 고요한 연못에 내려앉았다.

 

 

▲ 경기 여주군 강천면 굴암리의 남한강변에서 뜻밖에 마주친 드넓은 잔디밭. 골프장용 잔디농사를 짓는 곳이라는데, 진초록 잔디가 나무들과 그림처럼 어우러졌다.

 

 

  푸드득. 인기척에 놀란 물오리떼들이 일제히 박차고 오릅니다. 우수수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위로 날아오르는 물오리 울음소리가 강변을 가득 메웁니다. 강원도 횡성을 휘감으며 흘러들어온 섬강과 충북 충주의 물길을 따라온 남한강이 하나로 만나는 합수머리. 이곳은 강물이 소리죽여 부드럽게 흘러가는 남한강변입니다. 경기 여주군 강천면 적금리, 굴암리, 강천리…. 섬강과 남한강이 함께 몸을 섞으며 휘감으며 돌아나오는 마을들입니다.

  마을 이름이야 처음 듣는 곳이겠지만, 늘 지나다니던 곳입니다.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강원도 땅으로 들어서기 직전, 남한강교에 올라 오른편으로 고개를 돌리면 펼쳐지는 운치있는 강변마을이 바로 그곳입니다. 어떤 때는 이른 새벽 강 안개 사이로 물오리떼들이 날아올랐고, 또 어떤 때는 황혼무렵 석양을 배경으로 왜가리들이 돌아오곤 했습니다. 고속도로를 지날 때마다 ‘언제고 한번 가봐야지’하고 벼르며 마음 속에 점찍어 놓고 아껴뒀습니다. 아무래도 강변 풍경은 가을날이 가장 좋겠지요. 그렇게 찾아간 길이었습니다.

  갈대와 억새가 하얗게 피어난 그 강변에 들어섰을 때 깜짝 놀랐습니다. 길가에는 억새와 가을꽃들이 피어났는데, 강변에 저절로 만들어진 제법 운치있는 연못과 습지에는 물오리떼들이 유유히 떠있습니다. 강물은 조용히 흘러가며 반짝거렸습니다. 남한강에서 아직까지 이런 정취가 남아있으리라고는 전혀 믿지 않았습니다. 강변을 따라 무성한 억새밭이 펼쳐진 길을 타박타박 걸어보았습니다.

  우리 강의 원형이 이랬을까요. 내친 김에 남한강에 배를 띄워 건너던 나루터를 찾아봤습니다. 원주의 장날에 소를 팔러갈 때, 땔나무를 구하러갈 때, 또 등교와 출근길에 사람들을 태우고 강을 가로질렀던 목선들의 흔적을 찾아갔습니다. 다리가 놓이고, 길이 좋아지면서 지금은 자취도 없어지고 말았지만, 남한강의 옛 나루터에는 정취가 남아있었습니다. 부구리나루에서는 마치 수석을 뿌려놓은 듯한 기암괴석과 마주쳤고, 나루에서 마치 아직도 홀로 나룻배를 기다리는 듯 우뚝 선 느티나무도 만났습니다. 그 중에서 나루는 불과 9년 전인 1999년까지도 배를 띄웠던 곳이랍니다.

  여주를 감고 도는 이호리에서 양화나루까지의 남한강을 여강(麗江)이라고 했고, 또 단강(丹江)이라고도 했답니다. 단강이란 섬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강천리 부근의 야트막한 산 자산(紫山)에서 따온 이름입니다. 자산의 그림자가 잠겨있는 물속에는 천도복숭아가 달린 나무들이 가득 했다는데, 사람들이 신선들의 양식인 복숭아를 따먹으면 신선이 된다 해서 욕심을 내다가 빠져죽었더랍니다.

  여주에서는 또 남한강을 끼고 있는 신륵사에 ‘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라’던 고려말 고승 나옹선사의 자취가 남아있고, 폐허가 돼버린 절집터 고달사지에는 한번 보면 잊히지 않을 정도로 웅장한 기상과 화려함이 느껴지는 두 개의 부도가 남아있습니다. 또 우암 송시열이 효종대왕릉을 바라보며 밤늦도록 목놓아 울었다는 터에 세워졌다는 대로사는 다들 지나치는 곳이지만, 따로 시간을 내서 찾아가볼 만합니다. 이렇듯 여주에는 강이 품고 있는 정취와 쓸쓸한 역사가 남아있습니다. 가을날의 여정으로는 더할 나위 없는 곳이지요.

 

 

잊힌 옛 나루 따라 쓸쓸한 고달사지에 오르다

 

 

▲ 여주를 대표하는 명소가 신륵사라면, 신륵사를 대표하는 곳은 바로 남한 강변에 세워진 정자 강월헌이다. 강월헌에 오르면 돛배가 떠있는 남한강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여강의 굽이굽이 산이 그림같아서 / 반은 단청같고 반은 시와 같네….”



여주 땅의 아름다움을 이만큼 잘 표현해낸 시가 또 있을까. 고려말 명문장가 목은 이색은 자신의 고향 땅인 여주를 이렇게 읊었다. 이 시구절대로 여주의 여강(남한강)일대는 가을이 깊어가는 지금 단청같은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여주가 보여주는 단청색은 갓 칠한 화려한 것이라기보다는, 세월에 군데군데 벗겨지긴 했으되 나무결이 드러나는 정갈한 느낌이다.

여주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곳이 바로 강변의 풍경이다. 여주의 읍내쪽의 강변 풍경은 시멘트로 다져진 도회적인 느낌이지만, 영동고속도로 남한강교 아래쪽에는 손대지 않은 강변의 정취가 그대로 남아있다. 옅은 안개와 관목 숲, 그리고 하늘하늘한 억새로 뒤덮인 강천면 적금리와 굴암리, 강천리 일대의 강변에는 아침 저녁으로 물오리와 왜가리떼들이 날아드는 습지와 강변의 풍경이 있다. 이색이 시로 그려낸 여강의 풍경이 아마도 이런 모습이었으리라.

남한강교 아래 적금리에는 강이 넘쳐서 만들어놓은 제법 큰 못이 남아있다. 못 주변은 거친 흙길들이 이리저리 나있다. 나무데크로 짜여진 반듯한 산책로는 아니지만, 이런 거친 길을 걸으면 강변의 정취와 가을의 기운을 만끽할 수 있다. 저물녘 노을이 물든 하늘을 낮게 날아와 연못으로 내려앉는 오리떼의 모습은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강변을 끼고 있는 마을 굴암리도 강변마을의 정취가 그만이다. 굴암리에서 강변으로 들렀다가 너른 잔디밭이 펼쳐진 이국적인 풍경을 만났다. 인근의 골프장에 납품할 잔디 농사를 짓는 곳이라는데, 진초록의 잔디가 우뚝 선 느티나무와 어우러져 마치 외국의 공원과도 같은 낭만적인 느낌이다.

여주를 끼고 있는 남한강변에서 으뜸으로 꼽는 풍광이 바로 점동면 삼합리 대오마을 부근이다. 대오마을에는 폐선이 된 옛 나룻배가 남아있는 창남나루가 있다. 한때 원주 장날이면 소를 30마리 이상 실어나르기도 한 큰 나루였다는데, 지금은 그때의 영화를 찾아볼 길이 없다.

내친 김에 사라진 남한강변의 나루터를 돌아본다. 영동고속도로 남한강교 부근의 우만이나루는 1972년 여주 일대를 휩쓴 대 홍수로 나루터가 다 사라진 곳이다. 우만이 나루터에는 마치 아직도 나룻배를 기다리는 듯 수령 300년이 넘은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성성하게 가지를 뻗고 서 있다.

여주의 남한강변 나루터 중에서 가장 빼어난 곳이 단현리의 부라우나루다. 부라우나루는 강변으로 돌출한 바위가 거센 강물을 막아줘서 주변의 물살이 잔잔한 천혜의 나루터. 나루터의 바위가 붉은 빛을 띠고 있다고 해서 강변쪽의 바위에 ‘단암’이란 석각이 뚜렷하다. 나루의 바위 위에는 정자도 서 있었던 듯 육각형의 기둥자리도 남아있다. 이밖에도 다 둘러보지는 못했지만, 여주에는 이호나루, 조포나루, 새나루, 흔암나루, 찬우물나루, 상자포나루 등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는 나루터가 있었다.

여주에서 도처에 신륵사를 알리는 입간판이 서있다. 낮고 부드러운 봉미산 남쪽 기슭의 신륵사는 절집 앞으로 여강이라고도 부르는 남한강이 유유히 흐른다. 신륵이란 이름은 살아있는 미륵으로 추앙받던 나옹선사가 인간에게 피해를 주는 용마를 막았다는 전설에 의한 것이란다. 여주에 용마가 출현해 사납게 날뛰었다는 것은 곧 강물이 범람해 마을을 휩쓸었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신륵사는 지세가 약한 곳에 홍수를 막기 위해 세워진 것이 아닐까.

신륵사에서는 대부분 강변의 정자 강월헌에만 오르고 되돌아가지만, 신륵사의 호젓한 아름다움은 조사당 뒤편의 울창한 소나무숲 사이로 난 계단을 올라 나옹선사의 부도전에 있다. 신륵사는 늘 관광객들로 떠들썩하지만, 나옹선사 부도와 부도비, 석등이 놓여있는 이곳은 한낮에도 새소리만 가득하다. 이쯤에서 고려말 고승으로 추앙받았던 나옹선사의 선시를 한 편 읊지 않을 수 없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 탐욕도 벗어놓고 / 성냄도 벗어놓고 /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

 

 

▲ 신륵사 나옹선사 부도 앞의 석등에 새겨진 비천상.

 


신륵사가 세종대왕의 능인 영릉의 수호사찰로 번성을 누린 절이라면, 북내면 상교리의 혜목산 기슭에는 고달사지는 한때 영화를 누렸으되 지금은 사라져버린 절집이다. 너른 절터에는 기둥을 세운 흔적과 건물 흔적들이 뚜렷하다. 이쪽이 대웅전이었을까, 그렇다면 이쪽은 아마도 명부전 자리였을 터다. 폐사지에 들면 이렇듯 없는 절을 마음으로 지어볼 수 있다.

사라진 절집터인 고달사지를 찾아가는 이유는 넘치는 힘과 호방한 기상과 화려하고 장엄한 기운을 간직한 부도와 탑을 보기 위함이다. 고달사지에는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어 ‘고달사지 부도’라 부르는 부도가 있다. 이 부도는 전체적인 균형도 좋지만, 몸돌에 새겨진 용의 모습이 단연 압권이다. 네 마리의 용이 구름속에 노니는 모습은 참으로 역동적이다. 이 부도 아래 놓인 원종대사 혜진탑은 높이가 4.5m에 달하는 당당한 크기다. 중대석에는 용들이 구름에서 노닐고 지붕돌에는 비천상이 있다. 강건하고 생동감이 넘친다.

여주에는 세종대왕릉인 영릉(英陵)과 효종대왕릉인 녕릉(寧陵)이 있다. 세종대왕릉은 행락객의 발길이 잦지만, 고작 700m 떨어진 효종대왕릉은 평일이고, 주말이고 한산하기 이를 데 없다. 조붓한 숲길이 남아있는 녕릉의 정취가 왠지 정감이 가고 더 따스하게 느껴진다.

 

 

▲ 효종대왕릉 앞을 지키고 선 우람한 무인석의 모습.

 


 녕릉을 들렀다면 여주읍내 남한강변의 ‘대로사’를 함께 들러야 한다. 효종 능의 방향을 바라보고 서있는 대로사는 송시열을 배향한 사당이다.

1779년 정조가 세종과 효종의 능을 참배하러 여주까지 왔더란다. 참배를 마친 정조는 청심대에 올랐고, 여기서 6년 전에 세상을 뜬 송시열이 생전에 효종의 능이 보이는 곳에 거처를 정하고, 맨바닥에서 밤늦도록 눈물을 비오듯 흘리곤 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송시열은 효종의 어린 시절 그를 가르쳤던 인연이 있었다.

이에 정조는 신하에게 일러 송시열을 기리는 사당 대로사를 짓게 하고 사액을 내렸다. 그러곤 직접 비문을 짓고 글을 쓴 비석을 내려보낸 데 이어, 왕실의 화원에게 일러 대로사 주변의 풍광을 그려넣은 병풍을 만들도록 해서 옆에 두고 오래 보았다고 전해진다.

 

 

송시열을 배향한 대로사. 대로서원이란 현판을 달고 있다.

 

 

“강월헌만 보지 마시고 소나무숲길 올라 보세요”

 

교통사고 후 신륵사 기와불사 접수일 보는 박승희 씨

 

 

여주의 신륵사를 들어서면 매표소를 지나 왼편으로 기와불사를 접수처가 있다. 떠들썩한 유원지와 고즈넉한 절집의 경계쯤에서 절집을 찾은 이들의 소망이 모이는 곳. 이곳을 지키고 있는 것은 박승희(여·32)씨다. 절집에서 일손을 거드는 사람들은 대개 ‘보살님’으로 불리는 후덕한 할머니이거나 중년의 아주머니들. 박씨처럼 미혼 여성이 절집을 지키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그래서인지 신륵사를 찾았다가 호기심에 가득한 눈빛으로 다가와 말을 붙이는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왜 이상하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어요. 절에 젊은 여자가 있는 것이 신기한지 붙들고 사연을 묻다가는, 결국 자신이 지고 있는 고뇌까지 풀어놓고 가시는 분들이 많아요.”

박씨는 6년 전쯤 직장생활을 하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4년여 동안 치료와 요양을 해야 했고, 이 과정에서 절을 찾으면서 크게 위안을 받았다. 절집에서의 명상과 스님들의 격려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용기를 얻었다고 했다. 신륵사를 찾게 된 것도 바로 이런 연유에서였다. 그렇게 박씨가 신륵사를 자주 오가자, 주지스님이 “기와불사 접수 일을 맡아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절을 찾은 사람들이 강변의 정자 강월헌만 휘 둘러보고 돌아가는 게 가장 안타까워요. 신륵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을 꼽으라면 조사전 뒤쪽의 소나무숲 계단길로 올라 나옹선사 부도와 탑비가 있는 곳이지요.”

박씨는 안개 낀 날의 강월헌이 아름답긴 하지만, 조사전 뒤로 계단을 올라 만나는 나옹선사의 부도와 탑에서는 고요한 정취를 느낄 수 있단다. 주말이면 몰려드는 사람들로 신륵사는 마치 저잣거리처럼 북적거리지만, 그곳만큼은 적요한 산사의 분위기를 풍긴다고 했다. 그래서 매번 신륵사에 들어 강변만 휘 둘러보고 돌아가는 사람들의 소매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이라고 덧붙였다.

 

 

뜨끈한 참숯 찜질에 얼큰한 민물 매운탕 그만!

 

 

 

# 여주 가는 길 = 영동고속도로 여주나들목에서 나와 우회전해 37번국도를 타고 가다 버스터미널 사거리에서 우회전하면 여주대교다. 여주대교를 건너 우회전하면 신륵사. 여주나들목에서 신륵사까지는 7㎞. 갈림길마다 이정표가 서있어 쉽게 찾아갈 수 있다. 적금리나 굴암리 등 여주 남쪽의 강변마을을 찾아가려면 여주나들목에서 나와 42번 국도로 갈아타고 부론, 강천리 방면으로 더 가면 된다.

적금리나 굴암리의 강변길은 비포장길로 다소 거친 편. 승용차라면 포장도로에 차를 세워두고 걸어서 산책을 하는 편이 낫겠다. 창남나루터나 부라우나루터, 우만이나루터 등은 신륵사 강건너 쪽에 있다.

# 어디서 묵고 무엇을 맛볼까 = 여주는 수도권에서 가까워 당일치기 여행이 대부분인 만큼 이렇다할 알려진 숙소는 없다. 가족단위 여행객이라면 황학산 유스호스텔( 031-885-8890 )을 추천할 만하다. 가족실 5만4000원. 여주읍의 일성남한강콘도( 031-883-1199 )도 괜찮은 편이다. 인근도시 이천의 미란다호텔( 031-639-5000 )에서 온천욕을 겸한 숙박도 괜찮겠다. 찬바람이 부는 이즈음에는 참숯찜질을 해보면 어떨까. 여주군 이호리에는 참숯마을( 031-886-1119 )이 있다. 어른 8000원. 어린이 5000원.

여주는 남한강에서 잡아올린 민물고기로 끓여낸 매운탕이 유명하다. 굴암리 이장이 운영하는 굴암매운탕( 031-882-6382 )이 이름나 있다. 여주읍에서는 상리의 늘푸른 매운탕( 031-884-4454 )이나 어부집매운탕( 031-886-6266 ) 등도 유명하다.

 



<출처> 2008-10-08 / 문화일보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