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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조선일보 사랑시

사랑시[14] : 옥수수밭 옆에 당신을 묻고 - 도종환

by 혜강(惠江) 2008. 10. 7.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詩)] [14]

 

                       옥수수밭 옆에 당신을 묻고

 

                                            도 종 환

 

 

                                  

                                    일러스트=이상진

 

 

                         견우직녀도 이 날만은 만나게 하는 칠석날
                         나는 당신을 땅에 묻고 돌아오네 
                         안개꽃 몇 송이 함께 묻고 돌아오네
                         살아 평생 당신께 옷 한 벌 못 해주고
                         당신 죽어 처음으로 베옷 한 벌 해 입혔네
                         당신 손수 베틀로 짠 옷가지 몇 벌 이웃께 나눠주고
                         옥수수밭 옆에 당신을 묻고 돌아오네
                         은하 건너 구름 건너 한 해 한 번 만나게 하는 이 밤
                         은핫물 동쪽 서쪽 그 멀고 먼 거리가
                         하늘과 땅의 거리인 걸 알게 하네 
                         당신 나중 흙이 되고 내가 훗날 바람 되어
                         다시 만나지는 길임을 알게 하네
                         내 남아 밭 갈고 씨 뿌리고 땀 흘리며 살아야
                         한 해 한 번 당신 만나는 길임을 알게 하네

 

                                                <1986년>

 

 

 다시 만나자, 당신은 흙이 되고 내가 바람이 되어

- 김선우·시인

 

 

  영원한 사랑을 믿는가? 사랑이 영원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요즘으로 치면 좀 촌스럽다. 만남도 헤어짐도 '쿨해져 버린' 시대니까. 사랑에 빠진 직후라면 영원한 사랑 운운이 자연스러울 수도 있겠다. 그런데 도종환(54) 시인은 사랑에 막 빠졌을 때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할 때 사랑의 영원을 노래한다. 이런 사랑법, 예컨대 '사랑의 뒷심'이 세상의 나지막하고 소소한 뒷마당을 지켜가는 소중한 힘이 되기도 한다.

  '당신 나중 흙이 되고 내가 훗날 바람 되어' 다시 만나질 그날을 예비하며 헐벗은 벌판을 경작하는 시인의 어깨는 고단하다. 하지만 현실의 고단함을 기꺼이 짐 지는 것이 진정으로 당신을 만나는 길임을 믿기에 시인은 '밭 갈고 땀 흘리며' 묵묵히 당신을 그리워한다. 도종환은 이별과 그리움과 눈물의 시인. 1986년 출간 이후 당대의 밀리언셀러였던 시집 《접시꽃 당신》이 시인을 세상에 알렸지만, 이 시집의 놀라운 판매량은 비극적인 개인사에 대한 세간의 관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80년 광주의 상처로부터 출발한 암울한 시대의 중반에 인간의 근원적 상처인 삶과 죽음을 진정성 가득한 서정시로 빚어 올린 이 시집은 개인의 비극과 시대의 비극이 긴밀히 연결된 지점에서 독자들의 마음을 위로했다. 사람들은 시집을 보며 눈물 흘렸고 눈물은 우리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었다.

  실제로 도종환 시인을 만나면 많이 울었던 사람의 눈빛과 마주친다. 그는 잘 웃는 편인데 그 웃음이 세상의 무게를 견디고 있는 느낌일 때가 많다. 왜 아니랴. 당신이 사랑한 세상은 여전히 문제투성이고, 나는 당신을 만나기 위해 오늘의 세상을 더 많이 사랑해야 한다. 옥수수밭 옆에 묻은 당신을 끝내 붙잡아두고 싶었던 세상이므로, 이 세상이 조금씩 더 나아질 수 있게 나는 무엇이든 해야 한다. 그것이 당신에 대한 내 사랑을 지키는 일이기도 하므로. '(…)/ 남은 날은 참으로 짧지만/ 남겨진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인 듯 살 수 있는 길은/ 우리가 곪고 썩은 상처의 가운데에/ 있는 힘을 다해 맞서는 길입니다/(…)' (〈접시꽃 당신〉)

  쓸쓸하게 버려진 세상의 뒷마당들에 씨앗을 심고 가꾸는 시인은 '공공 선(善)'이랄지 '희망' 같은 구닥다리 말들이 여전히 사랑을 지키는 근원 힘임을 알고 있다. 변방의 사람들을 향해 그가 내미는 노래들은 따뜻하고 순연하다. 그 노래들 속에 사랑의 푸른 빛들이 반짝인다. 영원한 사랑을 믿느냐고? 영원한 사랑은 있다. 내 안에 당신이 있는 방식으로, 혹은 '당신 나중 흙이 되고 내가 훗날 바람 되어' 만나는 방식으로. 아무리 세상이 낡고 슬픔이 많다 해도 사랑은 앞으로 나아간다.

 

 

<출처> 2008. 10. 7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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