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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조선일보 사랑시

사랑시[11] : 남편 - 문정희

by 혜강(惠江) 2008. 10. 3.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11

 

                                    남편 - 문정희

 

 

               

 

 

                             아버지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
                             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
                             내게 잠 못 이루는 연애가 생기면
                             제일 먼저 의논하고 물어보고 싶다가도
                             아차, 다 되어도 이것만은 안 되지 하고
                             돌아누워 버리는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
                             이 무슨 원수인가 싶을 때도 있지만
                             지구를 다 돌아다녀도
                             내가 낳은 새끼들을 제일로 사랑하는 남자는
                             이 남자일 것 같아
                             다시금 오늘도 저녁을 짓는다
                             그러고 보니 밥을 나와 함께
                             가장 많이 먹는 남자
                             전쟁을 가장 많이 가르쳐준 남자

 

 

 

<해설>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
장석남·시인·한양여대 교수

 
  인기 드라마 〈엄마가 뿔났다〉가 얼마 전 종영됐다. 드라마에서 탤런트 김혜자씨의 가출이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그런데 그 '아내, 또는 엄마의 가출'을 미리 말한 시가 있었다. 문정희
시인(61)의 시 '여보, 일 년만 나를 찾지 말아주세요/ 나 지금 결혼 안식년 휴가 떠나요/ 그날
둘이 나란히 서서 /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함께하겠다고 / 혼인 서약을 한 후/ 여기까지 용
왔어요/(…)'(〈공항에서 쓸 편지〉)라는 작품이다. 시는 '(…)/ 이제 내가 나에게 안식년
줍니다/ 여보, 일 년만 나를 찾지 말아주세요/ 내가 나를 찾아가지고 올테니까요'라고 끝을
맺는다.

            현재 가장 절실한 삶의 문제가 시가 되어 나온다고 한다. 문정희 시인은 위의 시〈남편〉에서
처럼 사랑하여 함께 살기로 한 결혼이라는 제도가, 혹은 남편의 존재가 중년 이후 어떻게 변화
를 겪으며 성숙해가는지 솔직하고 과감한 언어로 꽃피우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문정희의 사랑
시는 독특하다. 모두가 아는 연애시의 범주를 깨고 중·장년의 사랑의 서글픔 내지 깊이를 단도
직입의 방식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당신의 냄새는/ 내가 최초로 입술을 가진 신이 되어/ 당신의 입술과 만날 때/ 하늘과 땅 사
로 쏟아지는/ 여름 소나기 냄새'(〈당신의 냄새〉)라는 절창이나, '동그란 해로 너 내 위에
고/ 동그란 달로 나 네 아래 떠 있는/ 이 눈부신 언어의 체위// 오직 심장으로/ 나란히
당도한/ 신의 방'(〈"응"〉)이란 발견에는 서늘한 에로스가 아득하다.'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
일 먼 남자', '전쟁을 가장 많이 가르쳐준 남자'가 바로 남편이라고 했을 때, 그 '전쟁'에 동원된
살림살이의 오합지졸들을 상상해본다. 슬프다. 허나 그것이 바로 우리네 사랑의 진풍경 아닌가.

            이 시는 최근 미국 뉴욕에서 출판되어 주목 받고 있는 문 시인의 영역 시선집 《우먼 온 더라
스》에 실렸고, 미국 평단으로부터 '펄펄 살아있는 한국 현대 시'라는 찬사를 받은 작품이다.
 
  여고생 시절, 전국의 백일장 장원을 도맡아 했고 미당 서정주의 발문을 받아 첫 시집을 내   
주변의 선망과 질투를 한 몸에 받았던 문정희 시인. 사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 청춘의
열기로 들끓는 시를 쓰는 그녀는 '오색 등불아래 네온사인 아래/ 이름도 몰라 성도 알 필요가
는/ 익명의 가슴마다/ 사뿐사뿐 언어의 발자국을 찍는/ 황홀한 시인 지상의 무희' (〈프리댄
서〉)라고 자신을 규정했다.

 

          <출처> 2008. 10. 3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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