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랑 이작도
대이작도에서의 2박 3일
글·사진 남상학
* 대이작도 큰말의 평화로운 풍경 *
2008년 7월 17일, 나는 2박 3일의 일정으로 인천 앞바다에 떠있는 이작도(伊作島: 인천 옹진군 자월면 이작리)로 떠났다. 이 섬은 내게 유년 시절의 꿈이 서린 추억의 섬이다. 일행은 모두 6명, 평소 ‘이작도 예찬론’을 들어왔던 친구들이 나의 이작도 방문 의사를 듣고 동행했다.
이 섬은 선친(남성희 선생님)께서 한국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10여 년 동안 이작분교 교사로 근무했던 곳이며, 내 누이(상옥)는 초등학교를 이곳에서 졸업했고, 남동생 둘(상범, 상우)은 이 섬에서 태어났다. 나는 두 살배기 어린애로 이 섬에 와서 초등학교 6학년이 되던 해까지 10년간을 살았으니, 내게는 고향이나 진배없다. 우리 가족은 한국전쟁이 일어난 이듬해 초 전쟁이 가져다 준 아픔을 안고 이 섬을 떠났다. 마음의 상처로 인해 선친께서는 1953년 5월 세상을 떠나셨다.
그 사실은 아직 어린나이의 내게는 두고두고 아픔으로 남아 있었지만, 마음 한 구석엔 지울 수 없는 유년의 기억들이 추억의 샘이 되어 가슴 한 구석에서 용솟음쳐 오르고, 바다를 생각할 때마다 아련한 물길 위에 떠있는 이작도를 떠올리곤 했다.
“고향을 떠나온 후 나는 바다만을 생각하며 살았다. 고향이 그리운 날 바다는 아예 내 눈썹 위에 드러누워 있었다. 사계(四季) 중 여름이 더욱 그랬다. 바람 부는 창 밖 흔들리는 미루나무에서 넘실거리는 물결과 파도소리를 느끼곤 했다. 때로 집채만 한 파도가 덮치면 신열(身熱)이 오른 맨발의 아이는 해안을 따라 정처 없이 달렸다. 그리고 바람이 자면 수평선 위에 가물가물 꿈의 돛배를 띄웠다. 팔미도를 지나 영흥도로, 자월도를 지나 이작도로 승봉도로, 아니면 덕적도를 경유하여 문갑도 백아도 율도로, 그 너머 어딘가에 있을 미지의 또 다른 섬으로, 그 아련한 물길 따라 나는 가끔 물새 우는 소리를 듣곤 했다. 이제 지명(知命)을 훨씬 넘은 나이에도 지도 책을 펴들고 눈을 끔벅이며, 너무 길어 보이지 않는 길, 애처로운 길을 가다가 베갯머리에서 요즘도 내가 듣는 그 소리, 환청(幻聽)일까? - 졸고 <아련한 물길> 전문
이작도 방문은 이번이 세번째이지만 이작도를 찾아가는 길은 어느 때나 출렁거리는 물결만큼이나 가슴이 설렌다. 인천으로부터 44㎞, 1시간 30분 정도면 닿을 수 있는 거리를 그리워하면서도 선뜻 찾아가지 못한 지난날들이 못내 아쉽다.
* 대이작도 동쪽 해변에 서 있는 등대(위)와 소이작도 끝에 솟은 손가락 바위(아래) *
인천 연안여객터미널에서 표를 끊고 오전 9시 이작도행 여객선 레인보우호에 승선했다. 인천 내항을 빠져나온 여객선은 호수처럼 잔잔한 바다를 거침없이 달렸다. 나는 미리 준비한 자료를 들고 친구들에게 이작도의 역사와 가볼만한 곳, 그리고 나와 이작도의 관계를 다시 한 번 설명해 주었다.
그 사이, 쾌속선은 어느덧 자월도 선착장에 들러 하객과 짐을 내려놓고 이작도를 향하고 있었다. 이작도의 윤곽이 선명해지면서 대이작도와 소이작도 사이에 떠있는 등대와 소이작도 동단의 손가락 바위가 먼저 우리를 반갑게 맞이했다.
속력을 낮춘 배는 먼저 소이작도에 하객을 내려놓고, 2백m 가량 떨어져 있는 대이작도 선착장으로 이물을 돌렸다. 섬 사이의 바다는 밀물 때는 유속이 꽤 빠른 편이지만 대이작도 쪽 바다는 어린아이를 품에 안은 어머니 품처럼 아늑하고 잔잔했다. 마침내 잔잔한 바다 뒤로 고즈넉한 대이작도의 풍경이 시야에 환히 들어왔다.
배가 선착장에 닿는 시간 선착장은 마중 나온 사람들로 으레 붐비기 마련이다. 왁자지껄 부산한 사람들 틈에서 최규희 장로님이 나를 알아보고 반갑게 맞아주었다. 선착장에는 “대이작도 방문을 환영합니다”라는 아치형 구조물이 서 있고, 그 뒤로 대이작도 지도를 그린 대형 간판과 ‘대이작도’라고 새긴 표지석이 보였다.
우리 일행은 최규희 장로님의 봉고를 타고 미리 정해놓은 숙소로 출발했다. 선착장에서 큰마을까지가 0.7km, 숙소로 정한 고개 너머 작은 마을(장골)까지도 먼 길이 아니어서 굳이 차를 이용할 필요는 없었으나 무더운 날씨와 짐을 생각하여 특별히 호의를 베풀어 주셨다. 차는 큰말로 이어진 깔끔하게 단장된 해안도로를 따라 마을로 들어섰다. 인천남부초등학교 이작분교 앞길을 지나 교회당이 있는 윗길로 고개를 넘어 섬의 중간 마을인 장골로 향했다. 숙소를 그곳으로 정했기 때문이다.
* 공원에서 찍은 장골마을(위), 아래는 다올펜션, 방 이름 *
숙소로 사용할 장골마을의 다올펜션(최규웅씨, 032-881-4560 , 010-5685-064)은 최근에 지은 2층 새집으로 깔끔하고 아담하게 단장되어 한눈에 호감이 갔다. 에어컨, TV, 냉장고, 조리 및 주방기구, 실내화장실 등 완벽한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방은 ‘초록빛바다’ ‘보랏빛바다’ 등 섬의 정취를 물씬 풍기는 것으로 이름을 짓고, 방 앞의 목조 테라스에는 빨강, 파랑, 초록 파라솔을 설치하고 의자를 배치하여 쉬면서 대화를 나누기에 좋았다.
더구나 펜션 바로 옆에는 장승공원과 이작쉼터가 있고. 10여분 거리에 삼신할미약수터가 있어 목을 축일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작도의 대표적인 해수욕장인 작은풀안 해수욕장이 걸어서 5분 거리에 있어서 어느 곳보다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 장승공원(위), 이작쉼터(중간), 삼신할미약수터(아래) *
예전에 이 마을은 집이 몇 채 안 되는 아주 작은 마을이었지만 최근 들어 피서지로 적합한 작은풀안 해수욕장이 매스컴에 널리 알려지면서 종전의 낡은 가옥은 민박형 주택으로 개축되고, 여기저기 멋진 펜션이 들어서서 마을의 면모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펜션에서 제공해 준 점심을 먹고 2박 3일 일정의 본격적인 투어에 들어갔다. 섬이래야 큰말(큰마을)에서 가장 먼 곳인 계남마을까지가 4km 좀 못 미치는 거리지만 최 장로님이 봉고로 픽업해 주셔서 뜨거운 날씨 속에 편하게 투어에 참가할 수 있었다.
* 장골에 있는 작은풀안과 깨끗한 모래사장에 뚫어놓은 게구멍 *
먼저 멋진 해변을 찾기로 했다. 섬 내에는 작은풀안(장골), 큰풀안, 목장골, 떼넘어(계남) 등 네 곳에 해수욕장이 있다. 장골마을 초입에는 작은풀안 해수욕장, 큰풀안 해수욕장으로 가는 길을 일러주는 이정표가 서있다. 작은풀안(장골), 큰풀안의 해변길이를 합치면 3km 정도에 이르지만, 중간에 해벽이 가로막고 있어 서로 넘나들 수 없어 큰풀안은 육로로 가야한다. 작은풀안은 큰풀안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아담하고 해변 한쪽에 소나무 숲이 있어 아늑하고 정겹다.
* 3km 가까운 큰풀안 해변의 광활한 정경
큰풀안은 크기가 광대하고 넓어 단체나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다. 두 곳 모두 우리 나라에서 모래가 가장 좋은 곳으로 알려질 정도로 백사장이 곱고 깨끗하다. 그런데다 바다 쪽으로 한참 들어가도 어른 키를 넘지 않을 만큼 경사가 완만하여 해수욕에 아주 편리하다.
그리고 곱디곱게 펼쳐진 모래사장과 해변에는 해당화와 갯완두콩, 갯멧꽃이 피어 동심의 세계로 빠져 들게 한다. 또 해변 주위에 갯바위 낚시터가 산재해 있고, 바위에는 고둥(갱)과 자연산 굴이 지천이며, 방게와 바지락이 많아 여름철 피서를 더욱 즐겁게 한다. 바다 속에 이런 생물들이 서식하는 것을 보면 참 신비하고 오묘하다. 사리 때 운이 좋으면 낙지, 박하지(게), 소라도 잡을 수 있다. 그러나 굴은 여름철엔 먹지 않는 것이 좋다.
* 해변에서 볼 수 있는 해당화 붉은 열매(위)와 바위에 붙어있는
고둥(갱), 물때를 잘 맞춰 나가면 많은 양을 채취할 수 있다.
장골에서 작은풀안, 큰풀안을 지나 계남마을로 향하는 길 중간에 목장불해수욕장이 있다. 이곳은 남향을 한 다른 해수욕장들과는 달리 북향이며 자갈이 다소 섞인 해변이다. 해수욕장의 길이가 약3~400m 폭 10여m 정도 되며 인근에 소나무밭이 있어 조용히 캠핑을 즐기기에 적당하며 인근에 조그마한 저수지가 있어 민물낚시를 즐길 수 있다. 또 최근에는 해양스포츠 시설을 갖추고 피서객을 부르고 있다.
* 대이작도 끝마을 계남마을 해변과 선착장 *
여기서 조금 더 동쪽으로 가면 계남마을과 계남 해수욕장(일명 뛰넘어 해수욕장)이 나온다. 계남해변은 바로 앞에 사승봉도가 남쪽에서 밀려오는 파도를 막고 있어 큰풀안이나 작은풀안 해변보다 물결이 잔잔한 편이고 조용하여 한가하게 여름 정취를 즐기려는 가족 단위 피서객들이 많이 찾는다.
* 폐교된 계남분교장 간판과 퇴락한 교사 *
섬의 끝자리에 자리 잡은 계남마을 해변가에는 영화 ‘섬마을 선생님’의 촬영 무대였던 자월초등학교 계남분교가 폐교된 지 오래되어 우거진 잡초 속에 흉가처럼 남아 있다. 정문 입구에는 조릿대가 무성하고 교문이 있던 시멘트 기둥에는 '자월국민학교 계남분교장'이라는 간판이 그대로 걸려있다.
잡초가 무성한 손바닥만한 운동장을 가로질러 계단을 올라가 교실 안을 들여다보니 교실에는 낡은 칠판과 몇 개의 의자, 그리고 먼지를 잔뜩 뒤집어 쓴 낡은 소파가 거미줄 친 구석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주민들 대부분이 낙도의 고된 삶을 청산하고 육지로 떠나고, 갈 곳 없는 몇몇 노인네들만 이 마을을 지키고 있으니 학교가 있어야 할 이유를 오래 전에 상실한 것이다.
* 폐교된 계남분교장 운동장(위)과 운동장 끝에 세워놓은 "섬마을선생" 촬영장소 표지석 *
다른 지역에서는 폐교가 되면 학교 입구나 운동장 한켠에 학교 연혁(개교 및 폐교 연도 등)과 배출한 졸업생수 등 학교의 역사를 기록한 표지석을 세워두는데, 이곳에는 이런 것을 찾아볼 수 없어 찾는 이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학교를 세웠던 취지를 살리는 뜻에서 이 장소에 새로운 시설을 만들어 교육이나 수련을 위한 장소로 활용하는 방안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만 마당 끝에 이곳이 영화 촬영의 무대였음을 알려주는 표지석이 있어 그나마 허전한 마음을 달래준다.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세운 표지석에는 「섬마을선생 촬영장소」라는 문구 아래 “김기덕 감독이 연출하고 문희, 오영일, 이낙훈, 김희갑 등이 출연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1967년 제작되어 팬들의 심금을 울렸던 작품이다. 마당에 서니 바로 눈앞에 승봉도가 가로막는다.
밀물 때만 드러나는 신비한 모래사막 '풀등, 풀치'(사진 :이작분교 홈페이지에서 따옴) 또 대이작도에는 다른 섬에서는 볼 수 없는 자랑거리가 하나 있다. ‘풀치’ 혹은 ‘풀등’이라고 부르는 신비한 모래사막이 그것이다. 이 모래사막은 큰풀안 해변 앞쪽으로 하루 두 번씩 썰물 때마다 드러났다가 밀물 때는 모습을 감추는 신기루 사막이다. 대이작도에 와서 처음 풀등을 가본 사람에게는 너무도 크고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다.
동서 2.5km, 남북 1km, 여의도보다 훨씬 넓은 규모로 드러나는 모래사막에서는 4~5시간 머물면서 수영을 즐기거나 조개를 캘 수 있고, '범게'라고 불리는 식용게를 잡을 수가 있다. 범게는 너댓 마리에 1kg 가량 나갈 정도로 크고 알차며 이것으로 매운탕을 끓이면 국물이 아주 시원하고 맛 또한 일품이다. 큰풀안해수욕장에서 보트를 타고 500여m만 나가면 닿는다. 가장 면적이 컸을 때는 30만평 정도 되었으나 서해에서 무분별하게 모래를 채취하면서부터 그 면적이 점점 줄어가고 있다고 하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무슨 특단의 대책라도 세워야하지 않을까?
여름 피서철에는 대이작도 선착장에서 정기적으로 풀치까지 왕복 운행하는 배가 등장하지만 비성수기에는 특별히 배를 대절해야 한다. 선착장에서 10~15분 정도 소요되며 일정한 요금을 지불하면 된다. 바다 한 가운데 떠 있는 모래섬인 만큼 나무가 없으니 그늘도 없다. 따라서 파라솔이나 간식과 음료수 등을 가지고 가는 것이 좋다.
* 부아산 주차장에 세워놓은 부아산 탐방안내도 *
* 부아상 정상으로 오르는 계단(위), 구름다리(가운데), 전망대 겸 쉼터(아래)
장골에서 섬 안쪽을 살펴본 우리는 섬에서 가장 높은 부아산을 찾았다. 부아산은 큰마을과 작은마을(장골) 사이의 고개에서 올라간다. 주차장에는 탐방안내도와 이정표가 있어 편리하다. 왼편은 부아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이고 오른쪽은 휴식공원으로 꾸며놓았다.
먼저 부아산 정상부터 오르기로 했다. 주차장 왼쪽에 설치된 목조계단을 올라가면 80여m정도 되는 붉은 색의 구름다리가 있고, 그 구름다리를 건너면 정자가 하나 세워져 전망대 겸 쉼터 구실을 해준다. 정자에 올라가 사방을 둘러보니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다. 주변 바다에 떠있는 섬들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다. 망원경도 하나 설치되어 있어 자월도와 승봉도를 조망하기에 아주 좋다.
*부아산 정상 *
*정상에서 바라본 소이작도와 그 뒤로 덕적도, 승봉도, 사승봉보
부아산의 진짜 정상은 이 정자에서 서쪽으로 40~50m 떨어진 곳이다. 하늘을 향해 각을 세운 바위들이 줄지어 서있어 나름대로 꽤 멋진 풍경을 보여준다. 바위틈을 더듬어 정상에 서니 수평선 위로 멀리 덕적도가 시야에 들어오고 바로 발밑으로는 소이작도,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리면 자월도, 승봉도가 차례로 들어온다. 대이작도의 비경인 풀치도 여기에서 봐야 제 맛이 난다. 바닷물에 잠겨 있어도 풀치가 있는 부분은 물색깔이 달라, 자연현상이지만 그 모습이 참으로 신비롭다.
* 부아공원 전망데크*
주차장으로 내려와 동쪽으로 조금 걸어가면 화초와 나무들을 심어 단장한 부아공원이다. 이곳에도 전망 데크와 아울러 벤치와 또 다른 정자(쉼터)를 만들어 놓았다. 이곳에서는 장골 마을이 눈 아래로 선명하게 펼쳐지고 승봉도, 사승봉도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망망대해에 크고 작은 섬들이 멀리, 가까이 떠있는 모습들은 섬의 정상에서만 볼 수 있는 이색적인 풍경이리라.
해안과 부아산을 둘러보고 이작분교가 있는 큰마을로 발길을 옮겼다. 내 유년의 삶이 서린 학교와 마을을 둘러보며 옛 추억을 속속들이 더듬어보고 싶었다. 초등학교 시절이 그리워 학교 교실을 둘러보았다. 산쪽으로 있던 옛 교사는 다른 용도로 사용하고, 운동장이 있던 자리에 신축교실과 선생님의 관사가 세워져서 운동장은 그만큼 좁아졌다. 교실은 최신 기자재가 꽉 들어차 있었고, 여름방학에 들어간 한가한 교실에서 한 아이가 열심히 책을 읽고 있다. 선생님의 말씀으론 이곳에서 근무하는 동료 부부교사의 자녀라고 했다.
한 때는 학생수가 줄어 폐교 위기를 겪기도 했지만, 이작도가 서해안의 청정 피서지로 알려지면서 인구가 늘고 지역이 다소 활성화 되면서 폐교 위기를 넘겼다고 한다. 지금은 11명의 학생을 세 분의 선생님이 맡아 교육을 하고 있다. 내가 만난 젊은 선생님은 처음 부임해서는 마음이 잡히지 않았지만 이젠 익숙해졌다고 했다.
* 이작분교 교정에 세운 조각상과 교실 내부 *
전에는 학교 앞 해변에는 모래사장이 있고, 모래사장에 이어 썰물 때는 부드러운 갯벌이 펼쳐져 도랑을 따라가며 망둥어와 모시조개를 잡으며 맘껏 뛰놀 수 있었다. 그런데 갯펄이 씻기면서 작은 돌이 드러나고, 그 돌에 굴이 붙어 자라면서 놀이터로서의 역할은 자동 상실되었다.
그러나 사리 만조가 되면, 학교 앞 도로 축대까지 물이 출렁거리는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름이 없다. 해변 오른쪽 모래사장이 끝나는, 좀 후미진 지역은 예전에 날이 궂으면 도깨비불이 어른거린다고 해서 접근하기를 꺼려했는데, 지금은 방파제가 새로 만들어져 작은 어선들을 정박할 수 있게 했다.
* 대이작도 큰말 마을 풍경 *
* 큰말의 골목길(위)과 , 그 길목에 핀 탐스런 수국(아래)
나는 마을의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밭 하나를 건너 살구나무가 있던 집, 우물가, 교회당과 성당, 마을에 하나뿐인 상점과 산나물 뜯던 학교 뒷동산을 올라보기도 했다. 전에는 넓게, 크게, 멀게 느껴졌던 것들이 이제는 좁게, 작게, 가깝게 보였다. 어린 눈으로 보았던 때문일까? 집들은 하나같이 깔끔하게 개축되고 흙길은 모두 시멘트로 단장되어 문명의 혜택이 마을의 면모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마을회관은 어찌나 큰지 마을의 중심건물이 되어 있었다.
* 선착장 위에 있는, 대이작도 단 하나뿐인 식당 '이작회집' *
다만 대이작도의 자랑거리인 선착장 위의 짙푸른 송림은 세월이 지나면서 푸르름이 더욱 짙어 이작도를 처음 방문하는 사람들에게는 퍽 인상적으로 남을 만하다. 낚싯대를 드리우고 우럭, 놀래미를 낚아 올리는 선착장 주변, 대이작도의 유일한 식당인 ‘이작횟집’이 바다와 어울려 아름다운 풍광을 자아낸다.
자연을 제외하곤 모두가 새롭게 태어난 섬의 풍광 위로 내 어린 시절의 모습이 오버랩 되어 스쳐왔다. 망둥이를 잡고, 바지락을 캐고, 고둥을 줍고, 굴을 따고, 아버지를 따라 산을 넘어 갯바위 낚시를 하고, 봄이면 동산에 올라 잔대, 도라지를 캐고 나물을 뜯던 일, 어느해 한겨에는 굴을 따러 무인도에 갔던 일, 그리고 동산에 올라 둥굴레, 무릇, 칡뿌리를 캐던 기억들이 실타래처럼 풀렸다. 비록 그것들이 아픔의 기억이라 해도 세월이 한참 지난 지금에 와서 그렇게 즐겁고 행복한 추억이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최규희 장로님 댁 앞마당에 있는 오래된 살구나무엔 살구가 열려 있다.*
* 최장로님댁 앞마당에 피어있는 능소화 *
그리고 최근에는 큰밀 우측 해안을 따라 산책길을 만들어 놓아 섬의 정취를 느끼며 산책할 수 있도록 하였다. 관광객을 유치하려는 의도이겠으나 해안의 아름다운 풍광을 훼손하는 것 같아 아쉬운 점도 있었다. 해안 산책길 끝에 당도하면 소이작도의 손가락바위가 지척에 보이고 선착장도 한눈에 들어온다.
이번 방문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신 최규희 장로님 내외, 그리고 좋은 숙소를 제공하고 낚싯배 '아라호"로 대이작도 해안을 유람시켜 주신 최규웅 님, 무엇보다 사흘 동안 맛있는 세 끼의 식사와 감자를 삶아 간식으로 제공해 주신 다올 펜션의 아주머니에게 감사드린다.
아울러 여러 해가 지났지만, 보은(報恩)의 뜻으로 이작분교 어린이들을 서울로 초청하면서 인연을 맺은 강선화 양의 어머님 아버님과의 상면, 그리고 서울 초청에 같이 참여했던 이작횟집의 정은선 양을 만날 수 있어서 좋았다. 당시 초등학교 학생이던 아이들이 이제는 어엿한 대학생이 되었으니 세월이 참으로 빠르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좀더 많은 분들과 만나 대화를 나누지 못한 아쉬움이 있지만 다음 기회를 기약하는 수밖에.
2박 3일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동행한 친구가 말했다. '좋은 여행이 되었느냐?"고. 새삼스럽게 내게 묻는 뜻을 알아차리고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대이작도에서의 2박 3일은 내게 참으로 행복한 날들이었다. 누구에게나 고향은 그리움의 대상이다. 육지와 단절된 섬은 더그렇다. 이번 방문으로 도졌던 내 불치의 고질병인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얼마나 치유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작도를 향한 마음은 아련한 물길처럼 앞으로도 끊임없이 이어지리라.
*선착장 부근에서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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