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굴업도
‘야생(野生)’이 숨 쉬는 섬
박경일기자
▲ 펄펄 뛰는 사슴과 마주쳤을 때의 느낌은 상상보다 훨씬 더 감동적이다. 굴업도에는 방목된 지 수십년이 지나면서 야생화된 사슴들이 껑충껑충 뛰논다. 굴업도에서는 특별히 운이 없지 않다면, 이런 풍경쯤은 얼마든지 만날 수 있다. 사진 위는 굴업도 목너미의 백사장. 이 드넓은 백사장에 서면 앞도, 뒤도 바다다. 고운 모래와 빼어난 풍광을 가진 이 해수욕장은 이름도 없고, 사람도 없다.
그 섬에서 펄펄 뛰는 심장과 탱탱한 근육을 가진 야생의 사슴을 보았습니다. 진초록 풀들로 뒤덮인 부드러운 능선을 따라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걷던 길이었습니다. 멋진 뿔을 가진 수사슴 몇 마리가 후다닥 생고무처럼 튀며 바위를 딛고 숲으로 사라졌습니
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는데, 능선 저쪽의 무성한 수풀 속에서 풀을 뜯던 선명한 꽃무늬의 암사슴 한 마리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습니다. 고개를 빼고 한참 동안 이쪽을 빤히 쳐다보던 암사슴도 곧 짙은 숲 그늘로 몸을 감추었습니다.
인천 옹진군 덕적면의 작은 섬, 굴업도. 한때 방사성폐기물 처분장 후보지로 거론됐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곳. 그곳의 너른 초지에는 사슴이 펄펄 뛰고, 위태로운 암벽에는 당당한 체구의 검은 염소가 껑충거리며 뛰어다닙니다.
사슴과 염소는 물론 섬 주민들이 방목한 것이지만, 놓아기른 지 20년이 지나면서 저 스스로 섬 안에서 몇 대를 거쳐 ‘진짜 야생동물’이 돼버렸답니다. 아 참, 굴업도에 도착하기 전에도 여객선 해양호 뱃전에서 잔잔한 수면 위로 돌고래의 일종인 상괭이
(쇠물돼지)가 힘차게 자맥질하는 장면을 목격했던 것도 덧붙여야겠네요.
섬의 형태가 ‘사람이 엎드려 일하는 모습’을 닮았다고 해서 굴업(屈業)이란 이름이 붙은 섬. 하지만 굴업도에는 온통 웅장한 바위산과 벼랑 그리고 구릉의 초지뿐이어서 사람들이 엎드려 일할 만한 땅뙈기조차 없는 섬입니다.
척박한 토질 탓에 도대체 땅콩 말고는 제대로 되는 작물이 없었던 곳이라네요. 섬의 방파제며 선착장은 밀물 때면 다 잠겨 배를 정박해 둘 곳이 없는 탓에 고기잡이 배도 단 한 척밖에 없답니다. 땅에도, 또 바다에도 기대고 살지 못하니 자연히 주민 숫자도 적습니다. 섬 주민이라야 간혹 찾아오는 외지사람들에게 민박을 내줘 생계를 잇는 8가구에 10여명이 고작입니다.
인천 연안부두에서 쾌속선을 타고 덕적도로, 덕적도에서 다시 여객선으로 갈아타고 굴업도를 찾아들어간 것은, 그 섬이 자연 그대로의 생태를 간직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조바심 때문이었습니다.
굴업도의 땅 98%를 매입한 한 기업이 섬에다 골프장을 갖춘 대단위 리조트를 건설하겠다고 나섰고, 머지않아 공사가 시작될 것입니다. 누대에 걸쳐 그 척박한 섬을 지키고 살아온 주민들, 또 그 섬에 ‘최고의 리조트’를 만들어 보겠다는 기업, 여기에다 자연 훼손을 걱정하는 환경단체들….
그 섬을 보존해야 할 자원으로 봐야 하는지, 혹은 개발해야 할 자원으로 봐야 하는지에 대해 판가름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섬 곳곳에 활처럼 휘어진 그림 같은 백사장과 무시(조류의 흐름이 없는 물때)에는 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맑은 바다를 갖고 있으며, 펄펄 뛰는 야생동물들이 살아 숨쉬는 굴업도가 이런 개발 바람 속에서 그저 덜 다치기를 바라는 마음뿐입니다.
굴업도 여름풍경을 만나고 돌아왔습니다. 다녀온 뒤에도 풀숲에서 고개를 빼들고 이쪽을 바라보던 사슴의 맑은 눈망울과, 까마득한 벼랑 끝을 딛고 아슬아슬하게 서서 바다를 바라보던 당당한 체구의 염소 모습이 한동안 잊히지 않았습니다.
▲ 굴업도 해안의 깎아지른 벼랑을 딛고 선 염소들. 도무지 길이 없을 것 같은 위태로운 암벽 끝에 염소들이 자주 출몰한다. 방목한 지 30년이 돼서 아예 야생이 된 염소의 당당한 풍모는, 일반 농가에서 가둬기른 염소와는 격이 다르다. 사진 위는 굴업도에서 바라보이는 선단여의 모습.
# 거리보다 더 먼 섬… 굴업도의 아름다운 해변
굴업도는 피서객들이 북새통을 이루는 휴가철에도 호젓하게 여름 휴가를 보낼 수 있는 몇 안되는 섬 중 하나다. 사람들을 통제하는 것은 ‘먼 거리’가 아니라 ‘불편한 교통’이다. 인천 연안부두에서 덕적도까지는 하루 수차례 쾌속선으로 이어지지만, 덕적도에서 굴업도까지는 고작 80명이 정원인 정부보조 여객선 해양호가 하루 한번만 닿는다. 여객선이 하루 한편뿐이니 당일로 다녀오기란 아예 불가능하다.
아무리 사람들이 몰려들어도 해양호에는 증편이란 게 없다. 문갑도며 지도, 울도 등 그만그만한 섬을 느릿느릿 모조리 딛고 돌아오는 완행 여객선은 하루 한편 운항으로도 벅차다. 이 배를 타지 않고는 굴업도를 디딜 수 없는 탓에, 하루에 섬으로 드는 외지인들은 80명을 넘지 못한다. 한창 휴가 때 사람들이 몰려도 섬 안의 인구는 섬 주민을 합쳐 200명을 넘는 날이 거의 없다.
굴업도의 인구는 8가구에 10여명. 그나마 네댓가구는 인천과 덕적도를 오가며 생활한다. 면적은 여의도(8.4㎢)의 5분 1에 불과한 1.71㎢(52만평). 그러나 이렇듯 자그마한 섬에 3곳의 너른 백사장을 가진 해수욕장이 있다. 여름 휴가철에 굴업도를 찾는 외지인들이 주로 이용하는 마을 앞‘굴업도 해수욕장’을 제외하고, 다른 2곳의 해수욕장은 이름조차 없다.
굴업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수욕장은 백사장에 서면 앞으로도, 뒤로도 바다가 펼쳐진 이른바 ‘양면해수욕장’. 한때 한 사업가가 누드비치로 개발하겠다고 나서 논란이 됐던 곳이다. 큰 섬과 작은 섬을 잇는 빼어난 백사장을 갖춘 이 해수욕장은 아무리 사람이 붐비는 피서철에 찾아가도 한적하기 이를 데 없다. 마을 앞 해수욕장도 한가하지만, 언제고 이쪽 해변을 찾는다면 아마도 해변 전체를 독차지할 수 있지 싶다. 이 백사장을 넘어 동쪽의 작은 섬 쪽에도 붉은색 모래의 그림 같은 해변이 있다. 워낙 인적이 드물어서, 지금까지 밟아본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싶다. 너무도 호젓해서 적막마저 감도는 섬. 그 섬으로 떠나는 여름휴가는 어떨까. 번듯한 호텔도, 콘도미니엄도 없고, 심지어 민박도 욕실이 딸린 방은 단 하나도 없지만, 그곳에서 올여름, 휴가를 보낸다면 잊히지 않을 풍경 하나쯤은 선물받을 수 있다.
# 까마득한 절벽 사이를 아슬아슬 뛰는 염소떼
굴업도는 바위로 이뤄진 섬이다. 섬 이쪽저쪽에는 제법 웅장한 바위산이 즐비하다. 해안 부근은 깎아낸 듯 바위들이 천길 벼랑을 이루고 있다. 암벽을 따라 숲으로 드는 길. 저 건너편 까마득한 암벽 위에서 검은 물체가 어른거렸다. 바위를 타고 가까이 다가갔다. 굵은 뿔을 가진 검은 염소였다. 당당한 체구의 염소는 농촌 마을에서 흔히 보던 ‘가둬기른 염소’와는 아예 격이 달랐다. 마을 주민들이 30년 전쯤에 방목한 놈이다. 워낙 위험한 바위 사이를 뛰면서 자라난 놈이라 잡아낼 수 없어서 놓아두었다고 했다. 그렇게 저 스스로 새끼에 새끼를 낳아서 지금은 250마리쯤으로 불어났+다. 섬 주변의 벼랑 위를 자세히 살펴보니 깎아지른 바위 위에 올라선 염소들이 마치 검은 점처럼 보였다.
사람이 도저히 근접할 수 없는 벼랑과 날카로운 바위를 펄쩍펄쩍 뛰어 건너는 염소의 모습은 조마조마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염소에게서는 야생 상태의 동물에게서 느껴지는 위압감이 있었다. 탄탄한 근육에서도 불끈불끈한 야생의 힘이 느껴졌다. 석양 무렵, 바다 저쪽이 떨어지는 해의 기운으로 발갛게 달아오르는데, 벼랑 위에 큰 뿔을 가진 염소 한 마리가 그 붉은 기운을 해가 다 지도록 내려다보고 있었다.
섬의 바위산 정상 쪽은 마치 모자를 쓴 것처럼 숲이 우거져 있다. 숲에는 소나무며 자귀나무, 붉나무가 자라 마치 정글처럼 우거져 있다. 반들반들한 수피의 소사나무들이 빽빽이 자란 숲 속은 대낮에도 밤처럼 어둑어둑했다. 이팝나무도, 찰피나무도, 동백나무도 군락을 지어 자라고 있었다. 서쪽의 초지에는 머위가 마치 잘 가꾼 호박밭의 호박잎처럼 촘촘하게 자라고 있었다. 그뿐일까. 해안사구에는 갯방풍과 바위솔, 바늘꽃 등이 지천이었다. 대개 산간육지 야산에서 자라는 고사리가 해안사구에 군락을 지어 자라고 있었다.
# 초지에서 꽃무늬 선명한 사슴의 눈망울과 마주치다
굴업도의 서쪽은 온통 초지다. 굴업도의 초지는 제주도의 오름과 닮은꼴이다. 풀로 뒤덮인 능선의 부드러운 곡선이 진초록으로 빛난다. 한때 땅콩농사를 짓던 밭이 묵으면서 풀이 자랐고, 그 풀밭에 한때 소를 키웠지만 1980년대 초반 소 파동이 일어나면서 소 방목도 중단됐다. 그렇게 풀은 무릎부터 어깨높이까지 성성하게 자라났다. 서쪽 초지로 가는 길은 풀밭 사이로 외줄기 길이 희미하다.
그 길을 따라가다가 깜짝 놀랐다. 풀밭 사이에 숨어있던 육중한 사슴 예닐곱마리가 한꺼번에 후다닥 달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초지의 정상 쯤에 우거진 숲으로 모습을 감췄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사슴의 도약은 마치 생고무가 튀는 듯했다. 폭발적인 속도에서 탱탱한 근육의 힘이 느껴졌다.
멍하니 사슴이 사라진 쪽을 바라보았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을 때 건너 능선의 풀숲 사이로 부시럭거리며 다른 사슴 한마리가 고개를 쳐들었다. 꽃무늬가 화려한 암사슴이었다. 멀찌감치서 한동안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유연하게 풀숲 사이를 걸으며 이쪽 눈치를 살피다가 이내 껑충거리며 숲으로 뛰어올랐다.
울타리도 가림막도 없이 같은 공간에서 한 생명체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 이 느낌을 뭐라 설명해야 좋을까.
굴업도의 사슴도 염소와 마찬가지로 주민들이 20년 전쯤 방목한 것이라고 했다. 처음에 10여마리였던 것이 새끼를 낳아 200여마리로 불어났다는데, 아무도 정확한 숫자는 모른다고 했다. 워낙 속도가 빠른 데다 조금이라도 인기척이 있으면 전력을 다해 달아나니 잡을 방법이 없다. 한때 주민들이 올무를 놓기도 했지만, 지금껏 단 한마리도 걸리지 않았다고 했다.
# 굴업도의 토끼섬 그리고 목너미서 만난 풍경
굴업도에는 물이 빠지면 섬과 연결되는 ‘소굴업도’가 있다. 한때 이 섬에서 토끼를 길러 ‘토끼섬’이라고 불리는데, 하루가 멀다하고 매가 토끼를 채가는 통에 지금은 토끼가 많이 줄었다고 했다. 토끼섬에서는 파도와 소금바람에 침식된 기기묘묘한 절벽이 눈길을 끈다. 이곳뿐만 아니다. 굴업도의 해수욕장과 해안에는 파도로 침식된 절벽인 파식대와 소금바람(염풍)에 침식된 해식대가 곳곳에 있다.
특히 굴업도 북쪽 해안은 놓치지 말아야 할 절경 중의 절경이다. 서쪽 해안에는 제주도의 주상절리를 연상케 하는 웅장한 바위들이 켜켜이 쌓여 있고, 동쪽 해안에도 침식을 받은 바위들이 촛대처럼 서있다.
섬 주변의 해안에 노출된 바위는 갯바위처럼 날카롭게 뜯겨진 것도 있지만, 둥글면서 거대한 바위가 바다까지 내려와 있기도 하다. 다른 섬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풍광이다. 낮은 절벽마다 주황색 주둥이를 가진 검은머리물떼새들이 제법 점잖게 앉아 있다.
이밖에도 인근의 무인도 선단여와 자라섬은 멀리서 바라보아도 빼어난 풍광을 자랑한다. 선단여는 이룰 수 없는 사랑을 한 남매의 전설을 간직한 절벽으로 이뤄진 섬으로 3개의 깎아지른 암벽이 마치 삼지창 형상으로 서있다. 각도에 따라 봉우리는 하나로, 둘로, 셋으로 보인다는데, 굴업도 어디서 바라보아도 선단여는 3개의 봉우리가 뚜렷하다.
드나들기 불편해서 손이 닿지 않았고, 손이 닿지 않아서 남겨졌던 섬, 굴업도. 그렇게 남겨졌던 섬에 곧 세련된 리조트와 골프장이 들어서게 된다. 올여름 굴업도에 다녀온다면 훼손되지 않은 상태에서 만날 수 있는 굴업도의 ‘마지막 여름’을 보게 될지도 모르겠다.
● 굴업도 가는 길 덕적
도로 들어가려면 인천에서 배를 타고 덕적도까지 가서 다시 굴업도 가는 배로 갈아타야 한다. 인천 연안여객선터미널에서 덕적도 진리까지는 쾌속선으로 50분~1시간, 일반선으로 3시간 남짓 걸린다. 쾌속선은 편도 2만1900원, 일반선은 1만2100원. 여
서 다시 문갑도-굴업도-백야도-울도-지도를 도는 완행 여객선 해양호로 갈아타야 한다.
덕적도에서 굴업도까지는 1시간 남짓. 그러나 되돌아올 때는 굴업도에서 덕적도로 바로 나오지 않고, 백야도, 울도, 지도를 거쳐 돌아나오게 되므로 2시간40분쯤 걸린다. 물때에 따라 한달에 4번쯤은 해양호가 거꾸로 지도-울도-백야도-굴업도-문갑도를
거쳐 운행하기도 한다. 인천항에서 당일로 굴업도로 들어가려면 오전 8시에 출항하는 일반선 ‘대부고속훼리5호’를 타거나, 오전 9시30분에 뜨는 쾌속선 ‘코리아익스프레스’를 타야 한다. 덕적도에 굴업도까지는 오전 11시30분에 한번 운항하는 해양호를 타야 한다.
● 어디서 묵을까
굴업도는 민박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굴업도 주민 6가구에서 민박을 운영한다. 대부분 민박용 건물을 따로 세워놓았으며 방을 많이 들인 곳은 방 숫자가 20개가 넘는다. 민박집 시설은 기대할 게 없다. 시설은 큰 차이가 없다. 화장실이나 샤워실이 딸린 방은 없다. 굴업도민박( 032...) 산장민박( 032...) 굴업민박( 032...) 고씨민박( 032...) 장씨네민박( 032...) 소야민박( 032...). 해수욕장이 넓어 텐트 등을 치고 야영을 하는 것도 고려할 만하다. 다만 필요한 물품 등은 미리 준비해서 들어가야 한다.
굴업도에는 식당 간판을 내건 집이 한 곳 있지만, 민박집에서 손님들에게 내오는 정도다. 민박집들은 대부분 식사도 내놓는데, 인근 바다에서 잡은 돌게로 담근 게장이나 자연산 돌김 등이 입맛을 돋운다. 고 기잡이가 성하지 않아 해산물이 그리 풍성하진 않지만, 피서철에는 인근 섬에서 횟감이나 해삼 등을 공수해 오기도 한다. 섬이지만 대표적인 음식은 토종닭 백숙. 어느 집에서나 닭백숙을 주문하면 놓아기른 토종닭을 쫄깃하게 삶아낸다.
<출처> 2008-07-02 /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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