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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문화일반

<弔辭> 용서하라 숭례문이여(김병종 교수) 외 남대문 폐허를 곡함(고은 )

by 혜강(惠江) 2008. 2. 12.

 

"용서하라 숭례문이여"…

무너지고 불탄게 너뿐이랴… 역사 홀대한 우리의 업보

 

김병종 서울대 교수·화가

 

 

          

 

* 숭례문이 시커먼 잔해만 남은 모습을 드러내자, 11일 많은 시민들이 마치 ‘숭례문의

죽음’을 애도하듯이 숭례문 잔해 앞에 조화를 놓고 있다.(조선일보 정경열 기자)

 

 

   오, 숭례문이여. 이 죄를 어찌할꼬. 대체 어찌할꼬. 600년의 세월을 민족과 함께했던 그 문은 무너져 버렸다. 검은 연기와 불길 사이로 그렇게 내려앉았다. 호기롭던 양녕대군의 글씨가 새겨진 현판은 바닥으로 내팽개쳐지고 곱고 단아하던 단청들은 불길의 혀가 삼켜버렸다. 하늘을 향해 날렵하던 누각은 검은 그림자처럼 흔들리다 사라져 갔다. 임진왜란의 전화 속에서도, 6·25의 포화 속에서도 굳건히 살아남아 민족과 명운을 함께했던 그 역사의 문은 처연하게 무너졌다. 무너지고 불탄 것이 어찌 집뿐이랴. 불탄 기와들이 와르르 쏟아져 내릴 때 우리의 마음도 함께 무너지고 잿더미가 되어버렸다.

 

   세계에 나가 높은 집을 짓는다고 자랑하지 말아라. 오늘 우리는 다만 부끄럽다.

 

   숭례문. 애초에 그것은 세월을 이고 선 왕조의 집 한 채만은 아니었다. 그저 숨결 없이 서 있는 흙과 나무로 된 누각일 뿐이었다면 이 억장 무너지는 슬픔을 설명할 길이 없다. 차마 아침이 오는 것이 두려워 흐린 구름이라도 겹겹이 드리워 동터 오는 하늘빛을 막아주었으면 싶었던 참담한 마음 또한 설명할 길이 없다. 국보 1호라서, 2호보다 더 소중하다는 그런 숫자놀음의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이 우리의 혈육이었고 숨결이었음을 차마 뉘라서 부인할 수 있으랴.   

 

   1398년 조선왕조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이후, 숭례문은 늘 우리와 가까운 곳에 있었다. 여러 차례의 개·보수 공사를 통해 상처와 흉터들을 제 안에 간직한 채로, 한민족의 영광과 고난의 순간들을 고스란히 함께해 왔다. 이 땅과 백성들이 찢기고 아파하고 울부짖던 순간순간을 같이 견뎌내었다. 주린 배를 움켜쥐어야 했던 시절에도, 기적적인 발전을 이루어냈던 시절에도 거기 그렇게 서 있었다. 새벽에 일터로 나가는 사람들을 지켜보았고 달랑 가방 하나 들고 서울역에 첫발을 내디딘 사람들에게는, 설렘과 희망을 심어주었다. 민초들의 발길과 숨결이 닿는 바로 곁에서 한 식구처럼 볼 것, 못 볼 것 죄다 보아오며 그 자리를 지켜왔다. 그리 장엄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았지만, 수더분한 낯빛으로 우리와 눈을 맞추어왔다. 민족의 자랑이자 상징으로서, 역사의 증언자로서 언제까지나 함께할 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사라져 버렸다. 말없는 것들은 이렇게 사라지고 나서야, 남은 사람의 가슴을 찢어놓는가. 오늘 숭례문을 불태워버린 것은 바로 우리다. 역사의 유물로만 밀쳐두고 진정 가슴에 담아 귀히 간직할 줄 몰랐던 우리의 업보이다.

 

   재난의 기억은 유난히 빨리 잊혀진다. 불길에 휩싸이던 낙산사의 기억도, 수원 화성의 화재도 우리는 잊어버렸다. 숭례문의 불길은 역사가 오늘 우리에게 다시 내린 아픈 채찍이다. 더 이상은 부끄러운 일들을 잊지 말자. 무너진 자리에 숭례문의 역사를 다시 세우자. 우리의 부끄럽고 아픈 오늘을 후손들에게 낱낱이 전하며 철저한 고증을 거쳐 복원하자. 이것이 그나마 역사 앞에 속죄할 수 있는 길일 것이다.

 

   우리 곁을 떠나간 숭례문이여.  

   하늘은 잔뜩 흐리고 차마 나는 얼굴 들고 조사(弔辭)나마 읽을 수가 없구나.

   용서하라 숭례문이여. 미안하다 숭례문이여. 

 

 

 

  서울대 김병종 교수.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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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시>

 

        

      남대문 폐허를 곡함

 

 

            

머리 풀고 울어에야 하리
옷 찢어 던지며 분해야 하리
오호 통재
이 하루아침 남대문 폐허를
어찌 내 몸서리쳐 울부짖지 않으랴

돌아보라
6백년 연월 내내 한결이었다
이 도성 남녀노소들 우마들
이 나라
이 겨레붙이 모진 삶과 함께였다

혹은 청운의 꿈 안고 설레어 여기 이르면
어서 오게 어서 오시게
두 팔 벌려 맞이해 온 가슴인
나의 남대문이었다

 

혹은 산전수전의 나날 떠돌이 하다
여기 이르면
어디 갔다 이제 오느뇨
활짝 연 가슴 밑창으로 안아줄
너의 남대문이었다

단 하루도 마다하지 않고
단 하룻밤도 거르지 않고 지켜서서
숙연히
감연히
의연히
나라의 기품이던
저 조선 5백년
저 한민족 1백년의 얼굴이었다

온 세계 누구라도 다 오는 문 없는 문
온 세계 그 누구라도 다 아는
만방 개항의 문
정녕 코리아나의 숨결
서울 사람의 눈빛 아니었던가

 

이 무슨 청천벽력의 재앙이냐
이 무슨 역적의 악행이냐
왜란에도 호란에도
어제런듯 그 동란에도
끄떡없다가
이 무슨 허망의 잿더미냐

여기 폐허 땅바닥에 엎드려 곡하노니

여기서 주저앉지 말고 멈추지 말고
떨쳐 일어나
다시 바람 찬 천년의 남대문 일으켜낼지어다
여봐란듯이           

저봐란듯이
만년의 내일 내 조국의 긍지 우뚝 세워낼지어다

 
 
                   ▲ 고은

 

 

<2008. 2. 12자 조선일보 사설>

  

4800만 국민 지켜보는 가운데 불타 무너진 숭례문(崇禮門)

 

  대한민국 수도 한복판, 국보 1호 숭례문(남대문)이 하룻밤 새 잿더미가 됐다. 임란(壬亂)과 호란(胡亂)을 거쳐 6·25까지 갖은 전란(戰亂)도 견뎌내며 600년 세월을 견뎌온 서울의 큰 대문이 숯덩이로 무너지는 모습을 국민은 속절없이 지켜봐야 했다. 민족의 얼이 담긴 나라의 상징이 소방관 330명, 소방차량 95대가 동원되고도 속수무책으로 불타버린 5시간 사이 세계 10대 경제대국을 뽐내던 대한민국이 어떤 나라인지가 여지없이 발가벗겨졌다. 양녕대군이 썼다는 '숭례문(崇禮門)' 현판이 매트리스도 받치지 않은 맨바닥으로 떨어져 나뒹구는 모습은 우리 모두가 추락하는 모습 그 자체였다.

  숭례문에 불이 났다는 신고가 서울 중부소방서에 들어온 것이 10일 밤 8시50분, 소방관들이 처음 출동해 불을 끄기 시작한 것은 3분 뒤인 8시53분이었다. 발화 시점이 밤 8시48분쯤으로 추정되고 있으니 불이 난 지 불과 5분 만에 불 끄기가 시작된 셈이다. 그러고도 결국 숭례문을 몽땅 태워먹고 마는 거짓말 같은 사태가 벌어졌다. 접근이 어려운 것도 아니고 소방인력이 부족한 것도 아닌 수도 한복판, 만인이 보는 앞에서 일어난 일이다.

  소방당국은 밤 9시30분쯤 불길이 잦아들고 연기만 나자 다 꺼진 것으로 생각했지만 남은 불길이 건물 안쪽에 숨어 있는 것을 몰랐다. 소방관들은 옛 목조건물의 복잡한 내부 구조에 익숙하지 않았고, 지붕에 방수 장치가 돼 있어 밖에서 퍼붓는 물이 안으로 배어들지 않는다는 사실도 몰랐다. 10시40분 불길이 다시 치솟은 다음에야 기와지붕을 뜯고 물을 퍼부어 불을 끄려 했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4800만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작은 불'을 '큰 불'로 키워 대한민국 국보 1호를 불태워 버린 것이다.

  소방당국은 2005년과 2006년 양양 낙산사와 수원 화성 서장대가 각기 산불과 방화로 타버린 뒤로 문화재 소방에 대한 걱정과 근심이 흘러 넘쳤는데도 겉핥기 대책과 남의 눈을 의식한 형식적 훈련으로 그쳐왔다. 서울 중부소방서는 숭례문 내부 도면(圖面)조차 갖고 있지 않았다. 매년 되풀이한 가상훈련도 건물을 둘러보고 소화전(消火栓)이나 점검하는 형식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숭례문 방화 설비는 수동식 소화기 8대와 상수도 소화전이 전부였다. 화재에 특히 약한 목조건축물인데도 요즘 웬만한 건물이면 다 갖고 있는 화재 경보기나 스프링클러도 없었다.

  일본은 매년 1월 26일을 '문화재 방화(防火)의 날'로 정해 지방자치단체들이 소방훈련과 문화재 긴급피난, 소방장비 점검 등을 한다. 이 날은 1949년 1월 26일 나라(奈良) 호류지(法隆寺)에 있는 국보 벽화가 화재로 크게 손상되고, 이어 교토 긴카구지(金閣寺)까지 방화로 소실된 뒤 제정됐다. "문화재를 화마(火魔)에서 지키자"는 구호를 내건 훈련에는 각 지역마다 소방대원과 주민, 사찰 승려 등 수백 명이 참가한다.

  국보 1호 관리를 위임 받은 서울시는 2005년 "숭례문을 시민에게 돌려준다"며 주변에 광장을 만들고, 2006년 중앙통로까지 일반에 개방했다. 숭례문은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곳이 됐지만 중구청 직원이 평일 3명, 휴일 1명씩 오전 10시부터 오후 8시까지 근무한다. 이들이 퇴근한 밤 시간엔 무인경비업체의 CCTV와 적외선 감지기에만 감시를 맡겨놓았다. 개방한 만큼 더 엄격한 보호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상식도 없었다는 이야기다.

  문화재청은 불이 난 지 두 시간이 지나서야 대전 문화재청에 있는 숭례문 도면을 갖고 왔다. 지난해 5월 발간한 '화재 위기대응 현장조치 매뉴얼'에는 문화재에 불이 났을 때 어떻게 불을 꺼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 내용은 하나도 없다. 2006년에야 124개 중요 목조문화재에 방재시스템 구축을 시작했지만 해인사 등 4곳에만 설치공사를 했을 뿐 우선순위 48위인 숭례문 차례는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래 놓고는 11일 아침 일찍 흉물이 돼버린 숭례문에 가림막을 세워 국민의 눈으로부터 감추는 공사부터 서둘렀다.

  소방당국은 "화재 초기 문화재청이 '문화재가 손실되지 않게 신중하게 불을 꺼 달라'고 해 적극적으로 진화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밤 9시35분쯤에야 문화재청으로부터 "진화가 우선이니 숭례문 일부를 부숴도 좋다"는 통보를 받았지만 이미 불길을 잡기엔 늦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문화재청은 "진화는 현장의 진화책임자가 상황을 판단, 결정하는 것"이라고 소방당국 쪽으로 책임을 미뤘다.

  문화재청은 "200억원을 들여 2~3년이면 숭례문을 원형대로 복원할 수 있다"고 큰소리를 치고 있다. 문화와 문화재의 의미 자체를 모르고 있는 것이다. 이제 조선 태조 7년(1398년) 세우고, 세종 29년(1447년) 고쳐지어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견뎌내고, 6·25전쟁의 민족비극을 지켜봐 왔던 우리 역사의 증인인 숭례문은 영원히 사라졌다. 새로 세워지는 숭례문은 원래 것과 모양만 비슷한 21세기 건축물일 뿐이다.

  국민이 입은 마음의 상처 역시 쉽게 복구되지 않을 것이다. 국민은 나라의 얼굴이 어이없게 타 사라지는 현장을 목격하면서 경제대국이라고 거들먹거렸던 이 나라가 사실은 모래 위에 세워진 허상(虛像)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뼈에 저미듯이 절절이 느꼈다.  서울 사는 외국인들이 이 모습을 보면서 대한민국을 뭐라 부르며 어떻게 이 나라를 믿을 수 있겠는가.
 
    <출처> 2008. 2.12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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