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산도
노을에 취하고 홍어맛에 취하다
- 정약전, 최익현의 귀양지 -
글·사진 남상학
‘남몰래 서러운/ 세월은 가고 물결은 천번 만번/ 밀려오는데 못 견디게 그리운/ 아득한 저 육지를 / 바라보다 검게 타버린 검게 타버린/ 흑산도 아가씨~’
'흑산도 아가씨'란 노랫말처럼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데다 뱃길마저 험해 예전에는 귀양지로 이름이 높았던 흑산도. 그러나 이제는 서남단 인근 어장의 전진 기지로서 어선의 입출항이 잦고, 일주도로가 생긴 뒤부터 홍도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하던 비경들이 속속 알려지면서 천혜의 관광지로서 부상하면서 육지의 관광객을 부르고 있다.
흑산도는 전남 신안군 흑산면의 본섬(어미섬)으로 목포에서 서남방으로 해상 92.7㎞ 떨어져 있다. 최서남단 해역에 위치한 이 섬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신라 무장(武將)·국제무역가인 장보고(張寶高)가 완도에 청해진(淸海鎭)을 설치한 이후부터라고 전해지며, 물빛과 산빛이 푸르다 못해 검다고 해서 흑산도(黑山島라 불린다. 외지인들에게는 알싸한 맛의 홍어 혹은 가수 이미자가 부른 가요 ‘흑산도 아가씨’ 정도로 기억되는 섬이다. 섬의 면적은 19.7㎢, 해안선 길이는 41.8㎞에 달하는 제법 큰 섬이다.
흑산면의 관문인 예리항을 중심으로 면소재지인 진리마을은 관내의 모든 행정사무 및 문화시설이 집중되어 있으며, 그 외 13개의 자연부락으로 형성되어 있다. 산지가 대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논농사는 전무한 실정이고, 농지라고는 밭작물을 조금 재배하는 정도이며, 주로 수산업과 관광산업에 의존하고 있다.
여객선과 유람선의 선착장은 흑산도 북단의 바다를 감싸 안고 있는 예리항으로 입출항한다. 그리고 흑산도 예리항은 동지나해와 서남해 인근 어장의 전진기지로서 중국 어선들이 많이 입출항하는 있어 늘 북적거린다. 그리고 여관 등 숙박시설과 식당들이 성업 중이다.
정약전의 유배지, 자산문화도서관
또 예리항 흑산도여객터미널 뒤에는 이곳에서 귀양살이를 한 정약용의 《자산어보(玆山魚譜)》에서 이름을 딴 자산문화도서관이 있다. 이곳은 정약전의 생애와 저작 등을 소개하는 전시관을 비롯하여 인터넷 실, 도서관 등을 마련 흑산도종합문화센터 역할을 하고 있다.
흑산도는 조선시대에 유배지로 악명이 높았다. 과거 돛단배로 육지에서 흑산도까지는 보름이 넘게 걸렸다. 다산 정약용의 둘째형인 조선 후기 문인 손암 정약전(1758~1816)은 천주교 포교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신유사옥에 연루돼 1801년 흑산도에 유배되었다.
정약전은 1801년 신유사옥 당시 신지도(완도)와 우이도(당시 소흑산도)를 거쳐 흑산도로 유배됐다. 신유사옥은 어린 순조가 등극하자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하면서 노론 벽파가 시파와 남인 세력을 몰아내려고 벌인 천주교 박해 사건이다. 정약전은 흑산도에서 15년간 유배생활을 하며 《자산어보》를 펴냈다.
정약전은 자신을 유폐하는 대신 섬사람들과 어울리며 유배살이에 적응했다고 전해진다. 그가 섬 친구들과 흑산도를 유람하며 섬 생활을 즐긴 생활상이 그가 남긴 시들에 등장한다. 칠락산 탐방로 입구가 있는 소사리 근처 숲으로도 놀러 갔나 보다.
‘해산이 마치 거미와 같아/ 산줄기가 사방으로 달려가네/ 골짜기는 각각 조수를 머금고/ 마른 흙은 다만 봉우리들뿐/ 집에 있어도 배를 탄 듯/ 고개 들면 물리도록 아득한 물/ 접때 내가 바라본 소사는/ 자못 괴로운 마음 풀어줄 만했지/ 마침내 계고재 노인과 기약을 해서/ 향기로운 이곳에 유람 왔다네(이하 생략)’(‘소사미 술회’ 中, <손암 정약전 시문집>)
그러나 그는 유배생활 중에도 허송세월하지 않고 학자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내어 희대의 역작인 《자산어보》를 저술했다. 《자산어보》는 그가 이곳에 머물며 흑산도 근해에 회유하는 어류와 해산물 등 155종을 채집하여 명칭, 형태, 분포, 실태 등 매우 방대하고도 엄밀한 사실적 내용을 기록한 책이다. 책이름을 《자산어보》라고 한 것에 대하여 저자는 서문에서, “‘자(玆)’는 흑이라는 뜻도 있으며 또 흑산이라는 이름은 음침하고 공포심이 일어 집으로 보내는 편지에 자산이라 일컬었기 때문에 ‘자산’이라는 말을 제명에 사용했다”고 설명하였다.
이어서 이 책을 저술하게 된 경위에 관하여 “흑산도의 바다에는 어족이 다양하나 이름이 알려져 있는 것이 드물어 어보를 편성하고자 섬사람들을 방문하였다. 그러나 사람마다 부르는 호칭이 달라서 그 지방에 서식하는 물고기 표준이름을 지칭하기가 어려웠는데, 장덕순(張德順)이라는 학자가 초목과 조어(鳥魚)에 지식이 많아 그와 함께 연구하여 책을 완성하였으며, 곁들여 해금(海禽)과 해채(海菜;미역)도 다루어 후인의 고험(考驗)에 도움이 되게 했다”고 하였다.
귀양살이의 따분한 생활이 한 학자의 연구 열기로 이어져 이토록 소중한 학문적 업적을 이루게 한 것을 생각하면 고맙기 그지없다. 더구나 강진 땅에 유배된 동생 정약용을 생각하며 학자로서의 본분에 충실했던 것이다.
정약전은 1814년 동생 정약용이 유배에서 풀려난다는 소식을 듣고, 흑산도보다는 육지와 가까운 우이도로 유배지를 옮겼다. 거기서 동생을 기다렸지만, 끝내 상봉하지 못했다. 그는 1816년 우이도에서 생을 마감했다.
일주도로를 따라가는 흑산도 관광
현재 흑산도에는 해안을 따라 섬 전역을 한 바퀴 돌 수 있는 연장 24km의 일주도로가 닦여져 있다. 흑산도를 한 바퀴 도는 일주도로는 1996년 개통했다. 도로포장은 2010년에야 완공했다. 이 길을 따라가면 흑산도의 아름다운 자연과 문화유적을 거의 다 볼 수 있다. 홍도에서 해상유람선관광을 하고 온 터라 흑산도에서는 내륙관광을 하기로 했다.
우리가 탄 버스는 예리를 출발하여 시계 반대방향으로 지석묘군(고인돌), 성황당, 배낭기미 해수욕장, 옥섬, 읍동, 삼층석탑과 석등, 반월성, 동백나무 숲, 봉화대, 흑산도아가씨 노래비, 상나봉 전망대, 마리, 지도바위, 비리, 간첩동굴, 홍앞치, 곤촌리, 심리, 암동, 사리포구, 정약전유배지, 칠형제섬, 소사리, 세깨해수욕장, 천촌리, 면암 최익현 유적지, ‘유배 문화 공원’, ‘고래 공원’, ‘지도 바위’ 등이다. 그중 ‘유배 문화 공원’은 흑산도 동남쪽 사리에 있다. 아담한 돌담과 포구가 정겨운 마을이다. 샘골을 거쳐 예리로 돌아온다.
지석묘군과 초령목
먼저 만나는 것은 진리에 있는 도지정문화재자료 194호로 지정된 지석묘. 선사시대 것으로 추청 되는 8기의 지석묘는 타원형 남방 형식의 무덤으로, 이 무덤 속에서는 줄무늬, 빗살무늬 토기와 생활도구들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또 진리에는 한때 천연기념물로 지정되기도 했던 초령목(招靈木)이 있다. 이 초령목은 가지를 꺾어 불전에 놓으면 귀신을 부른다고 해서 일명 귀신나무로 불린다. 초령목은 귀신을 부른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진리 성황당 숲에 심겨졌던것으러 여겨진다. 수령이 320년쯤 되는 것으로 초령목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아깝게도 수년 전 고사(枯死)하여 죽은 기둥과 가지만 남았으나 다행히 주변에 새끼 초령목 30여 그루가 자라고 있다.
초령목에서 50여m 위쪽으로는 TV드라마 <전설의 고향>의 무대인 진리 성황당이 있다. 진리마을 당산에 위치한 흑산도의 본당으로 일명 처녀당이라고도 한다. 이곳에는 흑산도에 옹기 팔러 온 총각에게 연정을 품은 처녀 귀신이 배가 출항할 때 풍랑을 일으켜 결국 총각은 두고 배는 떠나고, 남겨진 총각은 당산 소나무 위에 올라가 고향을 그리워하며 피리를 불다 떨어져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주위에는 상록수림과 삼층석탑 및 석등과 사촌서당 같은 수많은 문화유적이 있다.
배낭기미해수욕장
진리에는 바지락을 잡을 수 있는 배낭기미해수욕장이 있다. 깨끗한 모래와 약간의 자갈이 섞여 있는 천연해수욕장으로 물이 유리알처럼 맑고 경사가 매우 완만하다. 길이 200m, 폭 60m의 작은 해변이지만 반구형 백사장으로 소나무 숲까지 있어 운치가 있다. 이곳에선 바다를 분홍빛으로 물들이며 떠오르는 일출과 그 그림자 아래로 지나가는 고깃배의 정경을 볼 수 있고, 물이 빠지는 시간에는 모래밭에서 바지락을 주워 담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해변에서 야영도 가능하다.
상나봉 정상에 오르다.
우리를 태운 버스는 배낭기미해수욕장을 지나 섬 내륙관광의 키포인트라고 일컫는 상나봉 정상을 향해 오른다. 오른 길은 S자 모양의 도로(용고갯길)를 몇 구비 돌아 오른다. 정상에 오르니 흑산도아가씨 노래탑이 서 있고, 산봉우리 뒤로 전망대가 있다. 마치 우리를 환영이라도 하는 듯 ‘흑산도아가씨’의 구성진 가락이 울려 퍼진다.
전망대로 오르는 길에서 진리2구 쪽으로 흩어진 섬을 바라보면 마치 백두산 천지를 보는 듯한 광경을 볼 수 있다. 섬들로 가려진 움푹 패인 곳에 바닷물이 담겨 있는 형상이다.
그리고 전망대 우측으로 성터가 있는 봉우리에 오르면 상나산(230m) 정상, 봉화대다. 이 봉화대는 고려 때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곳에 서면 멀리 홍도, 장도, 다물도, 대둔도 등 흑산군도의 크고 작은 섬들과 반대편으로는 진리 2구 마을 앞바다가 눈 아래 펼쳐진다. 이러한 지리적 여건으로 이곳 정상은 일출, 일몰 포인트로 최적의 장소가 된다. 장도 쪽으로는 서해 낙조의 애잔함을 즐길 수 있고, 진리2구 쪽으로는 바다를 박차고 솟아오르는 일출을 만날 수 있다.
멋진 풍광을 선사하는 해안 드라이브
상나봉에서 해안도로를 따라 섬을 일주하는 육로관광 코스는 해안을 달리다보면 아름다운 해안선 속에 숨어 있는 비경들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굽이도는 해안선과 어쩌다 나타나는 그림 같은 해안 마을과 양식장, 갖가지 바위의 형상, 점점이 떠있는 섬들, 그 사이로 파도를 일으키고 지나가는 어선들이 모두 액자 속의 그림과 같다.
흑산도 해안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환경을 생각하여 가설한 특별한 다리를 발견하게 된다. 도로건설 때 자연환경파괴를 최소화하기 위하여 교각(기둥)을 세우지 않고 특수공법으로 에이치 빔을 이용해서 난간형의 콘크리트도로를 튼튼하고 안전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콘크리트 벽에는 특수페인트로 흑산도와 관련된 벽화도 아름답게 그려놓았다.
상라봉에서 마리를 지나 비리 가는 길에는 ‘지도바위’가 있다. 있다. 흑산도의 지도바위는 신기하게도 바위구멍이 한반도 지도를 빼닮았다. 오랜 세월 파도에 의해 깎인 바위구멍(해식동)은 보는 위치에 따라 모양이 달라지다가 정면에서 바라볼 때 한반도 형태가 확연히 드러난다. 마치 큰 바위에 지도를 조각해 놓은 듯 선명해 멀리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신기한 모양에 감탄하는 동안 어느새 예쁘고 작은 마을과 해안에 만들어 놓은 그림 같은 모습에 눈길이 닿는다. 점점이 떠 있는 양식장이 한 편의 설치작품을 연상케 한다. 달리던 버스는 약수터에 잠시 멈춘 채 흑산도 약수 물맛을 보라고 한다. 무더운 날씨에 흑산도 약수는 최고의 청량제였다.
정약전이 머물던 서당 복성재,그리고 유배문화공원
사리에 있는 복성재는 정약전의 유적으로 흑산도 최초의 서당인 사촌서당이다. 그는 이곳에서 남서해안 바닷고기와 해산물 등 156종을 채집, 생장 실태를 담은 고유어류학 총서인 《자산어보》 를 집필하고 주민들에게 학문을 강의한 서당 형태의 생활 공간이다.
이곳에 신안군청이 ‘유배 문화 공원’을 만들고 옛 흑산도 유배인들을 기억하는 장소로 꾸몄다. 정약전이 아이들을 가르친 ‘사촌서당’을 중심으로 유배 문화 체험장(한옥 숙박 시설), ‘자산어보원’, 정약전 동상, 손암정(정자), 야생화원, 사리 성당 등이 자리를 잡았다. 자산어보원엔 정약전, 최익현 등 고려~조선 시대 흑산도 유배인들과 각종 바다 생물을 소개하는 비석을 세웠다. 유배인 거주지를 재현한 한옥 숙소는 전통 한옥을 본떠 초가지붕과 툇마루를 세우고 문에 창호지를 발랐다.
천촌리 최익현 선생 유배지
사리에서 소사리를 지나면 천촌리. 학자이며 의병장이기도 했던 구한말의 유학자 면암 최익현 선생도 흑산도 천촌리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면암 최익현은 1876연 2월 소흑산도(우이도)에 유배되었다. 제주도에서 귀양살이를 하다 해배된 뒤에 1876년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어 조정이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자 최익현은 궐문 앞에 도끼를 메고 ‘이 도끼로 내 목을 먼저 치라’고 상소를 올렸다가 다시 소흑산도로, 이듬해 고종의 지시로 더 먼 대흑산도로 쫓겨 왔다.
흑산도에 유배된 최익현은 4년 동안 가시덤불 가득한 집에 갇혔다. 위리안치(圍籬安置)라고 한다. 최익현 또한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최익현은 흑산도 곳곳을 유람하며 흔적을 남겼다. 1878년 4월 친구들과 함께 천촌(淺村) 마을을 찾았다. 그가 말했다. “섬 바깥에서는 풍속이 퇴폐해졌으나 이곳 사람들은 명나라 관(冠)을 쓰고 공자, 맹자가 아니면 읽지 않으니 진실로 존숭할 만하구나.” 그리고 마을 바위에 글을 새겼다. ‘箕封江山 洪武日月(기봉강산 홍무일월)’ ‘기자(箕子)가 봉한 땅이요 명나라 첫 황제 주원장의 세월’이라는 뜻이다. 바위에는 주자가 쓴 시에 나오는 ‘지장(指掌)’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면암선생문집’20 ‘지장암기·指掌嵒記’)
지장암 앞에는 후일 그의 문하생인 오준선, 임동선 등이 뜻을 모아 면암 최익현 유허비를 세워 선생의 고매한 애국정신과 후학양성을 위한 뜻을 후손에게 전달코자 하였다.
한편, 지금 진리마을에도 아이들을 가르쳤던 당시의 서당 자리와 매일 아침 면암이 한양을 향해 절을 했다는 바위가 남아 있다. 최익현은 1879년 2월 9일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갔다.
청정 그대로의 세께해수욕장
소사리와 천촌리 사이에는 은밀하게 감춰진 작은 해변이 있는데 이곳이 흑산도의 또 하나의 해수욕장인 세께해수욕장이다. 세께해수욕장은 대흑산도 동쪽에 있는 해수욕장으로 아직까지 일반에 잘 알려져 있지 않아 청정한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밀가루처럼 고운 규사질의 백사장이 아기자기하며 해변 앞으로 펼쳐진 바다와 주위 풍광이 환상적이다. 바다 주변을 돌아가며 고둥을 줍는 재미도 쏠쏠하다. 새벽이면 영산도 위로 떠오르는 일출이 볼만하다.
이외에 흑산도를 가장 완벽하게 돌아보기 위해서는 유람선을 타는 게 최고. 예리항을 출발해 열목동굴→ 홍어마을→범마을 → 칠성동굴 →돌고래바위→스님바위→촛대바위→남근석→거북이바위 등을 돌아보는데 2시간 30분 정도가 소요된다. 우리는 시간이 허럭되지 않아 육지 관광으로 끝낸 것이 아쉽다.
흑산도에서 맛보는 홍어맛
저녁을 먹고 나서 가벼운 마음으로 항구로 나갔다. 고기잡이 철이 아니어서인지 많은 어선들이 정박해 있는 모습이 고즈넉하다. 마침 상라산 쪽으로 저녁하늘이 물들어 있다. 비록 산 위로 떨어지는 노을이지만 한적한 어촌에서 낙조를 감상할 수 있게 된 것은 다행이다. 고깃배의 돛대에 걸린 낙조의 모습이 남다른 풍경을 자아낸다. 하염없이 이 광경을 바라보고 걷다가 식당의 평상에 앉아 저무는 항구의 풍광을 감상하는 멋도 괜찮다.
한 친구가 불쑥 한 마디 던졌다. 그래도 흑산도 홍어맛은 보고 가야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흑산도 홍어가 유명해진 것은 오래전 일로 예리항 주변 식당들이 모두 홍어전문점인 것을 보면 흑산도 홍어가 유명세를 타는 것만은 분명하다. 많은 식당 중 좀 한가한 식당으로 찾아들었다. 8사람이 몇 점씩 먹으려면 얼마 정도면 되겠느냐고 물었다. 6만 원짜리 두 접시, 그러니까 12만원에 해삼, 전복을 서비스로 제공하겠다는 것이다. 왜 이렇게 비싼가 했더니, 극심한 추위 속에 잡다보니 위험이 뒤따르고, 게다가 어획량이 줄어 연간 100톤의 적은 양밖에 잡히지 않아 흑산 홍어는 구하기도 힘들다고 한다.
《본초강목》에는 홍어를 '태양어(邰陽魚)'라 하고, 모양이 연잎을 닮았다 하여 '하어(荷魚)'라고도 하였으며, 생식이 괴이하다 하여 '해음어(海淫魚)'라고도 하였다. 《자산어보》에는 '분어'라 하였고 속명을 '홍어(洪魚)'라 하였다. 몸이 마름모꼴로 폭이 넓으며 머리는 작고 주둥이는 돌출되어 있다. 꼬리의 등쪽 중앙부분에는 수컷의 경우 1줄, 암컷은 3중의 날카로운 가시가 줄지어 있다. 수컷은 배지느러미 뒤쪽에 막대기 모양의 2개의 교미기가 있다.
왜 흑산도 홍어가 유명한가? 흑산도 해역에선 예로부터 홍어가 많이 잡혔다. 매년 추위가 몰아치는 11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가 성어기다. 그런데 흑산도 사람들이 물고기를 잡아 육지에 팔러 나갈 때 달포가 걸려 뭍에 도착하면 대부분의 고기가 상해 먹지 못하였으나 유독 홍어만이 먹어도 탈이 나지 않아 그때부터 며칠씩 보관하였다가 먹는 전통이 내려왔다 한다. 또 하나, 흑산 홍어가 우수한 것은 군산이나 인천 근해에서 잡는 것보다 그 맛이 좋고 육포 자체에 착 달라붙는 찰진 기가 있기 때문이란다.
홍어는 톡 쏘는 화끈한 맛이 생명이다. 회를 만들어 먹거나 국을 끓여 먹기도 하는데, 홍어가 식도락가들의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은 화끈한 감칠 맛 때문이다. 홍어를 즐겨 먹는 사람들은 생것을 옹기그릇에 담아 놓았다가 며칠 후에 꺼내면 화끈한 냄새가 나도록 약간 상하게 되는데, 이것을 썰어 홍어회로 먹으면 입안에 매운맛이 확 퍼진다. 국을 끓일 때도 이 재료를 그대로 쓴다. 이런 짜릿한 미각에 자극되어 홍어를 찾는다. 막걸리 안주로 먹는 것을 ‘홍탁’이라 하고, 삶은 돼지고기를 얇게 썰어 배추김치와 함께 먹는 것을 ‘삼합(三合)’이라 하는데 그 맛은 말로써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다.
대흑산도에서 발길을 돌려야 하는 것이 못내 아쉽다. 천혜의 관광보고로 특유의 문화유적이 많은 인근의 가거도, 영산도, 다물도, 대둔도 등은 언제 한번 가보나. 흑산도, 홍도와 함께 모두가 다도해해상국립공원에 속해 있는 섬들이거늘. 다음 기회를 기약하며 목포행 배에 올랐다.
◎여행정보
교통
목포항에서 흑산항까지 하루 3차례 여객선을 운항한다. 오전 7시50분, 낮 12시50분, 오후 3시30분 출항. 소요시간 2시간. 흑산항에서 목포항으로 가는 여객선도 하루 3차례 여객선을 운항한다. 오전 9시, 11시10분, 오후 4시10분 출항.(동절기 운항 시각 변동 가능성 있음)
섬내 교통
버스 : 흑산도 일주도로에 신안군 공영버스가 다닌다. 동쪽 방면으론 하루 3차례, 서쪽 방면으론 하루 10차례 운행한다. 막차는 짝숫날엔 동쪽 방면으로 홀숫날엔 서쪽 방면으로 간다. 예리, 진리, 읍동, 마리, 비리, 곤촌, 심리, 암동, 사리, 소사리, 천촌리, 청촌리 등 12개 정류장에 정차한다. 예리~소사리는 동쪽, 서쪽 방면 거리가 비슷하다. 요금은 1000원. 현금을 준비해야 한다. 공영버스를 이용할 계획이라면 미리 시간표와 정류장 위치 등을 확인하는 게 좋겠다.
콜택시 : 흑산도에 콜택시는 총 7대다. 한 콜택시 기사에게 문의한 결과, 사리~예리 편도 2만5000원, 일주도로 한 바퀴(주요 관광지 사진촬영 시간 포함) 6만원.
숙소 : 흑산도 호텔, 모텔, 여관 등은 예리와 진리에 몰려 있다. 유배체험을 하려면, 사리 ‘유배 문화 공원’에서 숙박할 수 있다. 3개동에 온돌방 2개, 실내 화장실 1개가 있다. 난방과 온수 시설, 침구류를 갖췄다. 세면도구는 지참해야 한다. 가격은 1개 동 1박 기준 5만원.(문의 박준호 사리 이장 010-9435-5348)
식당 : 흑산도는 삭히지 않은 홍어회, 장어간국(말린 바닷장어를 넣고 끓인 국)이 별미다. 태양식당(예리2길 45-2/061-275-9239)은 장어 또는 우럭간국 4만원부터, 홍어회 4만원부터. 대림수산식당(흑산일주로 20/010-5205-2045)은 홍어회 3만원부터, 장어 또는 우럭간국 5만원부터(4인 기준).
기타 여행지
*옥섬은 고려 시대 해적들을 가둔 섬으로 전해지는 작은 섬이다. 연륙교로 걸어 들어갈 수 있다.(진리 산4)
* ‘신들의 정원’은 소나무와 초령목 등 나무가 무성한 당숲이다. 바다까지 자연관찰로가 이어진다. 들머리에 마을 사람들이 번영과 무사고, 풍어를 빌던 진리당과 용왕당이 있다.(진리 산77)
*고래 공원은 1960년대 후반까지 흑산도에서 고래파시(어판장)가 열린 곳이다. 주변에 과거 고래 어판장이었던 폐건물도 남아 있다.(예리 1길 162-5)
*철새전시관과 박득순 미술관(진마을길 53)
문의 : 흑산항 관광안내소 061-246-5191, 목포 여객터미널 1666-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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