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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여행기 및 정보/- 남해

통영 한산도, 이충무공의 빛나는 호국(護國)의 현장

by 혜강(惠江) 2008. 2. 12.

통영 한산도

 

이충무공의 빛나는 호국의 현장

 

 

글·사진 남상학

 

 



* 세계 해전사상 빛나는 한산대첩 현장<출처 : 야후 '한산대첩'>

 

 

   한산도를 찾아가는 날, 역사의 현장답지 않게 바다는 유난히 고요하했다. 400여년 전. 그 빛나는 격랑의 사건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산도 앞바다는 꿈꾸는듯 잔잔하기만 했다.

  한산도 여행의 시작은 통영이다. 통영항에서 배를 타고 항구를 벗어나면서 바로 하얀 부표(浮漂)가 사방으로 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청정해역 1호로 지정된 곳답게 파란 바다와 어울린 하얀 부표의 극대비가 아주 인상적이다. 

   한산섬이 보일 때 쯤 지나치게 되는 죽도. 임진란 때 대를 심어 화살을 만들어 썼다는 곳이다. 지금은 충무관광호텔의 사설 해수욕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우리가 탄 배는 미끄러지듯 한산도 앞바다에 이르렀다.

 

 

* 한산도 앞바다에 세운 거북등대가 이곳이 한산대첩의 격전지였음을 알려준다.



  대섬을 지나 좁은 협곡 같은 바닷길을 지나면서 하얀 색의 거북등대가 보였다. 통영항에 정박해 둔 거북선에 이어 이 거북등대는 이곳이 이충무공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그리고 바로 이 바다가 한산대첩지의 현장임을 알려준다. 제승당 입구 바다 암초위에 세워진 거북등대는 1963년 12월에 세운 것으로 지금은 이 지역을 항해하는 선박들을 인도해 준다.

 그 머리글자 ‘한’과 ‘려’를 따서 지은 이름으로, 한산도는 여수까지 이어지는 한려해상공원의 동쪽 시작점이 되어 뱃길을 따라 곳곳에 뛰어난 경관이 펼쳐진다.

  특히 한산도가 자랑스러운 국난극복의 역사적인 고장이라는 점이다. 한산도는 조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당시 이충무공이 왜적을 무찔러 풍전등화(風前燈火) 같은 위기에서 조국의 운명을 구한 전적지인 한산대첩(閑山大捷)의 현장이다. 청사(靑史)에 길이 빛날 한산대첩의 실상은 이렇다.



* 한산도 주변의 지도와 제승당 경내 안내도 



『1592년(선조 25) 5월 29일부터 제2차로 출동한 이순신의 수군은 6월 10일까지 사천 선창·당포·당항포·율포해전 등에서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적은 육지에서 계속 승리하면서 해상에서도 다시 머리를 쳐들기 시작하여 가덕도와 거제도 부근에서 10여 척~30여 척의 적함이 떼를 지어 출몰하면서 육군과 호응하고 있었다. 

   보고를 접한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우수사 이억기(李億祺)와 연락하여 재차 출동을 결정하였다. 이때 일본은 해상에서의 패전을 만회하기 위하여 병력을 증강, 와키사카 야스하루의 제1진은 70여 척을 거느리고 웅천 방면에서 출동하고, 구키 요시타카의 제2진 40여 척과 제3진의 가토 요시아키도 많은 병선을 이끌고 합세하였다.

   이에 이순신은 7월 6일 이억기와 더불어 90척을 거느리고 좌수영을 출발, 노량에 이르러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의 전함 7척과 합세하였다. 7일 저녁 조선 함대가 고성(固城) 땅 당포에 이르렀을 때 적함 대·중·소 70여 척이 견내량에 들어갔다는 정보에 접하고 이튿날 전략상 유리한 한산도 앞바다로 적을 유인할 작전을 세웠다.

   이순신 장군은 한산도 대첩에서 학익진 전법을 사용하였다. 학익진은 학이 날개를 펴고 나는 모양과 같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이 전법에서는 거북선이 맨 앞에 가고 거북선의 양쪽에 판옥선들이 따른다. 그러다 적의 배가 있는 곳에 다다르면 여러 판옥선이 학 날개 모양으로 펼쳐져 적군을 둘러싸고 공격한다. 학익진 전법은 왜군이 당황하여 갈팡질팡하게 함으로써 우리 수군이 큰 승리를 거둘 수 있도록 해 주었다. 

 

 

 * 학익진 전법


 

  한산도는 거제도와 고성 사이에 있어 사방으로 헤엄쳐나갈 길도 없고, 적이 궁지에 몰려 상륙한다 해도 굶어죽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이리하여 먼저 판옥선 5, 6척으로 하여금 적의 선봉을 쫓아가서 급습, 이에 적함선이 일시에 쫓아 나오자 아군 함선은 거짓 후퇴를 하자 왜군은 득의양양하여 끝까지 쫓아왔다. 아군은 예정대로 한산도 앞바다에 이르자 미리 약속한 신호에 따라 모든 배가 일시에 북을 울리며 뱃길을 돌려 호각을 불면서 학익진(鶴翼陣)을 펴고 일제히 적을 향하여 진격하였다.

  모든 지자총통·현자총통·승자총통을 한꺼번에 쏘아 적함을 격파, 분소(焚燒)시킨 것만도 66척, 적의 목을 잘라 온 것이 86급, 기타 물에 빠져죽고 찔려죽은 수가 수백 명에 이르렀으며, 한산도로 도망친 400여 명은 군량이 없이 13일간을 초식하다가 겨우 탈출하였다. 이 싸움은 임진왜란 때의 3대첩의 하나로, 그 결과 일본 수군은 전멸하였고, 이순신은 그 공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 이억기와 원균은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서(陞敍)되었다.(두산백과사전 참조)』

  한산대첩은 우리 역사상 빛나는 전투였다. 뿐만 아니라 거북선을 앞세워 승리를 거둔 이순신(李舜臣) 제독의 한산대첩은 세계 해전사상에도 유명한 전투로도 평가받고 있다. B.C. 480년 그리스의 데미스토클레스(Themistocles)제독의 살라미스(Salamis)해전, 1588년 영국 하워드(Howard) 제독의 칼레(Calais) 해전, 1805년 영국 넬슨(Nelson) 제독의 트라팔가(Trapalgar) 해전과 함께 세계 4대 해전(世界四大海戰)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특히 한산섬은 한산대첩이 있은 그 이듬해(1593년) 이순신 장군이 수군통제사의 본영(本營)을 여수에서 이곳 한산섬으로 옮겨 온 후 1597년 서울로 압송될 때까지 4년간을 지키고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그런 이유로 한산도는 곳곳에 공의 발자취와 유적이 남아있어 성역으로 조성, 관리되고 있다.

 

 

* 이충무공의 해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거북선 

 

 

 가슴 부듯한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배는 호수를 연상할 만큼 아늑하고 잔잔한 포구에 들어선다. 선착장은 마치 활처럼 휜 해안 우측에 있다. 선착장에 내려 제일 먼저 만나는 것은 한산문이다. 매표소를 지나 제일 먼저 마주하는 제승당의 초입 관문이다. 활처럼 두 번 휜 깔끔한 해안길을 따라 우물을 지나면 대첩문이다.

 

 

 

*한산도 이충무공 유적지 표지석, 한산문, 우물


*유적지 들어가는 길 옆에 세운 충무공 시비(詩碑)

 

 

  대첩문을 지나 곧은길로 진행하여 충무문을 들어서면 정면으로 보이는 것이 제승당(사적 113호)이다. 제승당은 충무공 이순신장군께서 왜적을 크게 무찌른 수군의 본영으로 제해권을 장악하고 국난을 극복한 한산대첩의 유서 깊은 사적지이다.

 

  정유재란 때 원균의 패전으로 폐허가 된 지 142년 후 107대 조경통제사가 복원, 운주당 옛터에 집을 짓고 제승당이라는 친필 현판을 걸었다. 통제영 폐영 후 일제강점기에는 지방 선현들께서 충렬사영구보존회를 조직, 일제의 온갖 압박을 무릅쓰고 갖은 고난을 겪으며 충무공 유적을 수호하였다.

 

  일제 패망 후 통영충렬사영구보존회는 재단법인 통영충렬사로 개칭, 법인을 설립하고 충무공 유적을 관리하여 왔다. 그 후 제승당의 자산을 경남도에 기증, 경남도에서 관리하게 되었고 2000년 도정방침에 따라 민간에게 위탁관리하고 있다. 현재의 건물은 1976년 10월에 중건한 것이다.

 

  제승당 내부에는 영당과 충무공의 해전(노량해전, 사천해전, 한산대첩)과 《진중생활도》를 그린 다섯 폭의 해전도와 현자총통, 지자총통, 작은 거북선의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 대첩문(상), 충무문(중)과 제승당 경내(하)

 

*제승당과 내부전시물(총포, 한산대첩도, 당시의 깃발, 기타)

 

 

  제승당과 충무사 중간에 위치한 비로서 외삼문을 지나면 정화기념비와 유허비가 있다. 유허비는 1597년 선조 30년 폐진된 제승당을 1739년 제107대 통제사 조경이 다시 세우면서 충무공을 기리고, 제승당터임을 알리기 위해 이 비를 세웠다. 오른쪽의 비는 138년 후 198대 통제사 이규석이 다시 세운 비이다. 유허비는 하나의 비를 중심으로 네 개의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기와를 얹었다. 

 

 

*제승당 유허비

 


   우측으로 행적비와 충무공이 수시로 올라 왜군의 동태를 살폈다는 망루인 수루가 있다. 이 건물이 바로 "한산도가"에 나오는 그 유명한 수루이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을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서 일송호가는 나의 애를 남의 애를 끊나니


  수루에 서니, 어디선가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에 찬 이순신 장군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수루, 뒤에는 숲 속에 이순신 장군이 활을 쏘시던 한산정이 자리 잡고 있다.

 

 

*수루와 한산도가 액자, 수루에서 바라본 한산도 앞바다



  수루 옆에 있는 한산정은 이순신 장군이 활을 쏘던 곳이며 사정과 표적과의 거리는 145m이다. 그 당시에는 조정에서만 과거를 보아 왔으나 장군이 장계를 올려 처음으로 이곳에서 무과시험을 치른 곳으로 100여명이 급제한 곳이기도 하다. 과녁은 바다를 끼고 'ㄷ자' 형태의 건너 편에 위치해 있다. 바다 건너에 과녁이 있는 곳은 전국에서 유일한 곳이다. 

 

 

*이순신 장군이 활을 쏘던 곳, 한산정

 

 

  그리고 홍살문을 지나 외삼문, 내삼문에 들어서면 깊숙한 곳에 충무사/영당이 있다. 이 사당은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모신 곳이며, 원래 조그만 사당을 헐고 1976년 10월 본 사당을 건립하였고, 매년 2회 제향을 올리고 있다. 이 영정은 1978년 정형모 화백의 그림을 봉인한 것이다. 

 

 

*홍살문과 외삼문(위)과 내삼문(아래)

 

* 이충무공의 영정을 모신 충무사(상)과 그 내부(하) 



  제승당을 중심으로 둘러본다면 1시간 정도면 충분하다. 그러나 한산도에 온 이상 여유를 가지고 하루 정도 한산도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것을 권한다. 특히  문어포 산정에는 거북선을 대좌로 한 높이 20m의 '한산대첩기념비'가 서 있다. 이 기념비는 1592년 7월 8일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견내량에서 73척의 배 중 12척을 사로잡고, 47척을 불태운 한산대첩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이 산정에 서면 견내량 일대가 훤히 보인다.

 

 

*한산대첩기념비 (문어포 산정)

 

 

 그리고 한산도에는 망산(293.5m)이 있어서 유적 탐사와 아울러 등산을 겸할 수 있다. 산정에 오르면 동·서·남으로 점점이 떠있는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수려한 섬 뿐만 아니라 한산대첩 구국의 현장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망산 등산로의 특징은 교통이 편리할 뿐 아니라 볼거리와 먹을거리가 넉넉하며 전국 최고의 송림욕을 즐길 수 있다. 망산을 거쳐 면 소재지인 진두마을까지 3시간 정도 소요된다.

 

 

 * 망산 정상의 휴월정과 조망 


  한산섬만 둘러본다면 미륵도에 있는 도남관광유람선 선착장에서 소매물도 등대섬과 비진도, 한산섬을 돌아보는 한려수도 순환 유람선을 이용해 보는 게 좋다. 한려수도 최고의 풍광을 자랑하는 곳이라 한산섬만을 보기에는 왠지 아쉬움이 많기 때문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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