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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48인, ‘옥중투쟁’ 한용운, 공포에 떠는 몇몇 대표에게 인분세례 〔3·1운동〕 48인 ‘옥중투쟁’ 한용운, 공포에 떠는 몇몇 대표에게 인분세례 블라디보스토크=안영배 기자 ▲서대문감옥은 1908년 경성감옥으로 개소한 이후 1912년 서대문감옥, 1923년 서대문형무소로 이름이 바뀌었다. 일제는 항일투쟁으로 수감된 독립운동가들이 늘어나자 감옥을 증축했다(왼쪽 사진). 왼쪽 사진의 원 안 건물(본관 보안과 청사)이 현재 전시관으로 바뀌어 있으며 이 건물 지하에 고문방이 있다(오른쪽 사진). 동아일보DB 1919년 6월 초,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기자가 경성 시내에서 전차를 타고 서대문 밖 모화관(독립문의 옛 이름) 막바지 산등성이의 붉은색 벽돌집을 찾아갔다. 인왕산 자락 아래 두 길 남짓한 담장이 육중하게 둘러싸고 있는 서대문감옥(현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이다. 기자는.. 2019. 1. 13.
청년학생들 나흘만에 ‘2차 3·1운동’ 결행… 독립열망 다시 폭발 생도들의 봉기 청년학생들 나흘만에 ‘2차 3·1운동’ 결행, 독립열망 다시 폭발 안영배 기자 ▲학생들이 주도한 3·1운동 시위에 호응해 서울 종로에서 많은 사람이 독립만세를 외치고 있다. 당시 사람들은 일제에 홀대를 받은 종로를 ‘민족의 거리’로 여겼다. 동아일보DB 1919년 3월 5일 오전 9시경, 경성 남대문역(서울역) 앞 광장. 이틀 전 고종의 국장(國葬) 행사를 참관한 뒤 귀향하는 사람들로 역 앞은 평소보다 더 북적거렸다. 일제 군경의 삼엄한 경계 외엔 광장을 오가는 행인들도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겉으로는 평온한 듯했다. 그러나 3·1만세운동의 거대한 태풍이 휘몰고 간 후의 팽팽한 긴장감을 안으로 품은 고요였다. 정적은 곧 깨졌다. 느닷없이 젊은 남녀 학생들이 집단으로 나타나더니 삽시간에 광.. 2019. 1. 13.
남산의 요릿집 태화관이 3·1독립선언 장소로 낙점된 까닭은?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남산의 오포(午砲) ‘요릿집’ 태화관이 3·1독립선언 장소로 낙점된 까닭은? 안영배 기자 ▲1919년 3·1운동 직전에 촬영된 탑동공원(탑골공원)의 팔각정. 대한제국 시기 고종황제가 천제를 지낸 환구단의 황궁우를 본떠 세운 건축물이다. 동아일보DB 기미년 3월 1일 토요일, 그날이 밝았다. 날씨는 따뜻하고 청명했다. 33인의 민족대표는 ‘먼 길’을 떠나는 채비를 했다. 천도교 지도자 손병희는 하루 전인 2월 28일 종단을 이끌 후계자를 정한 유시문(諭示文)을 발표한 데 이어, 이른 새벽 천도교 청년들을 소집해 마지막 훈시를 했다. “나는 지금 독립의 종자(種子)를 심으러 간다. 너희들은 3개 원칙(비폭력, 대중화, 일원화)을 끝까지 지켜라. 오늘의 동지가 내일 배신해 해.. 2019. 1.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