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환1 만종(晩鐘) / 고창환 만종(晩鐘) -고창환 호박엿 파는 젊은 부부 외진 길가에 손수레 세워놓고 열심히 호박엿 자른다 사는 사람 아무도 없는데 어쩌자고 자꾸 잘라내는 것일까 그을린 사내 얼굴 타다 만 저 들판 닮았다 한솥 가득 끓어올랐을 엿빛으로 어린 아내의 볼 달아오른다 잘려 나간 엿처럼 지나간 세월 끈적거리며 달라붙는다 그들이 꿈꿔 왔을 호박엿보다 단단한 삶의 조각들 삐걱이는 손수레 위 수북이 쌓인다 지나가는 사람 하나 없는데 그들이 잘라내는 적막한 꿈들 챙강대는 가위 소리 저녁 공기 틈새로 둥글게 퍼진다 - 시집《발자국들이 남긴 길》(2000) 수록 ◎시어 풀이 만종(晩鐘) : 저녁 때 절이나 교회 따위에서 치는 종. 챙강대는 : ‘챙가당대는’의 준말. 얇은 쇠붙이나 유리, 사기 따위가 자꾸 부딪치거나 바스러지며 잇따라 .. 2020. 4. 13. 이전 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