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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대설주의보 / 최승호

by 혜강(惠江) 2020. 2. 8.

 

대설주의보  
  

- 최승호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들
제설차 한 대 올 리 없는
깊은 백색의 골짜기를 메우며
굵은 눈발은 휘몰아치고,
쬐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굴뚝새가 눈보라 속으로 날아간다.
길 잃은 등산객들 있을듯
외딴 두메마을 길 끊어 놓을듯
은하수가 펑펑 쏟아져 날아오듯 덤벼드는 눈,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쬐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온다 꺼칠한 굴뚝새가
서둘러 뒷간에 몸을 감춘다.
어디에 부리부리한 솔개라도 도사리고 있는 것일까.
길 잃고 굶주리는 산짐승들 있을 듯

눈더미의 무게로 소나무 가지들이 부러질듯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때죽나무와 때 끓이는 외딴 집 굴뚝에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골짜기에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일러스트=권신아

 

 

<해설> -정끝별·시인


  눈은 어떻게 내리는가. 어디서 오는가. 어디로 사라지는가. 머언 곳에서 여인의 옷 벗는 소리로 내리는 김광균의 눈이 있는가 하면, 쌀랑쌀랑 푹푹 날리는 백석의 눈이 있다. 기침을 하자며 촉구하는 김수영의 살아있는 눈도 있고, 희다고만 할 수 없는 김춘수의 검은 눈도 있다. , , , , , , 내리는 서정주의 눈도 있고, 갑작스런 눈물처럼 내리는 기형도의 진눈깨비도 있다.

  그리고 여기 '백색계엄령'처럼 내리는 최승호(54) 시인의 눈이 있다. 1980년대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이념의 시대였고 폭압의 시대였다. 그는 '상황 판단'이라는 시에서 '굵직한/ 의무의/ 간섭의/ 통제의/ 밧줄에 끌려다니는 무거운 발걸음./ 기차가 언제 들어닥칠지 모르는/ 터널 속처럼 불안한 시대'라고 일컬었다. 그의 시는 선명하고 섬뜩하게 '그려진다'. '()''()'을 시 정신의 두 기둥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시대와 현실을 '보면서 드러내고', 자본주의와 도시문명을 '살피면서 사유한다'.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골짜기에 눈은, 굵게 힘차게 그치지 않을 듯 다투어 몰려온다. 눈보라의 군단이다. 도시와 거리에는 투석이 날리고 총성이 울렸으리라. 눈은 비명과 함성을 빨아들이고 침묵을 선포했으리라. 백색의 계엄령이다. 쉴 새 없이 내림으로써 은폐하는 백색의 폭력, 어떠한 색도 허용하지 않는 백색의 공포! '백색의 감옥'에는 숯덩이처럼 까맣게 탄 '꺼칠한 굴뚝새'가 있고, 굴뚝새를 덮쳐버릴 듯 '눈보라 군단'이 몰려오고, 그 군단 뒤로는 '부리부리한 솔개'가 도사리고 있다. 분쟁과 투쟁, 공권력 투입, 계엄령으로 점철됐던 시대 상황에 대한 알레고리이기도 하다.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골짜기에 굵은 눈발이 휘몰아칠 때 그 눈발을 향해 날아가는 굴뚝새가 있었던가. 덤벼드는 눈발에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서둘러 뒷간에 몸을 감췄던가. 꺼칠한 굴뚝새의 영혼아, 살아있다면 작지만 아름다운 네 노랫소리를 들려다오! 다시 날 수 있다면 짧지만 따뜻한 네 날개를 펼쳐 보여다오!

<출처> 2008. 1. 15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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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노트>김재홍(경희대 교수·문학평론가)

  새해가 밝았습니다. ‘눈을 밟으면 귀가 맑게 트인다는 어느 시구처럼 지난해 무거웠던 몸과 마음도 이제 많이 맑아졌구요. 제야와 신년 아침에는 겨울 수채화처럼 서설까지 내려 우리들 메마른 가슴을 포근히 또 아름답게 채색해주었지요. 그러더니 이 즈음엔 울릉도며 산간 내륙에 간간이 대설주의보까지 내려 무언가 풍성한 느낌을 던져주는 모습입니다.

  우리 시에서 눈내리는 풍경을 묘사한 시로는 아마도 이 최승호 시인의 대설주의보가 대표적이지 않을까 합니다. 태백산맥 깊은 산 속에 한겨울 눈보라가 몰아치고 사람키 만큼 폭설이 쌓여 가는 겨울 풍정을 잘 묘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요즘처럼 각종 오염과 공해로 찌든 우리 도시생활의 모습을 떠올리노라면 이 겨울 태백산맥을 몰아치는 눈보라의 신선한 생명력이 간절하게 그리워지기도 하지요.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들/은하수가 펑펑 쏟아져 날아오듯 덤벼드는 눈/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이라는 구절 속에는 엄청난 대자연의 생명력과 함께 원시의 싱싱한 맥박과 숨결이 느껴져 오기 때문입니다. 부디 올해에는 고운 눈이라도 펑펑 내려 우리들 인정이 더욱 넉넉해지고 또 한 해 농사가 풍요로워지길 기원하는 마음 가득합니다.

<출처> 위클리조선 [1687] / 2002.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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