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꽃
신대철
박꽃이 하얗게 필 동안
밤은 세 걸음 이상
물러나지 않는다
벌떼 같은 사람은 잠 들고
침을 감춘 채
뜬소문도 잠 들고
담비들은 제 집으로
돌아와 있다
박꽃이 핀다
물소리가 물소리로 들린다
<1977년>
▲ 일러스트 잠산
<해설> -문태준·시인
꽃의 개화를 본 적이 있으신지. 그 잎잎의 열어젖힘을 본 적이 있으신지. 불교에서는 이 세상에서 최고의 일을 씨앗이 움트는 일이라고 했다지만, 꽃의 '열린 앉음새'라 불러도 좋을 꽃의 개화는 사람을 압도한다. 대개 꽃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핀다.
천천히 진행되는 개화 파노라마를 관심있게 시종 지켜볼 만큼 여유롭고 섬세한 마음의 눈을 가진 사람들은 아마도 많지 않겠지만.
이 시에서 사람을 '벌떼 같은 사람'이라고 비유한 부분은 압권이다. 정신없이 분주하고 시끌시끌 작당(作黨)하여 몰려다니며 입으로 바늘 같은 독설을 내뱉는 세간의 사람들을 잉잉거리는 벌떼 무리에 비유했다. 인간의 시간이 깊은 잠에 빠져들고 소란이 뚝 그쳤을 때 자연의 시간은 도래한다. 그리고 오, 하얀 박꽃은 피어난다. 물소리는 물소리로 들린다. 자연은 자연 그대로 들린다.
자연의 시간에는 살기(殺氣)가 없다. 자연의 시간은 인간의 세계를 맑게 회복시킨다. 씻어낸다. 시 '무인도'에서 "인간을 만나고 온 바다,/ 물거품 버릴 데를 찾아 무인도(無人島)로 가고 있다"라고 했을 때의 무인도처럼. 하산(下山)한 당신도 '죄(罪) 짓지 않고' 어슬렁어슬렁 자연의 시간에 살고 싶지 않으신지.
이 시는 '산(山)의 시인'이라고 불러도 좋을 신대철(63) 시인의 첫 시집 '무인도를 위하여'에 실려 있다. 신대철 시인은 1977년 첫 시집을 출간하고 23년간 절필을 했다. 2000년 시작 활동을 재개한 후 근년에는 알래스카, 시베리아 평원, 바이칼호, 몽골, 두만강 등 원시적이고 광활한 자연에 대한 시들을 발표하고 있다. 그곳에 정착하게 된 사람들의 이산의 역사와 고통을 부각시키면서. 신대철 시인은 북파 공작원 부대의 학군장교로 군복무를 했고, 그 당시의 기억을 토대로 전쟁과 남북 분단의 아픈 현대사를 시로 표현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린 시절 충청도 청양의 깊은 산에서 화전민으로 살았던 그만의 체험은 붉은 혈액이 되어 신대철 시의 몸을 움직인다. 그의 시는 큰 산이요 큰 숲이다. 더 깊숙이 평화롭고, 깨금이 떨어지고, 아그배가 떨어지는 그런 곳. 당신도 가서 살고 싶지 않으신지.
<출처> 2008. 2. 22 / 조선일보
<해설> 남진우(시인·문학평론가) ----------------------------------
현대 사회에서 인간이 처해 있는 조건 중의 하나는 자연을 자연으로 만나기 힘들다는 것이다. 자연은 그 자연스러움을 잃어버리고 인간의 편의를 위한 도구로 동원되거나 잠시 인간을 위안하기 위해 소환되는 부속적인 존재로 전락해버렸다. 인간은 자연의 망각 위에 삶을 건설하고 자연의 훼손을 통해 문명을 유지해 나간다. ‘인공낙원’이나 ‘자연산업’이란 말이 의미하는 것처럼 우리 시대에 자연은 인위적 조작과 환금 가능성의 대상일 뿐이다.
신대철의 ‘박꽃’(‘무인도를 위하여’ 문학과지성사)은 자연이 자연으로 포착되는 희귀한 순간을 그린 작품이다. "박꽃이 피"는 순간 “물소리가 물소리로 들린다”는 표현은 역으로 평소엔 물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오직 깊은 밤, 평소 벌떼처럼 시끄럽던 사람들이 다 잠들고 그에 따라 뜬소문도 잠잠해져 사위가 조용해질 무렵에야, 마치 그런 고요한 순간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박꽃은 피고 물소리가 제대로 들려오는 것이다.
"박꽃이 하얗게 필 동안/ 밤은 세 걸음 이상 물러나지 않는다"라는 구절에서 밤은 단지 박꽃이 피는 시간적 배경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박꽃을 피우기 위해 능동적으로 개입하는 존재로 그려져 있다. 밤은 박꽃을 호위하는 기사처럼 박꽃을 에워싸고 수행하며, 박꽃은 그러한 어둠의 보호 속에서만 자신을 외부로 드러낼 수 있게 된다. 어둠이 깊어질수록 박꽃이 켜든 하얀 등은 더욱 밝을 것이며 주위가 적막해질수록 물소리는 더욱 선명하게 울려퍼질 것이다. 인간이 잠에 빠져 있는 동안 오히려 자연은 활동을 시작하며 자연스러움을 회복한다.
세계가 완전히 어둠에 묻힐 때 그래서 외부를 향한 사람들의 접근이 차단될 때 자연에서 일어나는 이 미묘한 변화를 지켜보는 단 하나의 존재가 있다. 그것은 바로 이 시의 화자이다. 모두 잠들어 있을 때 단 하나 깨어 있는 존재, 그가 바로 시인인 것이다.
<출처> 2003. 11.21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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