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보 여행가·작가·블로거… “팔순에도 새로운 여정 꿈꾼다”
인생 후반이 더 열정적인 황안나 씨
김기윤 기자
정년 앞두고 정체성찾기 나서
네팔·산티아고 순례길 걷기, 해남서 통일전망대까지 완주
여행이야기 책으로 펴내 공유
▲ 황안나 씨가 ‘땅끝 마을’인 전남 해남의 한 해안가 인근에서 임진각까지 국토 종주를 시작하며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2005년 당시 황 씨의 국토 종주를 응원하기 위해 출발지인 해남까지 함께했던 황 씨의 아들이 직접 사진을 촬영했다. 황 씨는 사진을 촬영한 지 23일 만에 홀로 도보 국토 종주에 성공했다. 황안나 씨 제공
무작정 걸으며 ‘나’를 발견
지금 내인생은 여전히 청춘, 누구보다 더 치열하게 살아
80세땐 살아온 날 정리할 때
집에서 가만히 녹스는 것보다 닳아서 없어지는게 더 나아
가족들이 말리지만 포기안해
묘비명은 ‘이만하면 됐다’
많은 일들을 경험하게 해준 나의 ‘건강과 용기’에 감사
“발길 닿는 곳에서 계속 새로운 여정을 꿈꾸고, 그 꿈을 위해 ‘인생 후반전’에 더 많은 것을 새로 시작했죠. 이 나이에 ‘노욕’ 아니냐고요? 하하, 제 나이가 뭐 어때서요? 집에서 가만히 녹슬어 없어지는 것보단 닳아서 없어지는 게 낫지 않나요?”
황안나(79·사진) 씨에게 붙는 수식어는 해마다 늘고 있다. ‘액티브 시니어’ ‘도보 여행가’ ‘섬 여행가’ ‘스테디셀러 작가’ ‘강연자’ ‘칼럼니스트’ ‘시니어 블로거’ 등이다. 은퇴 후 궤적을 보면 절로 수긍이 간다.
그는 정년을 7년 앞둔 어느 날 초등학교 교사, 엄마, 아내로서 정체성 없이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다 ‘내 노릇’ 해 보자는 용기를 냈다. 집에 가서 남편과 상의해 ‘그러세요. 그동안 고생 많았습니다’라는 말을 듣고 이튿날 바로 사직했다. 그리고 65세가 되자 전남 해남 땅끝마을에서 경기 파주통일전망대까지 길을 도보로 완주했다. 67세엔 강원 고성통일전망대에서 동해, 남해, 서해를 거쳐 118일 동안 해안선 4000㎞를 따라 걸었다. 지리산과 한라산 등 국내 유명한 산 종주를 시작으로 몽골, 바이칼, 캄보디아, 베트남, 인도, 네팔,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등을 모두 도보로 여행했다. 2010년엔 100㎞ 울트라 걷기대회에 참가해 46위로 완주했다.
여행하며 틈틈이 찍은 사진, 기억 등은 블로그에 기록으로 남겼다. 그새 그녀의 여행을 동경하는 ‘팬’도 생겼다. 그 기억들을 모아 ‘내 나이가 어때서’ ‘안나의 즐거운 인생비법’ 등의 책도 펴냈다. 평생 꿈꿔오던 작가로도 데뷔한 셈이다. 여든에 가까운 나이지만, 지금도 늘 다음 목적지를 꿈꾸는 ‘청춘’으로 불리는 이유다.
지난 1일 문화일보와 만난 황 씨는 “우연한 기회에 찾아온 도보여행을 지금까지 이어올 수 있어 정말 감사하게 생각한다”며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기보다 정말 우연한 인연이 기회가 됐고, ‘하는 데까진 해보자’는 용기가 솟아 인생 후반전을 누구보다 치열하게 보낼 수 있었던 것 같다”고 웃음을 지었다.
그는 은퇴 후 우연히 TV에서 ‘땅끝마을’ 해남의 황토 보리밭 모습을 봤다. 아름다운 풍경에 아련한 슬픔, 그리움, 동경을 느꼈다. 무작정 떠나야겠다고 결심했다.
“해남으로 떠나면서 마침 또 다른 생각이 떠올랐어요. 한비야 씨의 책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땅끝에서 통일전망대까지 여행했다는 내용이 문득 생각났죠. 저도 해봐야겠다는 생각에 일단 떠났습니다. 근데 그렇게 여행을 마치고 길이 끝날 때쯤 새로운 길이 열렸어요. 민통선 구간이 잠시 열릴 때가 있었는데 그 구간을 지나며 넘실대는 파도를 보고 다시 매력에 빠졌습니다. 통일됐다면 신의주까지도 갔겠지만, 우리나라의 서해·남해·동해 모든 해안의 모습을 다 눈에 담고 싶었어요.”
그렇게 결심한 황 씨의 여정에 대해 과도한 행위로만 보는 이가 많았다. 한 명도 응원하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가족도, 지인도 말렸다. 모두가 ‘미쳤다’ ‘미련하다’고 했다. 사실 135일 동안 하루에 최소 40㎞를 홀로 걸어야 하는 여정을 예순이 넘은 여성이 무리 없이 소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지지할 이가 많지는 않을 터다. 그런데도 그녀는 과감히 짐을 쌌다. 해안은 물론 서·남해 연륙교 섬까지 모두 다녀왔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 길들이 전부 ‘가위눌릴 것 같은 길’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사실 힘들었다”고 했다.
그녀의 행보는 해안선 일주를 한 후로 한층 탄력이 붙었다. 해냈다는 자신감에 더 큰 도전에 대한 자신감도 생겼다.
작가가 되기 위해 시작한 여정은 아니었지만, 덤으로 10대 때부터 꿈꿔오던 작가로 데뷔하는 꿈도 이뤘다. 수십 살 차이가 나는 젊은 청장년과도 동티베트 도보여행에 나서 고산병 한 번 없이 트레킹을 마쳤다. 험난한 투르크메니스탄 산길을 걸으며 야생화의 매력에 빠지기도 했다.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완주도 그녀에겐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토록 무작정 걷는 이유는 뭘까. 그녀는 대답 대신 지난달에 홀로 무박 일정으로 떠난 치악산 트레킹 얘기를 꺼냈다.
“동이 트기 전부터 헤드 랜턴을 착용하고 산에 올랐어요. 눈 덮인 적막강산을 홀로 걷다 보면 나름대로 지금까지의 삶도 돌아보고 마음을 정리할 수 있는 점이 가장 큰 매력입니다. 혼자 밤 열차도 타고, 생각하고 먹고 마시다 보면 그게 생각보다 말할 수 없이 춥고 외롭고 쓸쓸해요. 서글픈 생각도 들죠. 그런 상황 속에 저를 놓아보면 가장 ‘정직한 자신’을 만날 수 있어요. 안 좋은 말로 그동안 ‘꼴값’도 떨고 사람도 미워했는데 그런 마음 매무시를 고칠 수 있어요. 한없이 작아지고 부끄러운 생각도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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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엔 60∼70대 시절과는 다르게 늘어놓고 산 것들을 정리할 필요성도 느끼고 있다고 밝혔다.
“여전히 인터뷰도 하고 강연도 다니고 새로운 다짐도 할 정도로 바쁘게 움직이고 있어요. 그래도 80대라는 나이를 마냥 무시할 순 없겠더라고요. 박완서 작가의 글처럼 ‘내 몸이 내 상전이 된다’는 말도 있잖아요. 아무리 100세 시대라고 해도 90대에도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생생하게 움직이는 분들은 정말 극소수고, 80대 중반쯤 되면 돌아가시진 않아도 주저앉는 일이 많아요. 최근엔 저도 청력이 좀 약해져 보청기를 쓰고 있거든요. 그래서인지 가파른 산을 오르거나 빙판길을 걸을 땐 이전과 다르게 두려운 마음도 커지더라고요. 물론 이게 끝이라도 여한은 없겠다는 생각도 하지만 80세는 치열하게 살아온 길을 정리도 해야 하는 나이 같아요.”
인터뷰를 마칠 즈음, 그녀는 수줍게 ‘버킷리스트’ 얘길 꺼냈다. 나이 때문에 ‘무조건, 꼭 하겠다’고 마음먹은 건 아니지만, 여전히 마음속에 생생한 꿈을 안고 있었다.
“꼭 하겠다는 생각은 아닙니다. 다만 가족에게도 아직 말은 못 꺼냈는데 올해 봄 다시 해안선을 걸어볼까 생각도 들었어요. 버킷리스트 중엔 페루 ‘마추픽추’ 여행도 있어요. 가족들은 여전히 극구 말리고 있어서 포기해야 하나 고민도 듭니다. 그런데 남들은 늦었다고 포기한 나이를 지금도 잘 써왔는데 이젠 나이가 80세가 거의 다 됐다고 침대에서 뒹구는 것보다는 없어지더라도 닳아서 없어지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녀가 요즘 지인들에게 농담처럼 하는 말이 있다. 묘비명으로 ‘이만하면 됐다’가 어떻냐고 묻는다.
“나중에 산소도 만들 생각이 없지만 요새 주변 사람들에게 묘비명으로 ‘이만하면 됐다’ ‘여한은 없겠다’는 말은 어떤지 농담하곤 합니다. 은퇴 후 새로 시작한 것만 운전면허, 사진 촬영(카메라), 블로그, 책 쓰기, 도보여행 등 셀 수 없을 정도입니다. 무엇보다 하고 싶은 걸 모두 꿈꾸고 실천하게 해준 제 ‘건강’과 ‘용기’를 생각하며 늘 감사한 마음을 갖고 살 생각입니다.”
<출처> 2019. 1. 4 /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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