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으로 ‘새해나들이’
동이 터 오른다… 다시 시작이다
순천=글·사진 이귀전 기자
오늘은 일을 어떻게 해야 하나. 점심땐 뭐 먹지. 주말엔 가족들 하고 어디로 나들이를 갈까. 여름휴가는 어디로 가지. 단풍도 들었는데 산에 가자. 벌써 첫눈이 내렸어….’
하루하루가 그렇게 지나갔다. 무엇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니 어느새 계절이 바뀌었고, 한 해의 끝에 이르렀다. 연초 언제 1년이 다 갈까 싶었는데, 연말이 되면 벌써 1년이 다 갔네 싶다. 연말엔 시간이 좀 더디게 갔으면 하지만, 마음뿐이다. 그렇게 하루가 더 지나 해가 바뀌었다.
전남 순천 낙안읍성의 매력은 성벽 위를 걸어야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산 너머 떠오르는 장엄한 일출과 어우러진 읍성의 풍광은 경이롭게 느껴진다.
새해가 됐다고 ‘짠’하고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래도 해가 바뀌면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하고 싶어진다. 새 다이어리를 마련하고, 계획도 세워본다. 막상 적고 보니, 지난해에 적었던 계획과 별반 다르지 않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 꾸준히 노력한 것 같은데 큰 변화는 없어 보인다. 급격하게 주위는 변하고, 발전하는 것 같은데 나만 제자리걸음 하고 있다는 생각에 낙담하기도 한다. 하지만 세상의 속도에 맞춰 같이 빠르게 움직이고, 변화하는 것이 꼭 정답은 아닐 테다. 자신만의 속도로 진득하게 한 발 한 발 내딛다 보면 남들은 모르더라도 자신만의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더 높게, 더 길게, 더 빠르게 오감을 너머 오장육부를 자극하는 출렁다리, 집라인, 루지, 케이블카 등 각종 시설이 관광객을 끌어들이기 위해 하루가 멀다하고 전국 곳곳에 들어서고 있다.
반면, 수십, 수백, 수천년에 걸쳐 거의 변함없이 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곳도 있다. 지금도 이 모습이지만, 과거에도 그 모습이었을 것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오랜 세월을 버텨온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진득하게 자신만의 길을 걸어온 그 모습은 자극적인 관광시설에서 느끼는 순간의 쾌감과 비교할 수 없는 깊은 울림을 던져준다.
독특한 분위기의 낙안읍성에선 드라마나 영화 촬영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진득하게 제 길 걸어온 옛 풍경
마을 군데군데 불을 밝히고 있던 가로등이 점차 빛을 잃어간다. 불빛이 어둠과 함께 사라지고, 산 너머 하늘이 붉게 물들며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한다. 마을을 살포시 덮고 있던 안개가 걷히면서, 지붕 위에 이엉이 올려진 초가 굴뚝에서 흰 연기가 피어오른다. 비를 들고 마당을 쓰는 이의 모습이 어우러져 하나의 화폭을 그린다. 전남 순천 낙안읍성의 아침 풍경은 이렇다.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랬으며, 내일도 그럴 것이다. 마을이 만들어진 후 크게 달라지지 않는 평화로운 아침 풍경을 매일 그리고 있다.
대지와 사람이 두루 평안하다는 ‘낙토민안’(樂土民安)에서 유래한 마을 이름 ‘낙안’처럼 읍성은 오는 이에게 평화로움을 선사한다. 읍성은 왜구의 침입으로부터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조성됐다. 흙으로 성을 쌓은 뒤 1450년대 석성(石城)이 됐고 17세기 초반 군수로 부임한 임경업 장군이 개축했다.
마을은 마한시대부터 존재해 2000년이 넘는 역사를 품고 있다. 농지가 발달해 일찌감치 거주지가 된 것이다. 민속촌처럼 일부러 조성한 것이 아닌 낙안읍성은 주민들이 실제 거주하는 공간으로 현재 108가구 270여명의 터전이다. 읍성엔 동·서·남쪽에 문이 있었다. 동쪽에는 ‘즐거움이 넘치는 누대’를 의미하는 낙풍루, 남쪽에는 읍성 성문치고는 규모가 큰 쌍청루(雙淸樓)가 있다. 서문은 소실돼 사라졌다.
낙안읍성의 매력은 성벽 위를 걸어야 제대로 느낄 수 있다. 폭 3∼4m, 길이 1410m의 성벽에서 내려다보는 마을 풍광을 놓쳐선 안 된다. 이 중 서문 터에서 쌍청루로 가는 성벽 구간이 최고의 풍광을 자랑한다. 쌍청루까지 이어진 길과 양편으로 옹기종기 모여 있는 초가 모습은 우리나라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광경이다. 이맘때 이 자리에 서면 마을 건너 오봉산과 제석산 위로 솟는 일출을 볼 수 있다. 산 너머 떠오르는 장엄한 일출과 어우러진 읍성의 풍광은 경이롭게 다가온다. 아마 2000년 전 누군가도, 성벽이 생긴 400여년 전 누군가도 이와 비슷한 풍광을 봤을 테다.
낙안읍성에서 빼놓으면 안되는 것 중 하나가 고샅길 걷기다. 마을 곳곳 눈높이 정도의 돌담이 이어져 있다.
읍성에서 빼놓으면 안 되는 것 중 하나가 좁은 골목길을 뜻하는 고샅길 걷기다. 마을 곳곳 눈높이 정도의 돌담이 이어져 있다. 낮은 담 너머 집안 모습을 들여다보며 걷는 맛이 있다. 다만, 사람이 거주하는 집들이니 생활에 지장을 줄 정도로 봐서는 안 된다. 동문으로 입장해 객사와 동헌을 둘러보고 낙민관자료전시관을 거쳐 읍성 서문 쪽에서 성벽에 올라 남문까지 걸어본 뒤 마을로 내려와 고샅길을 걷는 코스가 일반적이다. 낙안읍성의 독특한 분위기 덕분에 드라마나 영화 촬영하는 모습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낙안읍성 북쪽에 솟은 금전산은 낙안의 진산이다. 이름대로 금과 돈을 뜻한다. 읍성 마을이 고향인 송갑득 해설사는 “이 산의 기운 때문인지 로또 복권 당첨자가 순천에서 제법 나와 금전산은 ‘로또산’으로 불리기도 한다”며 마을 자랑을 한다.
순천을 대표하는 옛 풍경으로는 송광사와 선암사도 있다. 조계산 서편 송광사는 고려시대 16국사를 배출한 승보사찰로 유명하지만,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조계산 동편 선암사다. 송광사는 전쟁으로 1951년에 대부분 소실됐고, 선암사는 고색창연한 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기에 그렇다.
선암사 가는 길에 만나는 무지개 모양의 돌다리 승선교.
선암사는 주차장에서부터 선암천을 따라 난 길을 따라 올라야 한다. 이 길을 걷다 보면 무지개 모양의 돌다리 승선교와 강선루를 만난다. 승선루는 선암천 바위들과 어우러진 모습이 우리나라 무지개다리 중 가장 자연스럽고 우아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승선교 아래를 보면 물에 비친 강선루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강선루를 지나 경내에 들어서면 건물 벽, 단청 등에 새겨진 ‘수(水)’, ‘해(海)’ 글자가 눈에 띈다. 화재 피해를 많이 입은 선암사에 불이 나지 않게 처방을 한 것이라고 한다. 선암사 인근의 야생차체험관에선 3000원에 다식과 차례를 즐길 수 있으니 편안히 들려 산사의 여유를 즐겨도 좋다.
선암사의 300년이 넘은 해우소
◆생명의 터전으로 변신한 순천만
사람이 일군 옛 모습의 평화로움과는 다른 날것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풍광을 마주하고 싶다면 순천만이 기다린다. 어느 때 찾아도 나부끼는 갈대로 서정적인 낭만에 빠져들 수 있는 곳이지만, 이맘때는 색다른 친구들을 만날 수 있다. 순천만을 찾는 흰꼬리수리, 검은머리갈매기, 노랑부리저어새 등 겨울 철새들이 그들이다. 특히 멸종위기종 흑두루미가 대표 종이다. 전 세계 1만3000여마리가 생존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흑두루미 중 20%가량이 시베리아에서 겨울이면 순천만으로 넘어온다. 전 세계 흑두루미 월동지 중 가장 붐비는 곳이 됐다.
순천만을 찾은 흑두루미들.
10월부터 날아오는 흑두루미가 겨울나기를 시작한 것은 1990년대다. 100마리도 안 되는 적은 수였던 겨울 진객은 2000년대 들어 수백마리로 늘었다. 2015년 1000마리를 넘은 뒤 계속 늘어난 흑두루미는 지난해 12월 19일 기준으로 2538마리가 순천만을 찾았다. 역대 최고다.
흑두루미 개체수 측정하는 방법은 단순하다. 그냥 한마리 한마리 센다. 다만 기준은 있다. 흑두루미들은 밤이면 삵, 고양이 등을 피해 갯벌 중간에서 잠을 잔다. 아침이면 먹이 활동을 위해 논으로 날아간다. 이때가 측정하는 때다. 갯벌에서 논으로 날아가는 흑두루미 수를 일일이 세는 것이다. 한 명은 ‘V’자 형태로 무리지어 날아가는 흑두루미를 망원경으로 보고 숫자를 세 ‘12’, ‘15’ 등으로 불러주고, 옆에서 이를 받아 적는다. 이 추운 겨울, 해뜨기 전부터 용산 전망대 등 높은 지대에 올라 2시간가량 지켜봐야만 하는 일로, 8명의 모니터링단이 번갈아 겨울 진객을 맞는다. 관람객은 순천만 생태체험선을 이용하거나 체험선 매표소에서 농지를 보면 흑두루미를 볼 수 있다. 망원경은 필수다.
순천만을 찾은 겨울철새들이 군무를 펼치고 있다.
순천만은 나부끼는 갈대로 서정적인 낭만에 빠져들 수 있는 곳이지만, 이맘때는 겨울 철새들을 만날 수 있다.
1990년대만 해도 버려진 채 방치돼 쓰레기 더미가 쌓여 있던 순천만은 골재 채취사업이 추진되면서 아예 사라져 버릴 뻔했다. 다행히 순천만 습지를 보호하기 위해 시민들이 나서며 관심이 쏠렸고, 순천만 습지의 생태적 가치가 알려져 보호에 나서게 돼, 지금의 모습을 유지하게 됐다. 그 결과 순천만은 흑두루미와 다른 겨울 철새들이 찾는 우리나라 최대 월동 서식지가 됐다. 다른 생물들과 더불어 살 수 있는 ‘생명의 터전’의 상징적 존재가 된 것이다.
순천만 용산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일몰은 우리나라에서 손꼽힌다. 인근 와온해변에서 솔섬으로 떨어지는 일몰도 매력 있다. 보성 벌교가 참꼬막으로 유명하다면 와온해변은 새꼬막으로 유명하다.
순천만습지와 순천만국가정원을 오가는 자동궤도차량 ‘스카이큐브’.
순천만국가정원의 국가별 정원.
전남 순천 순천만은 다른 생물들과 더불어 살 수 있는 ‘생명의 터전’의 상징적 존재다. 용산전망대에선 ‘S’자 곡선 수로와 갯벌이 어우러진 황홀한 일몰을 볼 수 있다.
순천만 습지로 바로 갈 수도 있지만, 주차가 무료인 순천만국가정원을 들러 꿈의 다리와 국가별 정원을 둘러본 뒤 자동궤도차량 ‘스카이큐브’를 타고 습지로 넘어가도 좋다. 순천만 습지와 순천 도심이 멀지 않아 습지가 훼손될 우려가 있자 완충지대로 정원을 조성했다. 정원에서 스카이큐브를 타고 습지에 도착하면 순천이 배경인 무진기행의 김승옥과 동화작가 정채봉 문학관 인근이다. 살아 있는 자연을 둘러보기 전 마음을 정화하는 시간을 가져도 좋다.
<출처> 2019. 1. 3 / 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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