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향기 그윽한 봉화 춘양, 억지로라도 한번 가보시더
(한수정ㆍ만산고택ㆍ낙천정 등 양반의 기품 조화)
봉화=글ㆍ사진 최흥수기자
▲봉화 춘양은 ‘춘양목’과 ‘억지춘양’의 고장이자 양반의 기품이 서린 곳이다. 의양리 춘양목 종묘장 뒤로 안동 김씨 ‘낙천당’과 진주 강씨 ‘태고정’ 두 개의 정자가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봉화=최흥수기자
하늘은 시리도록 파랗고 햇살은 따스했지만, 옷깃으로 파고드는 바람은 쌀쌀했다. 경북 봉화는 겨울철 일기예보에서 아침 최저기온을 언급할 때 단골로 등장하는 지역이다. 봉화에서도 문수산(1,205m) 자락 춘양면은 봉화읍내보다 2~3도는 더 낮다. 서리를 맞으면 농사를 망치기 때문에 5월 10일 이전에는 고추를 옮겨 심지 못하고, 10월 10일 이전에는 웬만한 밭 작물 수확을 끝내야 하는 곳이다. 연중 절반은 겨울인 셈이어서 춘양(春陽)이라는 지명은 역설적으로 따스한 봄볕을 기다리는 바람으로 해석된다.
◇’억지춘양’의 시발점 춘양역
그렇다. 춘양은 이름부터 좀 억지스럽다. 춘양역은 안될 일을 무리하게 기어이 해내려는 고집, ‘억지춘양’이라는 말의 유래가 된 곳이다. 일반적으로 철로는 강을 만나면 다리로 건너고, 산을 만나면 터널로 통과한다. 휘어진 길을 곧게 펴 되도록이면 두 지점을 최단거리로 연결한다. 그런데 1955년 개통한 영암선(영주~철암) 선로는 법전~녹동 구간에서 말발굽(Ω) 형태로 크게 휘어진다. 애초 계획에 없던 춘양면소재지를 거쳐가기 위해서다. 빠른 길을 놔두고 철도 노선이 이렇게 된 데는 당시 춘양면 서벽리 출신 자유당 정문흠 의원의 영향이 컸다. (춘양역에는 ‘정모 의원’이라 써 있고, 춘양시장 벽화에는 이름과 사진까지 명확히 그려 놓았다.)
▲ 사랑채 처마에 걸린 ‘만산’과 ‘정와’ 편액. 둘 다 만산 강용의 아호다.
▲ 별당이자 민박 고택인 칠류헌에는 두 가지 서체의 편액이 걸려 있다.
▲ 칠류헌 거실이자 안마루 창으로 따스하게 햇살이 비치고 있다.
별당이자 고택 민박으로 이용하는 칠류헌은 만산고택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평가하는 건물이다. 대청마루에 내리는 볕이 따스하고, 거실로 쓰는 넓은 마루에는 8개 창호로 비치는 조명이 은은하다. 일곱 그루의 버드나무가 있는 집이라는 의미의 칠류헌(七柳軒)은 중국 송대의 시인 도연명을 흠모해 쓴 현판으로, 독립운동가이자 서화가 오세창(1864~1953)이 썼다. 현재 만산고택에는 만산의 4대손 강백기씨가 부인과 함께 살고 있다.
만산고택 인근 춘양성당 뒤편 언덕에는 망미대(望美臺)라는 비석이 서 있다. 을사늑약 후 귀향한 만산이 경술국치로 나라를 잃은 설움과 임금을 향한 안타까운 충정을 담은 글이 새겨져 있다. 철길을 사이에 두고 그가 세운 태고정(太古亭)이 마주 보고 있다. 태고정 바로 옆에는 안동 김씨 정자인 낙천당(樂天堂)이 나란히 붙어 있다. 집은 크지 않지만 전서체로 쓴 현판이 돋보인다. 이름 있는 집안에서 앞다퉈 정자를 지은 마을이니 아늑한 정취는 검증된 셈이다.
▲ 낙천당마을의 태고정. 을사늑약 후 귀향한 만산이 지은 정자다.
▲ 태고정 옆 낙천당. 안동 김씨 정자다.
▲ 태고정 바로 옆은 춘양을 에둘러가는 철길이다. 열차 뒤 소나무 아래에 ‘망미대’ 비석이 있다.
낙천당 앞은 춘양목 묘목을 생산하는 종묘장이다. 밭 한쪽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뿌리 잡초를 제거하던 주민에게 동네 이름을 물었다. ‘낙천당마을’이라 한다면서 한마디 덧붙인다. “누가 천당 가다가 떨어져서 그렇게 부른다 하대.” 우스갯소리지만 양반에 대한 감정이 예나 지금이나 그리 곱지는 않은 듯하다.
볕이 따스한 낙천당 마을길을 따라 조금 더 가면 ‘의양리 권진사댁’이다. 1880년경 성암 권철연(1874~1951)이 살던 집으로 역시 고택 민박을 한다. 길은 춘양의 북측 끝자락 한국산림과학고등학교로 이어진다. 춘양중학교와 함께 쓰는 운동장 동쪽에 서동리 삼층석탑 2기가 나란히 서 있다. 통일신라시대 남화사(覽華寺) 터로 알려졌는데, 절집이 아니라 교사(校舍)가 배경이어서 분위기가 독특하다. 동탑(東塔) 옆에는 마치 어린아이의 그림같이 천진한 얼굴의 불상 하나가 가부좌를 한 채 무심히 오가는 학생들을 지켜보고 있다.
▲ 춘양중학교 동편 운동장에 서동리 삼층석탑 2기가 나란히 서 있다.
▲ 석탑 뒤의 불상. 머리를 새로 붙인 듯, 조각이 서툴지만 표정은 천진하다.
◇춘양 가는 길
▦춘양역에는 강릉과 영주 방면 열차가 각각 하루 7회 정차한다. 시발점이 부산, 동대구, 영주, 서울역 등으로 제각각이어서 시간을 맞추기 쉽지 않은데, 모든 열차가 거쳐가는 영주역을 기점으로 삼으면 수월하다. 서울에서는 동서울터미널에서 봉화를 거쳐 춘양으로 가는 버스가 가장 빠르고 편리하다. 하루 6회 운행하며 3시간 정도 걸린다.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중앙고속도로 풍기IC에서 가깝다. 춘양역까지 48km, 약 40분이 걸린다.
▦춘양면사무소, 억지춘양시장, 고택을 잇는 걷기 길은 청송~영양~봉화~영월을 연결한 ‘외씨버선길’ 노정에 포함된다. 산림과학고등학교 입구에서 왼편 마을 길을 따라 걸으면 백두대간수목원 후문으로 연결되고, 자동차로 88번 도로를 따라 가면 영월 김삿갓면으로 넘어간다.
<출처> 2018. 12. 4 /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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