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 춘양, 춘양목과 억지춘양의 고장

 

솔향기 그윽한 봉화 춘양, 억지로라도 한번 가보시더 

  

(한수정ㆍ만산고택ㆍ낙천정 등 양반의 기품 조화)

 

봉화=글ㆍ사진 최흥수기자

 

 

 

봉화 춘양은 ‘춘양목’과 ‘억지춘양’의 고장이자 양반의 기품이 서린 곳이다. 의양리 춘양목 종묘장 뒤로 안동 김씨 ‘낙천당’과 진주 강씨 ‘태고정’ 두 개의 정자가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봉화=최흥수기자

 

 

 하늘은 시리도록 파랗고 햇살은 따스했지만, 옷깃으로 파고드는 바람은 쌀쌀했다. 경북 봉화는 겨울철 일기예보에서 아침 최저기온을 언급할 때 단골로 등장하는 지역이다. 봉화에서도 문수산(1,205m) 자락 춘양면은 봉화읍내보다 2~3도는 더 낮다. 서리를 맞으면 농사를 망치기 때문에 5월 10일 이전에는 고추를 옮겨 심지 못하고, 10월 10일 이전에는 웬만한 밭 작물 수확을 끝내야 하는 곳이다. 연중 절반은 겨울인 셈이어서 춘양(春陽)이라는 지명은 역설적으로 따스한 봄볕을 기다리는 바람으로 해석된다.

 

 

◇’억지춘양’의 시발점 춘양역 

 

 그렇다. 춘양은 이름부터 좀 억지스럽다. 춘양역은 안될 일을 무리하게 기어이 해내려는 고집, ‘억지춘양’이라는 말의 유래가 된 곳이다. 일반적으로 철로는 강을 만나면 다리로 건너고, 산을 만나면 터널로 통과한다. 휘어진 길을 곧게 펴 되도록이면 두 지점을 최단거리로 연결한다. 그런데 1955년 개통한 영암선(영주~철암) 선로는 법전~녹동 구간에서 말발굽(Ω) 형태로 크게 휘어진다. 애초 계획에 없던 춘양면소재지를 거쳐가기 위해서다. 빠른 길을 놔두고 철도 노선이 이렇게 된 데는 당시 춘양면 서벽리 출신 자유당 정문흠 의원의 영향이 컸다. (춘양역에는 ‘정모 의원’이라 써 있고, 춘양시장 벽화에는 이름과 사진까지 명확히 그려 놓았다.)

 

 

 

‘억지춘양’의 유래가 된 영암선 춘양역.

 

 

역 대합실에 걸려 있는 옛 춘양역 건물이 더 아담하고 운치있어 보인다.

 

 

장날이면 발 디딜 틈이 없었다던 춘양역 앞 모습. 1970년대 전성기에 멈춰 있는 듯하다.

 

 과정은 억지스러웠지만, 결과적으로 춘양역은 제 몫을 톡톡히 해냈다. 장날이면 역에서 시장까지 인근 지역에서 모인 사람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붐볐고, 인구는 한때 1만명이 넘어 군청소재지인 봉화가 부럽지 않았다. 태백과 철암에선 쌀과 과일을 사러 오고, 해산물이 귀한 산간 지역에선 싱싱한 어물을 사기 위해 몰렸다. 특히 동해 묵호에서 고무 대야에 해산물을 한가득 싣고 오는 장사꾼이 많았는데, 이들을 위해 지정 칸을 운영했을 정도였다.

 

 억지춘양에 관한 또 다른 이야기는 ‘춘양목’과 관계 있다. 춘양목은 봉화 고산지대에서 자라는 속이 붉고 단단한 소나무를 이른다. 궁궐의 건축재로도 사용하던 적송 혹은 금강소나무다. 철로가 생긴 후 춘양에는 봉화뿐만 아니라 삼척과 울진의 목재까지 몰렸고, 이 목재는 춘양역을 통해 전국으로 실려 나갔다. 자연스럽게 춘양목은 소나무에서 목재로 개념이 확장된다. 고급 목재로서 춘양목의 명성이 높아지자 다른 지역에서 이름을 도용하게 되는데, 여기서 ‘억지춘양’이 유래됐다는 것이 또 하나의 설이다. 타 지역에서 생산한 농산물이 ‘이천쌀’ ‘영양고추’로 둔갑하는 격이다.

 

 억지춘양에 관한 세 번째 가설은 ‘억지춘향’이 변한 말이라는 것이다. 조선 최고의 연애소설 ‘춘향전’의 주인공 성춘향이 전북 남원 사람이라는 것은 잘 알려졌다. 하지만 이몽룡의 고향은 명확하지 않은데, 설성경 연세대 명예교수가 1999년 봉화 물야면 계서당(溪西堂)의 주인 성이성(成以性, 1595~1664)이 소설 속 이 도령의 모델이라는 연구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 평생을 검소하게 살았던 성이성은 사후 홍문관 부제학에 추서되고 숙종 때 청백리에 뽑힌 인물이다. 부친 성안의가 광해군 때 남원부사를 지낸 이력은 성이성이 이몽룡이라는 근거를 뒷받침한다. 춘양면이 아닌 물야면의 인물까지 억지로 끌어와서 ‘억지춘향’이 됐다는 이야기인데, 세 가지 ‘억지춘양’설 중에 가장 억지스럽다.

 

 

억지춘양시장 간판에 ‘억지로라도 한번 가보시더’라는 경북 북부지역 사투리가 쓰여 있다.

 

시장은 현대식으로 깔끔하게 정비했지만, 쌀시장과 우시장으로 명성을 날렸다는 흔적은 찾을 길 없이 스산하다.

 

시장 인근 담벼락이 ‘억지춘양’의 유래와 ‘춘양목’을 알리는 타일 벽화로 장식돼 있다.

 

 억지춘양의 유래와는 상관없지만 억지스러운 것은 또 있다. 봉화에서 춘양을 스쳐 울진으로 이어지는 36번 국도의 도로명은 ‘파인토피아로’다. 새 주소 이름을 지을 때 당연히 춘양목을 떠올렸을 텐데(그렇지 않았다면 더욱 이해하기 어렵다) ‘춘양목로’라 하지 않고 굳이 불명확한 외래어를 끌어왔다. 파인토피아의 정확한 의미를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이며, 외래어에 익숙하지 않은 고령의 주민이 많다는 걸 감안하면 이런 억지가 없다. 이왕 억지를 부리기로 했으니, 춘양 전통장은 아예 ‘억지춘양시장’이라는 이름을 내걸었다.

 

 시장 주변 담장에는 억지춘양의 유래를 알리는 타일 벽화로 깔끔하게 장식해 놓았다. 전통시장을 개량하는 것은 좋은데, 깔끔해도 너무 깔끔하다. 손마디 굵은 어머니들이 보따리를 펴 놓고 텃밭에서 기른 농산물을 판매하는, 전통시장의 정겨운 모습은 찾을 길이 없다. 천장은 높고 통로는 차가 다닐 정도로 넓어, 왁자지껄해야 할 시장이 장날(4ㆍ9일)이 아니면 지나치게 한산하다. ‘억지로라도 한번 가보시더! 희안(喜安)하니더!’ 시장에 붙은 사투리 구호처럼 우기기 작전이라도 펼쳐야 할 판이다. 하루 200~300마리가 거래되는 대규모 우시장이 섰다는 명성의 영향일까. 한우 정육점과 식당이 유난히 많은 것이 그나마 특이한 점이다.

 

 

◇한수정과 만산고택, 그리고 낙천당마을 

 

 춘양은 작은 고을 치고 양반의 기품이 짙게 남아 있다. 춘양역에서 다리 하나를 건너면 운곡천 개울 옆에 오래된 정자 하나가 멋들어지게 자리 잡고 있다. 조선 선조 41년(1608) 권래가 할아버지인 권벌(1478~1548)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한수정(寒水亭)이다. 권벌은 중종 때 문신으로 예조판서를 지냈고, 사후 영의정에 추증된 인물이다.

 

 

운곡천 옆 한수정. 차가운 물에 머리를 맑게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책 읽기도 좋지만 놀기에 더 좋아 보인다. 들어갈 수 없어 아쉽다.

 

 T자형 정자를 빙 둘러서 파놓은 와룡연(臥龍淵) 연못과 300년 넘은 느티나무가 어우러져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그만이다. 이름대로라면 차가운 물에 머리를 맑게 하고 학문에 정진하는 곳이지만, 책을 핑계 삼아 담소를 나누거나 술 한잔 걸치고 푸지게 낮잠을 즐기기에 더없이 좋아 보인다. 잠시라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출입문에 자물쇠가 굳게 잠겨 있어 담장 너머로 바라볼 수 밖에 없다. 집터가 도로보다 낮아 다행히 대략적인 정취를 상상하는 데는 문제가 없다.

 

 한수정에서 약 600m 떨어진 만산고택은 편액 전시장이라 할 만하다. 이 고택은 중추관 의관을 지낸 만산 강용(姜鎔, 1846~1934)이 1878년에 지은 사대부 가옥이다. 행랑채 한가운데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넓은 마당 건너편 사랑채 처마에 만산(晩山), 정와(靖窩), 존양재(存養齋), 차군헌(此君軒)이라는 현판이 차례로 걸려 있고, 바로 옆 아담한 건물에는 서실(書室)과 한묵청연(翰墨淸緣)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만산’은 대기만성의 큰 인물이라는 뜻으로 흥선대원군이 작호하고 써준 글이다. 고요하고 편안한 집이라는 뜻의 ‘정와’ 역시 만산의 아호다. 본심을 잘 보존해 이치를 양성하는 집이라는 의미를 지닌 ‘존양재’와 함께 조선 말기 서예가 강벽원의 글씨다. 대나무가 있는 집이라는 뜻의 ‘차군헌’과 ‘서실’ 현판은 조선 후기 문신 권동수가 썼으며, 문필로 맺은 맑고 깨끗한 인연이라는 의미의 ‘한묵청연’은 고종의 일곱째 아들 영친왕(1897~1970)이 8세 때 쓴 글이다.

 

 

만산고택은 작은 현판 박물관이다. 만산의 4대손 강백기씨가 부인과 함께 집을 지켜오고 있다.

사랑채 처마에 걸린 ‘만산’과 ‘정와’ 편액. 둘 다 만산 강용의 아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