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도포로수용소 유적공원에서 모노레일을 타고 30분 오르면 계룡산 정상에 닿는다. 전망대 아래로 거제면의 들판과 다도해 풍경이 평화롭게 펼쳐진다. 포로수용소의 통신대 유적도 남아 있지만 전쟁의 상흔이 느껴지지 않는다. 거제=최흥수기자
“거제(巨濟)는 크게 베푼다는 뜻으로 세 번이나 나라를 살렸습니다. 옥포대첩으로 나라를 구했고, 6ㆍ25 때는 피란민들을 살렸고, IMF 때는 거제의 조선산업이 경제의 버팀목이었습니다. 이 정도면 이름값을 한 셈이지요?” 신영희 거제문화관광해설사의 자랑이다. 거제도는 제주도에 이어 대한민국에서 두 번째로 큰 섬이다. 조선산업의 호황으로 일인당 국민소득이 전국에서 가장 높은 기초자치단체라고 자랑하던 때가 바로 엊그제인데, 지금은 반대로 그 때문에 휘청거리고 있다. 조선소를 제외하면 거제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관광지가 남부면 ‘바람의 언덕’이다. 따지고 보면, 거제는 언제나 바람 타는 섬이었다. 남해 끝자락이라는 지리적인 특성과 맞물려 역사적으로도 가장 먼저 거센 바람과 맞닥뜨린 땅이었다.
거제의 또 다른 전쟁, 포로수용소 유적공원
한국전쟁은 남북이 대치하는 전선과 멀리 떨어진 거제에도 큰 상흔을 남겼다. 당시 거제는 지금처럼 다리로 연결된 것이 아니어서 중공군의 개입으로 국군이 낙동강까지 밀렸을 때도 전쟁을 실감하지 못했다. 그러나 1951년 포로수용소가 들어서면서 주민들은 뒤늦게 전란에 휘말리게 된다. 현재 시청이 들어선 고현동을 중심으로 계룡산과 독봉산 일대 6개 마을 주민은 영문도 모른 채 살던 땅에서 강제로 내쫓겼다. 12㎢(360만평)에 달하는 땅에는 60ㆍ70ㆍ80ㆍ90 단위의 숫자로 구역을 나눠 포로수용소가 들어섰다. 이렇게 만들어진 28개 수용동에는 전쟁포로로 잡힌 인민군 15만명, 중공군 2만명 등 17만 3,000여명이 수용됐다. 수용소 시설을 지원할 비행장, 보급창, 병원, 도로, 탐조등도 설치됐다.
애초에는 포로수용소 장소로 제주가 거론됐지만, 빨치산의 공격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와 최악의 경우 제주를 임시수도로 사용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제외됐다. 대신 육지에서 가까워 포로 이송과 물자 수송이 쉽고, 겨울에도 크게 춥지 않다는 이점 때문에 거제로 결정됐다.
20평 막사에 60~70명이 밀집해 생활했던 포로수용소에서는 반공포로와 친공포로 간 유혈 살상이 빈발했다. 포로수용소 자체가 이념 갈등의 축소판이자 또 하나의 전장이었다. 1952년 5월 7일에는 수용소 사령관이었던 도드 미군 준장이 포로에게 납치되는 사건이 발생해 세계적인 주목을 받기도 했다. 도드 준장은 후임 콜슨 소장이 반란 포로의 요구사항을 들어주는 문서에 서명하고 풀려날 수 있었는데, 이 때문에 둘은 대령으로 강등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흔히 무질서한 상황을 비유하는 ‘도떼기시장’이 ‘도드’ 준장의 이름에서 유래했다는 주장도 있다. 시끌벅적한 상황에서 비밀로 거래되는 비정상적인 시장을 뜻하는 말이니 의미가 크게 틀리지 않다. 포로수용소에 인공기와 김일성 초상화가 걸리고, 인민군 군가까지 울려 퍼졌으니 도떼기시장이 따로 있겠는가.
현재 계룡산 동쪽 자락에 조성한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에는 당시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조인으로 포로수용소가 폐쇄되자 보상 한 푼 받지 못하고 강제로 내쫓겼던 주민들이 들어와 논밭을 일구고 다시 삶터를 꾸렸기 때문이다. 일부 남은 포로수용소 유적은 1983년에 경상남도 지방문화재로 지정됐고, 1999년에야 미국까지 뒤져서 모은 1,300여점의 사진과 문서 등으로 유적관을 개관했다. 이럭저럭 묻힐 뻔했던 분단의 아픈 역사가 뒤늦게나마 다시 조명받게 된 것은 다행이었다.
흥남철수작전과 김치파이브 형제의 평화만들기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은 크게 전쟁, 포로, 복원, 평화 존(Zone)으로 구분돼 있다. 동선을 따라 이동하며 찬찬히 보려면 1시간 넘게 걸린다. 공원에 들어서서 전쟁 존에서 가장 먼저 보게 되는 것은 흥남철수작전기념비다.
흥남철수작전은 1950년 12월 15일부터 열흘간 함경남도 흥남 부두에서 민간인 10만명을 성공적으로 후송한, 세계전쟁사에서 가장 인도주의적 작전으로 평가된다. 기념비 앞에는 그중에서도 전설적으로 작전을 수행한 메러디스 빅토리(Meredith Victory)호에 오르는 피란민들의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원래 상선으로 사람은 승무원 60명만 태울 공간이 있었지만, 모든 화물과 자체 시설까지 버리고 흥남부두에 남은 1만4,000여명을 무사히 남쪽으로 수송했다. 이 작전으로 가장 많은 사람을 태우고 항해한 배로 기네스북에 등재됐다.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애초 부산항에 피란민을 내려 놓을 예정이었지만, 부산이 이미 포화상태에 이르러 거제로 방향을 틀었는데, 장승포항에 도착한 것이 마침 12월 25일이었다. 흥남에서 거제까지 3일간의 항해 도중 비좁은 배 안에서 5명의 새 생명이 태어나 작전은 크리스마스의 기적으로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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