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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경북. 울산

경북 안동, 조선 이전의 안동 이야기

by 혜강(惠江) 2018. 7. 18.

 

 

 

경북 안동, 조선 이전의 안동 이야기 

 

 

800년 지켜온 목향(木香) 불교의 세월 되감아  

 

 

안동 = 글·사진 박경일 기자

 

 

 

다른 여섯 곳의 내로라하는 절집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경북 안동의 봉정사는 작고 소박한 절집이다. 다른 절집과 견줘 건물도 그렇고 풍경도 그렇다. 봉정사 마당 끝에서 암자 영선암으로 오르는 돌계단 길.

 

 

경북 안동은 조선 중기 이후 유교 문화의 중심이었습니다. 퇴계로 대표되는 성리학적 유교 문화가 위세를 떨치던 무렵, 안동은 나라의 중심이었지요. 안동이 스스로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를 자처하는 것도 그래서입니다. 하지만 안동에 조선과 성리학만 있었던 건 아닙니다. 안동에는 고려와 불교의 자취도 뚜렷합니다. 우선 안동이라는 지명부터가 ‘동쪽을 편안하게 한 곳’이라는 뜻으로 고려 태조 왕건이 지어 붙인 지명입니다.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봉정사의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인 극락전이 지어진 것도 고려 때이지요. 조선의 문화적 전통이 깊이 새겨진 안동에서 굳이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 보기로 했던 것은, 다양한 시간의 지층이야말로 안동으로 떠나는 여행을 더 풍성하게 해줄 것이란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 오래된 것들이 가진 시간의 힘… 봉정사 극락전



경북 안동의 봉정사(鳳停寺). ‘산사(山寺), 한국의 산지 승원(山地 僧院)’이란 이름 아래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절집이지만, 봉정사를 아는 이들은 별로 없다. 봉정사와 함께 세계유산 목록에 오른 다른 절집과 비교해보자. 양산 통도사, 영주 부석사, 보은 법주사, 해남 대흥사, 순천 선암사, 합천 해인사, 공주 마곡사…. 내력으로 보나 절집의 위세로 보나 모두 나라 안에서 내로라하는 절집들이다. 여기에 비하면 봉정사는 일단 그 규모부터가 비교 대상이 되지 않는다. 다른 절집과 비교해 좀 심하게 말하자면 ‘겨우 암자를 면한’ 수준이다. 오죽하면 봉정사는 경북 의성 고운사의 말사(末寺)다. 다른 절을 거느리기는커녕 고운사가 거느린 막내 절이란 얘기다.

그럼에도 봉정사가 당당히 세계유산 목록에 이름을 올리게 된 건 바로 ‘시간의 깊이’ 때문이다. 봉정사에는 고려 때 중건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인 극락전이 있다. 극락전이 건너온 시간이 800년을 헤아린다. 목조건축물이 이만한 시간을 무사히 건너온 것은 가히 기적 같은 일이다. 목조건축물은 물과 불에 취약하다. 용케 물과 불을 피했어도 사람이 살지 않으면 버려진 전답처럼 금세 이끼가 크고 잡풀이 자라며 부식이 진행된다. 그러다가 풀썩 쓰러지는 건 시간문제다. 극락전이 지금껏 온전하게 남아 있는 건 그동안 화재나 수재, 태풍 피해를 겪지 않았다는 뜻이다.

여기서 궁금증 하나. 봉정사 극락전이 최고(最古)의 목조건축물이라는 사실을 과연 어떻게 알아냈을까. 정확한 기록은 없다. 다만 설득력 있는 기록으로 추정할 뿐이다. 때는 1972년. 봉정사의 극락전 해체 복원 작업을 하다가 고쳐 지은 내력을 적은 문서가 발견됐다. 문서에는 고려 공민왕 때인 1363년 지붕을 크게 수리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목조건축물의 경우 통상 새로 짓고 나서 100년이나 150년 뒤에야 대대적인 수리를 하는 법. 이런 추론 과정을 거쳐 봉정사 극락전을 1200년대 초에 처음 지어진 건물로 추정하는 것이다.

이 문서가 발견되면서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로 여겨왔던 부석사 무량수전이 ‘두 번째’로 밀려났다. 무량수전의 해체 수리는 앞서 1916년에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 나온 문서에는 고쳐 지은 해가 ‘1376년’으로 나온다. 봉정사 극락전을 고쳐 짓고 13년이 지난 뒤에 부석사 무량수전이 고쳐진 것이다. 고친 것의 순서가 이렇다면 지은 순서도 마땅히 그럴 것이라는 게 합리적인 추론이다. 극락전이 무량수전보다 건축이 앞선다는 결론은 이렇게 내려진 것이었다.





# 봉정사 오솔길의 소나무와 참나무


 

▲ 경북 안동의 이천동 석불. 정식 명칭은 이렇지만 거대한 자연석 위에다 불두를 올려 만든 이 불상을 주민들은 오래전부터 ‘제비원 석불’이라고 불러왔다. 전통의 민간신앙을 포용한 불교적 세계관을 보여주는 이 미륵불은 한때 안동소주의 상표 이미지로도 쓰였다.

 

 

봉정사로 드는 오솔길은 솔숲으로 둘러싸여 있다. 수령은 그리 오래지 않지만, 빽빽하게 들어찬 소나무들이 하늘을 다 가리고 청량한 그늘을 드리운다. 숲길 곁에는 자그마한 폭포를 거느린 정자 명옥대(鳴玉臺)가 있다. 울 명(鳴)에 구슬 옥(玉). 본래 정자의 이름이 낙수대였다는데, 봉정사에 머물던 퇴계가 물소리가 옥을 굴리듯 아름답다 해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지었다고 전해진다.

절집으로 이어지는 오솔길의 숲이 일주문을 경계로 일순 바뀐다. 일주문 이전까지는 소나무 숲이고, 문 안으로 들어서면 참나무 숲이다. 솔숲이 청량하다면, 참나무 숲 그늘은 서늘하고 어둡다. 절집으로 이어지는 길은 제법 깊지만, 다 걷는 데 고작 10분 남짓. 짧아서 못내 아쉽다.

숲길을 다 걷고 나면 질박한 나뭇결을 그대로 드러낸 누각 만세루를 만난다. 만세루 곁에는 소나무 한 그루가 마치 술에 취한 것처럼 자세가 무너진 채 자라고 있다. 기품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자태다. 베어져 누각의 기둥으로 반듯하게 선 나무기둥의 단정함에 대비되기 때문일까, 아무렇게나 가지를 뻗은 나무는 유독 더 눈에 띈다. 엄숙한 절집 앞에서 어쩌자고 저리 경망스러운 자세로 자라고 있을까. 슬며시 웃음이 나온다.

고개를 숙여 만세루 누각 아래를 지나 계단을 하나둘 딛고 오르면 이내 마당이 나오고 그 뒤로 고색창연한 대웅전이 눈앞에 확 다가선다. 여기가 절집의 중심인 대웅전의 영역이다. 대웅전 영역 서쪽에 비슷한 형태의 극락전 영역이 있다.

대웅전은 양옆으로 화엄강당과 승방인 무량해회를 양쪽에 거느리고 있고, 극락전은 고금당과 화엄강당을 양옆으로 두고 있다. 대웅전과 극락전의 공간이 나란히 독자적인 영역을 이루고 있는 건 드문 경우다. 국보인 극락전과 대웅전은 산문과 정면으로 마주 서 있고, 보물인 고금당과 화엄강당은 마치 국보를 호위하듯 옆으로 서 있다.


# ‘소멸하지 않았다’는 것의 의미

▲ 석탑 뒤의 건물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인 안동 봉정사의 극락전이다. 극락전은 국보. 극락전 왼쪽의 고금당도 보물이다.
▲ 극락전 벽에 그려진 용 그림과 ‘주상전하(主上殿下)’라는 글씨. 주상전하는 홍건적을 피해 안동으로 내려왔던 고려 공민왕을 의미한다.

건축적 아름다움으로만 보자면 나무 문살을 두른 대웅전이 한 수 위지만, 봉정사에 들어선 이들은 극락전 앞으로 먼저 간다. ‘국내 최고(最古)의 목조건축물’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다. 그러나 극락전의 미감을 한눈에 알아보기란 쉽지 않다. 어쩌면 극락전 앞에서 실망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건물이 지닌 기품부터가 ‘최고 목조건축물’ 자리를 놓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던 부석사 무량수전에 비할 바가 아니니 말이다.

극락전의 간결하고 투박한 형태는 자못 무심해 보이기까지 한다. 가장 오래됐다지만 특별한 건 없다. 법당에 옆문이 없어 가운데 문으로 드나들어야 한다는 것 정도가 좀 다르다고 느껴질 따름이다. 하나 특이한 것은 외벽에 용 그림과 함께 ‘주상전하(主上殿下)’라는 글자를 써놓았다는 것이다. 주상전하는 임금을 뜻하는 말인데, 그 임금은 누구를 말하는 걸까.

안동의 고려 얘기를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게 공민왕이다. ‘몽진(蒙塵)’. ‘먼지를 뒤집어쓴다’는 뜻이다. 임금이 깨끗하게 쓸어낸 길을 가지 못하고, 급박한 상황에서 먼지를 뒤집어쓰며 피란했음을 뜻하는 말이다. 이 말을 쓸 때 주어는 ‘임금’이다. 그래도 일국의 지존인데, 왕의 피신을 속되게 ‘도주’나 ‘피란’이라고 할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1361년 10월 고려 공민왕은 안동 땅으로 몽진했다. 657년 전의 일이다. 홍건적은 두 번 고려를 침입했는데, 공민왕은 두 번째 침입 때 수도 개경을 버리고 피란을 떠났다. 명색이 왕이었지만 피란길은 궁색하기 짝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진눈깨비가 몰아쳐 눈비에 젖은 옷이 다 얼어붙었고, 간신히 마을에 도착해도 관리와 백성이 모두 도망치고 없었으니 숙소 사정도, 음식 사정도 형편없었다.

그러나 안동은 달랐다. 공민왕이 안동에 도착한 건 1361년 12월 15일. 안동으로 들어서려면 한겨울에 맨발로 차가운 냇물을 건너야 했다. 이를 본 안동의 부녀자들이 서로 등을 맞대 다리를 만들어서 일행을 건너도록 했다. 벼슬아치들도 깃발을 앞세우고 모든 관원이 나와 왕을 맞이했다.

공민왕은 안동 사람들의 이런 모습에 얼마나 감동했을까. 그 자리에서 공민왕은 귀중품을 하사했으며 훗날 개경으로 환도한 뒤에도 안동의 지위를 승격시키고 조세를 면제해주는 조치를 내렸다. 극락전에 새겨진 주상전하라는 글씨는 공민왕과의 이런 인연이 바탕이 됐다.


# 공간을 다루는 비범한 솜씨

▲ 안동시 법흥동의 법흥사지 칠층 전탑의 당당한 위용. 탑의 높이가 17m에 달한다. 전탑이란 흙으로 만든 벽돌로 쌓은 탑을 말한다.

목조건축물은 늘 고쳐 짓는다. 극락전이 800여 년 전에 지어진 건물이라고 해도, 부자재가 모두 그때의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한때 극락전은 미국산 리기다 소나무와 알래스카산 가문비나무로 짜 넣은 민흘림 기둥이 지붕을 받치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나중에 금강송으로 바꿔 넣긴 했지만 말이다. 건물을 지탱하는 건 ‘오래된 자재’가 아니라 ‘이어온 정신’이다.

극락전이 800년이 됐다는 뜻은 기둥의 나무와 지붕의 기와가 그만큼 오래됐다는 뜻이 아니다. 그렇다면 시간을 세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고? 천만의 말씀. 오래된 건축의 양식이나 미감도 중요하지만. 덧붙여 가장 중요한 가치는 그 건물이 ‘소멸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닐까.

수없이 고쳐 지어졌음에도 봉정사 극락전은 쓰러져 흩어지지 않고 여태 남았다. 누군가 처음 지은 그 자리에, 처음 지어진 그 형태 그대로. 의상대사의 제자가 종이로 접어 날린 봉황이 머문 자리라는 이곳에 말이다.

봉정사에는 극락전만 있는 건 아니다. 경내에 국보 둘(극락전, 대웅전)에 보물이 도합 넷(화엄강당, 고금당, 후불벽화, 목조관세음보살좌상)이다. 국보나 보물 여섯 개 중에서 넷이 목조건축물이고, 여기다 목조관세음보살좌상을 더한다면 나무로 지은 것만 다섯이다. 귀하디 귀한 목조문화재가 훼손되지 않은 채 봉정사에 남아 있다는 건, 두 가지를 알려준다. 하나는 과거 봉정사의 위세가 당당했다는 것. 봉정사는 오래전 조선 초기에 팔만대장경을 보유하고, 500여 결(3만여㎡)의 논밭을 지녔으며 전체 건물이 75칸이나 됐던 대찰 중의 대찰이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절집이 오랜 시간 동안 전란의 화나 화재, 수재, 태풍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뜻이다. 절집 아래 마을 주민들은 그 비결이 “봉정사 좌우를 감싸고 있는 천등산의 지맥 덕’이라고 입을 모았다.

봉정사를 갔다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암자 영선암이다. 암자라고는 하지만 절집에서 고작 마흔 개쯤 계단을 오르면 닿는 거리에 있다. 초록 숲 한가운데 암자로 오르는 단정한 돌계단에서는 수채화 같은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영선암에서 봐야 할 것은 절묘하게 어우러진 건축과 조경이다. 영선암은 마당을 가운데 두고 ㄷ자 형으로 건물이 들어서 있다. 여기에 대문 역할을 하는 우화루를 보탠다면 ㅁ자 형상이다. 사방이 건물로 막혔으니 마당은 시선이 닫혀 갑갑할 수밖에 없는데, 누마루의 한쪽을 터서 시야를 확보하고, 마당의 높이를 세 단계로 나누는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공간감을 확보했다.

정원으로 가꾼 영선암의 마당도 예사롭지 않다. 영선암의 뜰은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에서도 등장한다. 노승 혜곡이 낡은 요사채의 작은 방에 앉아 바라보던 그 마당이다. 빈 마당을 석등 하나로 눌러준 것이나, 바위 위에서 자라는 만지송 한 그루를 심어둔 것에서도 공간을 다루는 솜씨가 느껴진다. 직각으로 건물 끝이 만나 처마를 맞댄 요사채와 우화루의 툇마루를 좁은 복도로 연결해 낸 기발한 발상도 다른 데서는 전혀 본 적이 없는 것이다.


# 소망과 기원이 바쳐진 곳… 미륵불과 전탑

▲법흥사지 칠층 전탑이 있는 법흥동 인근의 신세동에는 벽화마을이 있다. 담이나 벽에다 그려 넣은 그림 솜씨가 수준급이다.

안동에는 ‘제비원 석불’이 있다. 공식명칭이 ‘이천동 석불’로 정해지면서 이제는 ‘속칭’이라는 말머리를 붙여야 하지만, 안동 사람들에게 석불은 여전히 제비원 석불이다. 제비원 석불은 외지 사람들에게는 다소 낯설지만, 안동 사람들에게는 오랜 세월을 함께해온 친근한 존재다. 한때 안동의 특산물인 안동소주의 상표 이미지로 쓰였을 정도였다.

이천동 석불은 안동과 영주를 잇는, 차량 통행이 빈번한 5번 국도변에 있다. 석불은 자연 거석을 그대로 몸체로 삼아서 정교하게 깎은 불상의 머리를 올려놓은 석불이다. 몸은 거대한 바위에 새겨 그린 마애불이고, 그 위에 얹은 머리는 돌을 깎아 만든 석불이란 얘기다.

고려 태조 왕건이 실권을 장악한 뒤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불상은 깊은 산중에서 수도자를 기다리는 대신 사람 사는 길가로 나와 있다. 이천동 석불을 민중의 소망을 받아줬던 미륵으로 보는 이유다. 56억7000만 년이 지난 뒤 천계에서 이 땅에 와서 현실의 인간을 구원한다는 미륵. 미륵은 늘 위기의 시기에 등장했다. 이천동 석불은 후삼국의 전쟁이 치열하게 벌어졌을 무렵에 세워졌으리라. 고려 건국을 앞두고 후삼국이 벌인 전쟁의 참극 속에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민중의 희망으로 이천동 석불, 아니 제비원 석불은 서 있었을 것이다.

이천동 석불의 거석 주변은 공원으로 조성돼 있고, 석불 뒤에는 자그마한 절집도 들어서 있다. 석불의 부드러운 얼굴선이나 몸체에 새긴 그림은 낮에 더 잘 보이지만, 밤에 경관 조명이 켜질 때의 모습도 인상적이다. 조명이 너무나 밝은 데다 빛의 색깔도 부자연스러운 것이 흠이라면 흠. 그러나 거석을 몸체로 삼은 미륵불이 조명의 불빛으로 살아나 푸른 어둠 속에서 양 어깨를 빼고 당장에라도 성큼성큼 걸어 나올 것만 같다.

안동 땅의 불교유적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전탑이다. 전탑이란 흙으로 구워 만든 벽돌로 쌓아 올린 탑을 말한다. 국내에 남아 있는 전탑은 모두 5기. 그중에서 3기가 여기 안동에 있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통일신라 때 만들어진 안동의 법흥사지 칠층 전탑이다. 높이가 17m, 너비는 7.75m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전탑이다. 탑이 서 있는 자리가 법흥동인데, 어찌 된 일인지 국보 지정 당시 실수로 신세동으로 지명이 붙여져 ‘신세동 7층 석탑’이라고 불리다가, 최근에야 제대로 된 이름을 되찾았다. 전탑 뒤로 고성 이씨 탑동 종택이 있고, 서쪽에는 임청각 고택이 있다. 임청각은 상하이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이상룡 선생의 생가다. 인근에 2009년 문화체육관광부 마을미술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조성된 신세동 벽화 마을이 있다. 골목골목에 그려진 수준급의 벽화들이 인상적인 곳이다.


■ 가는 길 · 묵을 곳 · 먹을 것

 

 


 

봉정사 가는 길

 

= 수도권에서 가자면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만종분기점에서 중앙고속도로로 갈아타고 서안동 나들목에서 나와야 한다. 34번 국도를 타고 안동 시내로 향하다 송야교 부근에서 924번 지방도로 갈아타고 서후면사무소를 지나 봉정사 삼거리에서 이정표를 보고 좌회전해 들어가면 된다. 봉정사에서 나와 저전에서 5번 국도로 갈아타고 안동 시내로 가다 보면 길가에 선 제비원 석불을 볼 수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계기로 고려 때 지어진 국내 최고의 목조건축물인 극락전이 있는 봉정사에 들렀다가 안동에 남아 있는 고려와 후삼국, 통일신라 시대의 자취까지 거슬러 올라갔지만, 안동에 가서 꼭 이런 곳들만 골라 가보라는 취지는 아니다. 조선 중기 이후의 유적들이 즐비한 안동에서 기왕의 명소들을 둘러 보면서, 여기 소개한 곳들도 들러 보라는 권유로 이해하면 좋겠다.

어디서 묵고 무엇을 맛볼까

 

= 안동의 하회마을과 병산서원 인근에 민박집이 많다. 전통 고택의 맛을 느끼려면 하회마을에서, 고즈넉한 정취를 만끽하자면 서원 근처 병산서원 부근의 민박집에 묵는 것이 더 낫다. 병산서원 근처에는 강변민박(054-853-2566)이나 식당과 민박을 겸한 하회식당(054-853-3786), 병산민속식당(054-853-2589) 등이 있다.

안동에는 안동찜닭이 있다. 시외버스터미널 부근의 목성교의 구시장 안에 중앙통닭(054-855-7272) 등 찜닭집들이 몰려있다. 달착지근한 간장에 칼칼한 청양고추를 넣어 조려낸 찜닭과 쫄깃한 당면 맛이 일품이다. 제사에 오르는 음식을 내는 헛제삿밥은 안동댐 월영교 부근의 ‘까치구멍집’(054-821-1056)이 가장 이름났다.

 

 

<출처> 2018. 7. 18 /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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