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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풍기, 정감록 '으뜸 피란처'

by 혜강(惠江) 2018. 7. 18.

 

 

경북 풍기, 정감록 '으뜸 피란처'

 

혼돈의 시대마다 삶을 품어주었다.

 

 

영주 = 글·사진 박경일 기자

 

 

 

조선시대 예언서 정감록에 ‘재난이 들지 않는 땅’으로 지목된 경북 영주시 풍기읍 금계리에는 솔숲 사이로 숨겨진 계곡이 있고, 그 계곡을 굽어보는 자리에 정자 금선정이 있다. 퇴계의 제자인 금계 황준량이 소요하던 그윽한 자리에다 훗날 그를 기려 지은 정자다.

 

 

조선 시대 예언서 정감록과 격암유록의 기록대로 여기가 과연 삼재(三災) 불입(不入)의 명당이자 ‘사람을 살리는 땅’이었을까요. 전란도, 흉년도, 전염병도 들지 않는다는 땅. ‘십승지지(十勝之地)’ 중 첫 번째로 꼽히는 이곳은 소백산 아래 경북 영주시 풍기읍 금계리입니다.

이곳에는 절망과 비탄 속에서 실낱같은 희망을 찾아 명당을 찾아 들어왔던 이들이 있고, 맑은 계곡을 굽어보면서 풍류를 완성한 그림 같은 정자도, 달빛의 이름을 걸어놓은 누각의 절집도 있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아내에게 바치는 시를 비석으로 일으켜 세운 사랑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만나면서 좋은 땅의 기운과 거기에 걸맞은 좋은 삶을 생각합니다.


# 정감록이 예언한 명당…금계리

경북 영주의 풍기. ‘풍기’ 뒤에는 바로 ‘인삼’이란 단어가 입에 착 달라붙지만, 사실 풍기에서 인삼보다 먼저 말해야 할 것이 ‘정감록’이다. 정감록은 조선 시대 세간에 널리 퍼진 예언서다. 이 책에는 난세와 병란을 피할 수 있는 땅 열 곳, 그러니까 ‘십승지지(十勝之地)’가 순서대로 소개돼 있다. 정감록에 따르면 우리 땅에서 ‘능히 난리를 피할 수 있는’ 열 곳(十勝) 중에서 첫 번째(一勝)가 바로 이곳 풍기 땅이다. ‘조선의 노스트라다무스’라고 불리는 격암 남사고는 예언서 ‘격암유록’에서 풍기가 병풍처럼 두른 소백산을 ‘사람을 살리는 산’이라 적었다.

예언서가 나돌기 이전부터 풍기는 예사롭지 않은 기운으로 가득한 땅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머리 위로는 소백산의 으뜸 봉우리인 비로봉과 연화봉, 도솔봉이 두르고 있는 데다, 이 세 봉우리 사이로 흘러내리는 금계천과 남원천, 두 개의 물줄기가 발을 적시고 있으니 말이다.

한국 풍수의 창시자로 꼽히는 신라의 도선국사. 그는 7년 동안 전국을 누비며 지은 풍수 책 ‘도선비기’에서 최고의 명당 터로 소백산 아래 풍기 땅을 꼽았다. 풍수도참 사상이 지배하던 고려에는 ‘산천비보도감’이란 독립기관이 있었다. 전국의 명산대천을 답사해 최상의 길지를 찾아내는 역할을 하던 곳이었다. 산천비보도감이 찾아낸 길지에 왕손의 태를 묻었다. 길지에 풍기 땅이 꼽히지 않았을 리 없다. 처음 고려 충목왕의 태가, 그리고 이후에 조선 문종과 사도세자의 태가 차례로 풍기에 묻혔다.

십승지지의 중심은 영주시 풍기읍 금계리다. 금계란 이름은 ‘금빛 찬란한 닭이 알을 품었다’는 이른바, 금계포란(金鷄抱卵)의 지세에서 따온 것이다. 금계란 이름은 금계리 뒤편 소백산 자락에도 있다. 풍기읍에서 소백산 쪽으로 더 들어간 자리의 산정에는 금계 바위가 있다. 닭의 볏을 닮은 두 개의 바위인데, 닭의 눈이 있는 자리에 보석이 박혀 있었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어느 날 보석이 탐이 난 나그네가 바위에 올랐다가 천둥과 벼락을 맞아 죽고 말았고, 보석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는 얘기다.

금계리가 정감록이 말하는 ‘재난이 들지 않는 땅’이란 소문이 돌면서, 난리가 있을 때마다 이 골짜기에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일제강점기에도, 6·25 전쟁통에도 그랬다. 금계리 주민 중 열에 여덟, 아홉은 정감록을 믿고 찾아온 이들이거나 그들의 후손이라고 했다. 특히 이북에서 온 사람이 많았는데 그중에서도 평안도 출신이 가장 많았고 황해도, 함경도 순이었다고 주민들은 기억했다.

정감록의 비결을 찾아든 이들에게 십승지지는 꿈꾸던 이상향이었으되, 그 희망은 힘차거나 밝은 것이 아니라 측은하고 안쓰러운 쪽에 더 가까웠으리라. 혼돈의 시대에 마지막으로 붙잡은 위태로운 실낱처럼…. 얼마나 많은 실의와 도탄이 제 살던 자리를 떠나서 여기까지 들어오게 했을까를 생각해보면 그렇다.




# 정자 마루에 빗자루를 놓은 까닭

 

 

 

소백산 연화봉 남동쪽 능선 중턱의 금계 바위. 수탉의 벼슬을 닮은 바위는 십승지지(十勝之地) 중에서도 가장 길지로 꼽히는 금계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다.

 

 

금계리는 다른 시골 마을과 별다를 게 없다. 최고의 풍수를 갖췄다고는 하지만, 그렇다니 믿을 뿐이다. 풍수의 빼어남은 눈으로는 잘 보이지 않으니 말이다. 금계 리 마을 한복판에는 느티나무 노거수 아래 ‘한국 천하 명당 십승지’라 새긴 비석이 있다. 지도 위에 전국의 십승지를 표시한 바위도 놓여 있다. 그게 아니었다면 이토록 평범한 시골 마을을 누가 천하 명당이라 짐작할 수 있을까.

밖에서 보기에 특별할 것 하나 없는 마을이지만, 금계리 마을 안으로 깊이 들면 ‘비경’이라 할 만한 경관이 있다. 소백산 아래로 흘러내린 물이 금선계곡을 이뤄 지나가는 자리. 그 계곡의 솔숲 사이에 정자 ‘금선정(錦仙亭)’이 있다. 정자는 금선계곡의 계곡미를 단번에 완성하는 화룡점정과도 같다. 계곡 옆으로는 먹을 듬뿍 찍어 붓질로 그린 것처럼 굵고 힘찬 소나무들이 늘어서 있고, 계곡 아래로는 옥계청류(玉溪淸流)가 흘러내린다. 금선정은 그 물을 내려다보는 바위 금선대 위에 올라앉아 있다.

문을 활짝 열어 둔 금선정에서 인상적이었던 건 빗자루였다. 정자 누마루 한쪽에 빗자루 두 개가 놓여 있다. 하나는 마당을 쓰는 싸리비이고, 다른 하나는 마루를 쓰는 갈목비다. 빗자루를 놓아둔 뜻은 짐작대로다. 내키는 만큼 앉았다 갈 때, 일어선 자리를 단정하게 정리해 달라는 의미. 다시 말하자면 빗자루는 오가는 길손들에게도 기꺼이 정자 마루를 내어주겠다는 푸근한 마음이다.

금선정 위쪽에는 정자가 또 하나 있다. 주차장 한쪽에 마을 주민들의 휴식을 위해 세운 듯한 계양정이다. 계양정은 정자보다 정자 앞에 몸을 한껏 기울여 자라는 굵은 소나무 한 그루가 시선을 잡아끈다. 붉은 둥치의 소나무 형상이 마치 붉은 용 한 마리가 꿈틀거리며 날아가는 듯하다. 계곡 양쪽으로 늘어선 소나무들도 기꺼이 명품이라 불러줄 만하지만, 정자 앞의 소나무야말로 ‘명품 중의 명품’이다.

빗자루는 금선정에도, 계양정 마루에도 있다. 그 빗자루 덕에 활짝 열어둔 정자의 반들반들한 마루에 누구나 편히 앉을 수 있다. 장마의 한가운데, 금선정 정자 마루에 앉아 명품 소나무들의 호위를 받으며 비 오는 계곡을 굽어보거나, 목침을 베고 누워 책장을 넘기며 빗소리를 듣는다면…. 이런 상상만으로도 몸과 마음이 다 나른해진다.


# 스승이 제자를 ‘선생’이라 부르다

 

 

▲순흥면사무소 인근의 봉도각 주변 연못에 피어난 수련과 소백산의 오지마을 달밭골의 깊은 숲에서 만난 큰까치수영

 

 

정자 마루에 앉았다면 서늘한 바람 속에서 이 정자가 기리는 이의 행적을 짚어보자. 금계 황준량. 그는 마흔일곱의 나이에 세상을 뜬 조선의 문인이자 관료였다. 500여 년 전쯤 그가 이 계곡을 소요하면서 걸터앉기 좋은 바위에 ‘금선대’란 이름을 붙였고, 훗날 그 바위 위에다 그를 기리는 정자, 금선정을 지었다고 전한다.

황준량은 스물네 살에 문과에 급제했다. 이른 나이에 과거에 합격한 이들을 일러 신동(神童)이라 했는데, 황준량을 일컬어서는 ‘기동(奇童)’이라 했다. ‘기이할 정도’로 뛰어났다는 뜻이다. 호조·병조 좌랑을 거쳐 경상도 감찰어사, 단양군수, 성주목사를 지냈다. 그럼에도 그를 아는 이들은 적다.

그가 누구였는가는 스승인 퇴계가 그를 얼마나 아꼈는지를 미뤄서 짐작할 수 있다. 한 사람이 죽은 뒤 그 사람의 일대기를 적은 것을 ‘행장’이라 하는데, 퇴계가 일생 동안 지은 행장은 7편에 불과하다. 이러저러한 인연을 내세워 당대의 석학인 퇴계로부터 글을 받으려는 민원이 쇄도했을 것임에도 그렇다. 명종 임금과 아버지를 빼고 나면 퇴계가 행장을 지어 삶을 기록한 인물은 고작 다섯이다. 농암 이현보, 충재 권벌, 정암 조광조, 회재 이언적, 그리고 풍기의 금계 황준량이 있다.

제자의 죽음에 행장을 쓰는 스승은 거의 없다. 격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퇴계는 황준량의 죽음을 슬퍼하며 손수 지방을 써 붙이고 곡을 했다. 빗돌에 새길 글씨도, 애통함을 담은 만사(輓詞)도, 제문(祭文)도 썼다. 추모사의 문장 한 줄 한 줄에서는 비통함이 뚝뚝 묻어났다.

놀라운 것은 퇴계가 추모사에서 열여섯 살이나 어린 황준량을 ‘선생’이라 적었다는 것이다. 어찌 스승이 제자에게 선생이라 할 수 있었을까. 당대의 사건이었다. 이런 퇴계의 파격적인 처신은 후일 조정에까지 알려져 실록에 남았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퇴계는 황준량이 남기고 간 글을 모아서 문집을 출간했다. 이어 황준량이 생전에 지으려 했던 서당 겸 거처인 금양정사를 짓도록 했다. 집을 짓고는 관리를 스님에게 맡겼는데, 그 스님이 자주 부역에 불려 다녀 관리가 허술해지자, 퇴계는 풍기군수에게 금양정사를 지키는 스님의 부역 면제를 탄원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 무밭에서 무 뽑듯, 달밭에서 달을 뽑다

 

 

▲ 소백산 아래 순흥에는 ‘봉서루(鳳棲樓)’가 있다. ‘봉황이 깃든 누각’이란 뜻이다. 누각 앞에다 봉황의 알을 상징하는 둥근 바위를 가져다 둔 건, 알을 두고 봉황이 날아가지 않으리란 믿음 때문이다.

 

 

황준량은 생전에 984수의 시를 남겼다. 그가 남긴 명문 중의 명문은 시가 아니라 그의 나이 마흔한 살에 명종 임금에게 올린 상소문이다. 단양군수로 재임 시절 적폐로 신음하는 단양 주민들의 삶을 절규하듯 토한 황준량의 상소문이 바로 ‘단양진폐소’다.



“…백성들이 무슨 죄가 있기에 이처럼 고통스럽게 합니까. 이슬을 맞으며 깊은 산속에 살고, 승냥이, 살무사에 죽더라도 돌아오려 하지 않습니다…미처 슬퍼하기 전에 눈물이 먼저 떨어집니다.”

이 글이 명문인 것은 읽은 이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이다. 명종은 상소문을 받아들고 단양에 20여 종의 공물을 10년간 감해주는 혜택을 내렸다. 과중한 공물을 바치느라 피폐할 대로 피폐했던, 그래서 산속으로 숨어갈 수밖에 없었던 백성들은 황준량이 얼마나 고마웠을까.

벼슬살이하는 동안 황준량의 마음은 늘 금선계곡으로 향했다. 퇴계가 쓴 황준량 행장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매번 벼슬에 뜻을 빼앗기고 관청의 사무로 괴로움을 당해 병이 깊어진다고 여기고, 어느 날 바람처럼 벗어나고자 생각했다.” 그러나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그의 소망은 이뤄지지 않았다. 병이 들어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 풍기로 돌아오던 중 그는 그만 예천에서 세상을 떴다.

금선정 뒤편의 가파른 시멘트 포장도로를 몇 굽이 올라서면 홀로 마을 뒤로 물러선 집, 금양정사가 있다. 금양정사는 황준량이 터를 닦았지만, 그가 죽고 난 뒤에야 세워졌다. 사랑채 격인 금양정사 옆으로 나란히 안채를 지었는데, 안채의 현판에 건 편액이 영월헌(迎月軒)이다. 뜻으로 풀면 ‘달을 맞이하는 추녀’다.

그러고 보니, 소백산 비로봉 아래에 붙여진 이름에 온통 달(月)이다. 금양정사가 영월헌을 걸었고, 소백산 삼가탐방지원센터에서 걸어서 30분이면 닿는 비로봉 아래 절집 비로사에는 월영루(月映樓) 현판을 달았다. ‘달이 비치는 다락’이란 뜻이다.

거기서 다시 산정을 향해 가파른 비탈을 더 오르면 소백산 아래 첫 동네 달밭골이 있다. ‘달밭(月田)’이라. 마을에서 세워놓은 안내판에서는 달을 미래의 희망으로, 또 지혜로 풀었다. 그리고 달밭골을 “무밭에서 무를 뽑듯, 달밭에서 달을 가꾸어 뽑는 곳”이라 적어두었다.

그러나 실상은 다르다. 달은 산을 가리키는 옛말이다. 가파른 산자락에 다닥다닥 붙은 다락 모양의 산중의 밭이 있다고 해서 달밭골이라 했을 것이었다. 이름의 연원이 다르대도 어떨까. 달랑 네 가구가 사는 산중 오지마을 달밭골의 달빛은 휘영청 밝을 테니 말이다.

 


# 시인의 집에 세운 마지막 시(詩)

 

 

▲ 소백산의 죽계구곡의 물가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는 노거수. 상처에 돋은 덧살과 옹이가 나무가 지나온 시간을 보여준다. 소백산의 깊은 골에는 이런 기운이 스며 있다.

 

 

연화봉과 비로봉, 국망봉으로 이어지는 소백의 능선은 금계리에서는 잘 안 보인다. 소백의 산줄기는 금계리에서 자수 고개를 살짝 넘으면 닿는 마을 백리에서 더 잘 보인다. 금계리에서 자수 고개로 내려서는 길. 소나무와 사과나무를 심은 진초록 정원을 가진 집 마당에 비석 두 기가 서 있다. 둘 다 시를 적은 시비(詩碑)다. 시비에 새겨진 ‘아내에게’란 제목의 시에 눈길이 갔다.

“…가난한 내 가슴을 / 난초인 양 다스리고 / 깊이 모를 눈빛으로 / 금 간 꿈도 때우더니 / 지금은 이 지아비를 /신주처럼 지켜선 당신.”

평생을 가난 속에서 사과농사를 지었던, 그러면서도 늘 시를 놓지 않았던 시인이 있었다. 두 해 전 작고한 고 김순한 시인. 안동이 고향인 그는 1962년 결혼 직후 아내와 이곳 풍기 땅으로 들어와 과수원집에서 머슴을 살았다. 꼬박 3년 머슴살이로 모은 돈으로 남의 땅을 얻어 농사를 시작했다.

한 해 한 해 땅을 늘려 그 흔한 경운기 한 대 없이 5000평이 넘는 사과밭을 일궜다. 평생 담배도, 술도 손대지 않고 몸이 부서져라 농사를 지었지만, 정작 그는 돈 버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사과를 거두고도 한 번도 사과공판장에 나가본 적이 없었을 정도였다. 대신 그는 책을 한시도 놓지 않았다. 사과밭에 갈 때도 책을 챙겼다. 농사를 지으면서 그는 시인이 됐다.

시인의 집 마당 비석에 새긴 시 ‘아내에게’는 시인이 일흔아홉 나이로 숨지기 한 해 전쯤, 그러니까 병이 깊어져서 요양원으로 거처를 옮기기 직전에 쓴 시다. 그가 집을 두고 요양원으로 갔던 건, 아내도 그 무렵에 대장암 판정을 받아 수술대에 오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요양원에 가기로 정해진 날, 시인은 아내 강혜영(79) 씨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했다. “내가 (당신에게) 잘해준 게 하나도 없네. 고생했네…수고했네….” 그리고 시인은 더 늦기 전에 아내에게 바치는 시를 비석으로 세웠다. 한 사람의 최선을 다했던 삶과 진심을 다한 사랑이 그 비석에 새겨진 것이었다.

정감록의 십승지지를 찾아 소백산 아래 풍기로 찾아들었던 이들이 꿈꾸었던 삶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그들은 이곳에서 그 꿈을 이뤘을까. 십승지지에는 재난이 들지 않는다고 믿었지만, 어디 진짜로 그랬을까. 젊어서 지긋지긋했던 가난 속에서 농사와 시를 함께 지으며 살아온 생활은 얼마나 고단했을 것인가. 그때를 돌아보면 살아온 세월이 억울하지는 않을까. 하지만 시인의 아내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제 돌아보면, 참 평화로웠던 시간이었다.”


■ 가는길·묵을곳·먹을것

 

 

 

 

풍기 십승지지 가는 길 = 수도권에서 가자면 영동고속도로로 여주갈림목까지 가서 중부내륙고속도로로 갈아탄 뒤 다시 충주갈림목에서 평택∼제천고속도로로 갈아탄다. 제천갈림목에서 중앙고속도로로 올라선 뒤 풍기 IC로 나온다. 소백산국립공원·풍기·봉화 방면으로 우회전한 뒤 봉형교차로에서 우회전, 931번 지방도로를 타고 가다 동부교 건너 소백산·비로사 방면으로 좌회전한다. 여기서 금선계곡의 물길을 따라가면 이내 금선정이다.

어디서 묵고 무엇을 맛볼까 = 경북 영주에서 추천하는 숙소는 국립산림치유원 다스림(054-639-3400)이다. 한국산림복지진흥원에서 운영하는 산림치유시설이다. 숙박과 세 끼 식사, 산림 치유프로그램 3시간 이용, 수 치료 운동체험권 2시간권 등을 포함해 2인 기준 비수기 12만5000원, 성수기 14만4000원.

풍기읍에서 영주 시내까지는 차로 20분 남짓. 영주시 가흥동의 택지개발지구에 새로 들어선 영주호텔(054-634-1000)이 깔끔한 편이다. 풍기에서는 소백산풍기온천리조트(054-604-1700)가 단연 손꼽힌다.

영주는 쫄면으로 이름났다. 분식점인 중앙분식(054-635-7367)과 나드리(054-633-5482)가 쫄면의 명성을 이어오는 곳이다. 풍기에는 ‘정도너츠’ 본점(054-636-0067)이 있다. 작은 분식점이 팔던 생강 도넛이 인기를 끌면서 세련된 프랜차이즈로 문을 연 곳이다. 순흥면에서 이름난 먹거리는 묵밥이다. 순흥면 읍내리의 ‘순흥전통묵집’(054-634-4614)이 첫손으로 꼽힌다. 묵집 인근 국도변의 ‘순흥기지떡집’(054-633-2016)의 증편(기지떡)도 별미다.

 

 

<출처> 2018. 7. 4 /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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