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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강원도

'겨울연가'의 배경 남이섬 : ‘판타지 같은 연가(戀歌)’가 흐르는 곳

by 혜강(惠江) 2018. 4. 6.

 

 

'겨울연가'의 배경 남이섬

 

‘판타지 같은 戀歌’ 흐르는 곳… 첫사랑의 설렘 만나다

 

 

글·사진 = 윤성은 문화평론가 ‘쿨투라’ 편집위원

 

 

 

 

▲  강원 춘천시의 남이섬 메타세쿼이아길. 드라마 ‘겨울연가’의 주인공 준상과 유진은 이 길에서 데이트하며 사랑을 키웠다. 드라마가 방영된 후 이 길은 관광 명소로 떠올라 해외의 한류 팬들이 꾸준히 찾고 있다.

 

 

 

▲  ‘겨울연가’의 한 장면. 준상과 유진이 남이섬 길을 자전거로 달리고 있다.

 

 

 

준상·유진이 사랑 확인했던 메타세쿼이아길·강변산책로  

교통사고·10년 이별·재회…  행복과 상실의 시·공간 교차  
촬영지 곳곳 연인들로 북적 

1940년 이전엔 육지와 연결, 청평댐 완공되며 작은섬으로  

2006년‘나미나라’로 바뀌어 동화책 공모전·年600회 공연  
방문객 300만… 외국인이 30% 



‘첫사랑’만큼 멜로드라마가 좋아하는 단어도 없을 것이다. 우리가 가장 순수했던 시절을 잠식한 첫사랑은 오랜 세월에 걸쳐 완전히 잊힌 듯했다가도 어느 날 불쑥 꿈속에, 기억 속에 등장했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그 그리움의 대상이 처음으로 사랑했던 사람인지, 처음 사랑에 빠졌던 나 자신인지, 어느 때보다 설?던 그 마음인지, 첫사랑을 겪었던 그 시절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분명한 사실은 영리한 멜로드라마는 그 모든 것을 낭만적으로 포장할 줄 안다는 것이다. 2002년 KBS에서 방영돼 전 세계적인 인기를 모았던 ‘겨울연가’(연출 윤석호)가 바로 그런 작품이다. 종영된 지 십수 년이 흘렀지만 최근 보도된 배우 최지우의 결혼 소식에도 빠짐없이 ‘겨울연가’가 언급되는 것을 보면 잘 만든 드라마 한 편의 생명력을 새삼 실감할 수 있다.  

자신의 뿌리, 곧 사진으로만 보았던 아버지를 찾으러 춘천에 간 ‘준상’(배용준)은 뜻하지 않게 이곳에서 첫사랑 ‘유진’(최지우)을 만나게 된다. 몇 번의 반전을 거치기는 하지만 준상의 아버지도 여기서 첫사랑 ‘미희’(송옥숙)를 만났고 그들 사이에서 준상이 태어나게 됐다는 점, 그가 배다른 형제인 ‘상혁’(고 박용하)과 다시 삼각관계가 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세 부자(父子)의 연과 운명이 이 공간을 기점으로 묘하게 작동함을 알 수 있다. 실제로 1, 2회에 집중적으로 등장하는 춘천은 누구라도 사랑에 빠지게 할 만큼 예쁘게 묘사돼 있다. 높은 건물들과 잘 닦인 도로 대신 나지막한 집들이며 오목조목한 골목, 시원한 강변도로가 있는 풍경은 유진이 학교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뛰어오는 드라마의 첫 장면에서부터 잘 소개된다. 많은 추억이 서려 있을 것 같은 오래된 고등학교, 몇 개의 계단 위로 파란 대문이 있는 유진의 집, 파란 강가를 배경으로 한 버스정류장까지도 팍팍한 삶이 묻혀 놓은 때들을 벗겨줄 것만 같다. 드라마에서 좋은 미장센을 보기 어렵던 시절, 한 장면 한 장면에 정성껏 생기를 불어넣어 공간의 정서를 살려냈던 윤석호 PD의 노력과 재능이 돋보인다.  

유진과 준상이 설레는 마음으로 가장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곳은 역시 ‘남이섬’이다. 그들은 여기에서 처음으로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손을 잡는다. 여느 연인처럼 첫눈이 내리는 날 두 사람이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드는 곳도 바로 이곳이다. ‘겨울연가’는 본격적으로 긴 겨울날의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남이섬의 만추(晩秋)를 보여준다. 늦은 오후 햇살이 메타세쿼이아길과 호숫가를 황금빛으로 물들이던 가을날, 유진과 준상은 야간자율학습을 빠지고 남이섬을 찾는다. 곧은 자태를 뽐내며 양쪽으로 쭉쭉 뻗어 있는 나무들 사이로 클래식한 감색 교복을 입은 두 사람이 걸어오면서 그림자 밟기를 하는 모습, 유진이 쓰러진 나무 위를 걷다가 준상이 내민 손을 잡는 모습이 한없이 풋풋하고 싱그럽다. 강가 산책로에서는 정서적인 교감도 깊이 이뤄진다. 그동안 비밀이 많던 준상은 몰래 찾아온 아버지 이야기를 털어놓고, 일찌감치 아버지를 병으로 잃은 유진이 그를 격려해 주면서 두 사람은 그들만의 유대감을 갖게 된다. 유진이 준상의 자전거 뒷자리에 앉아 손을 양옆으로 뻗고 늦가을의 정취를 만끽하는 장면은 대사 없이 서정적인 음악과 브라운톤의 영상으로 처리돼 ‘추억’의 감성을 더했다.

첫눈이 오는 날 두 사람의 남이섬 데이트는 우정 이상의 감정을 확인한 이후인 만큼 훨씬 역동적이다. 눈싸움을 하고, 눈사람을 굴리고, 눈 쌓인 나뭇가지를 흔드는 두 사람에게서는 티끌만 한 근심 걱정도 찾아볼 수 없다. 첫사랑의 설렘도 설렘이거니와 시청자들의 심금을 울린 또 하나의 요소는 바로 그들의 천진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준상의 갑작스러운 사고에 이어 10년 후의 이야기로 넘어가는 3회부터 유진의 얼굴에 계속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것과 대비시켜 보면 남이섬의 추억은 분량 이상의 비중을 갖는다. 현실적으로 볼 때 준상과 유진처럼 입시를 앞둔 고등학생들에게 교제를 시작하는 것은 꽤 부담스러운 일임에도 눈부신 순백의 나라로 변해버린 남이섬은 그들 이외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판타지적 공간으로서 모든 이를 그 꿈결 같은 시간에 몰입하게 만들어준다.

고교 시절의 만남부터 30대까지 이어지는 준상과 유진의 순수하고 절절한 첫사랑 이야기는 국내에서 큰 인기를 얻었을 뿐 아니라 대만, 일본 등을 시작으로 동남아시아에 방영되기 시작하면서 ‘한류’의 기폭제가 됐다. 무엇보다 ‘겨울연가’의 성공은 그저 한 편의 드라마에 대한 열광에서 그치지 않았다. 이를 통해 한국문화와 한국어에 관심을 갖는 외국인들이 늘어나고, 관광산업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겨울연가 신드롬’은 훌륭한 문화 콘텐츠의 힘을 잘 보여주는 하나의 현상이다. 다이이치생명 경제연구소는 NHK에서 ‘겨울연가’가 방영됐던 2004년, 이 드라마와 배용준이 일본에서 유발한 경제적 효과가 연말까지 2300억 엔(약 2조4000억 원), 한국에서는 1072억 엔(1조1500억 원)에 이른다고 발표하기도 했으니, 한국 방영 이후 전 세계로 전파를 타면서 약 16년간 누적돼 온 ‘겨울연가’의 나비효과식 파급 효과에 대해서는 이제 정확한 계산이 어려울 정도다.   

 

여전히 그 산술의 중심에 있는 남이섬은 가평군과 춘천시 사이를 흐르는 북한강에 자리 잡고 있다. 1940년 이전까지만 해도 육지로 연결된 곳이었으나 청평댐이 완공되면서 작은 섬이 됐다. 현재 이곳은 지자체나 공공기관이 아니라 주식회사 남이섬이 직접 운영하고 있는데, 국제적 관광지라는 수식어가 무색지 않게 매년 이곳을 찾는 300만 명 이상의 방문객 중 3분의 1 이상이 외국인이다. ‘동화와 노래를 선물하는 나미나라공화국’이라는 콘셉트 그대로 동화책 일러스트레이션 공모전과 전시회를 열고 있으며, 연간 600회 정도의 공연도 추진하고 있다. 배를 타고 내리는 곳부터 섬 구석구석까지 아기자기하게 구획된 공간들이 눈길을 끈다.

 

많은 직원이 수시로 오가며 벤치와 테이블을 닦고 쓰레기를 치우기 때문에 늘 깨끗하고 쾌적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도 관광지로서 좋은 평가를 받는 비결이다. 곳곳에 설치된 표지판에는 ‘겨울연가’의 촬영장소가 구체적으로 안내돼 있다. 준상과 유진이 작은 눈사람을 만들었던 테이블, 메타세쿼이아길과 강변 산책로는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로 항상 붐빈다. 드라마의 흔적으로 가득한 촬영지에서 주인공들의 기분을 느껴볼 수 있다는 것은 일부러 먼 걸음을 한 이들에게 큰 기쁨일 것이다.


유진과 준상의 행복한 추억을 해치지 않으려는 듯 자주 언급되지는 않지만, 남이섬은 준상이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유진과 친구들이 그를 추모하는 곳이기도 하다. 꽁꽁 얼어붙은 호숫가에서 아이들은 책가방을 멘 채로 종이를 태우며 그를 기억한다. 10년 후, 유진은 기억을 잃은 채 ‘민형’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는 준상을 다시 만난다. 각자의 애인, 기억상실증이라는 장애물을 넘어 곡절 끝에 민형 자신이 준상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 그들은 다시 남이섬을 찾는다. 유진은 그들의 추억을 하나씩 이야기해 주지만 준상이 잘 기억하지 못하자 어쩐지 슬퍼진다. 여기서 그녀에게 남이섬은 행복했던 시간을 떠올리게 하는 한편, 첫사랑의 죽음과 상실의 트라우마를 일깨우는 공간으로 작동하기도 한다. 그리고 성인이 된 유진과 준상의 남이섬 재방문은 10년간의 이별이 남긴 아픔을 해소하고 다시 연인으로서의 관계를 다져주는 계기가 된다. 이런 다층적 의미를 고려할 때 ‘겨울연가’에서 남이섬이라는 공간이 갖는 상징성은 더욱 확장된다.  

‘겨울연가’가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키면서 각종 미디어 콘텐츠는 이를 신들린 듯 카피하기 시작했다. 기억상실, 이복남매 등의 설정은 끊임없이 소비돼 ‘막장드라마’의 식상한 관습으로 자리 잡았고, 동시에 광고 및 예능 프로그램 등에서의 패러디는 원본을 서슴없이 희화화하며 실소를 유발시켰다. 그러다 보니 애초에 ‘겨울연가’가 보여주었던 첫사랑을 중심으로 한 일관된 톤과 응집력 있는 구성, 독보적인 감수성이 평가절하되는 것 같아 안타까울 때가 많다. 비슷한 아쉬움을 달래고 싶은 드라마 팬들은 물론이요, 연일 쏟아지는 어둡고 심란한 뉴스에 지친 이들이라면 오랜만에 유진과 준상이 걸었던 강변을 산책해 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모진 세월을 겪어오면서도 여전히 물과 나무와 꽃이 아름다운 섬이 방문객들을 반겨준다.  <끝>

 

 

<출처> 2018. 4. 6 /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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