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국내여행기 및 정보/- 강원도

태백 구문소의 비밀과 오복동(五福洞)

by 혜강(惠江) 2018. 2. 1.

 

박종인의 땅의 歷史

 

 

 

태백 구문소의 비밀과 오복동(五福洞)

 

五福洞에 가보니 탄광시대 잿빛 추억만…

 

 

박종인 여행전문기자  

 

 

환란을 피해 숨어드는 정감록 十勝地
구문소 '五福洞…' 글귀, '태백=십승지' 증거로 태백시와 언론이 무차별 인용
글자 새긴 때는 1988년… 향토사학자 김강산, "이상향 될 날 꿈꾸며 새겨"
한강 발원지 검룡소도 1984년 김강산이 발견·명명… 이후 온갖 전설 만들어져
전쟁을 피한 사람들… 부자를 꿈꾼 광부들… 그 모두에게 태백은 오복동이고 이상향
그럴듯하게 포장할수록 진실은 가려지는 법

 

 

행복에 대하여

 삶의 목적은 행복이다. 플라톤도 그랬고 아리스토텔레스도 그랬다. 공자도 그랬고 맹자도 그랬다. 항산(恒産)에 항심(恒心)이 있다고, 등 따시고 배불러야 정치도 잘된다고 했다(無恒産者因無恒心).〈맹자, 양혜왕장구(梁惠王章句)〉 공자가 말한 행복이 다섯 가지니, 오래 살고(壽) 부유하고(富) 심신이 건강하고(康寧) 덕이 있을 것이며(攸好德) 천수를 누림(考終命)이다.〈서경(書經), 홍범편〉


 2500년 전 공자가 규정한 행복 기준이 21세기에도 정확하다. 우리네 소시민들이 꿈꾸는 행복이 공자님이 설파한 그 행복 아닌가. '밤새 안녕하셨느냐'고 묻고, '맛있는 거 자시라'고 권하고, '건강하시라'고 건네는 덕담에 행복이 있다.

 조선시대 비결서인 정감록(鄭鑑錄)은 환란을 피해 소시민적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곳을 피장처(避藏處)라고 불렀다. 주로 한강 남쪽 어느 산중 마을인데, 전쟁도 정쟁도 없이 살 수 있다는 공간 열 곳이다. 정감록이라 주장하는 비결이 하도 많아서, 이 십승지(十勝地)를 헤아리면 스무 군데가 넘는다. 여러 판본 정감록에 대개 들어가 있는 곳 중 하나가 강원도 태백이다. 그 태백, 어쩌면 잘못 알고 있는, 행복한 태백 이야기.

 

신비한 관광지, 태백

 태백은 피서지다. 태백을 둘러싼 금대봉, 매봉산, 백병산, 함백산은 모두 1000m가 넘는다. 연평균 기온이 워낙 낮아서 도시 곳곳에 온도계가 서 있다. '모기 없고 더위 없는 태백에서 여름 나시라'는 시위다. 태백시청에서 1530m를 걸어가면 시내 한가운데에 황지(黃池)가 있다. 황지는 낙동강 발원지다. 7년 만에 찾아온 맹추위에도 황지는 얼지 않았다. 탁발승에게 쌀 대신 똥을 퍼준 노랑이 황 부자 집이 뇌성벽력과 함께 무너지고 물이 찼다는 연못이다.

 

 

강원도 태백 철암역 앞에는 탄광시대 상가가 보존돼 있다. 철암천 천변에 기둥을 박고 올린 건물, ‘까치발집’ 이다. 아이를 업은 아내가 막장에서 돌아오는 남편을 개울 건너 맞이하는 동상이 서있다. 남편은 오늘도 무사했다. 궁벽한 태백에서 사람들은 행복했다. /박종인 기자


 황지에서 자동차와 도보로 15.49㎞ 북상하면 검룡소(儉龍沼)가 나온다. 한강 발원지다. 용으로 변신해 승천을 눈앞에 둔 이무기가 검룡소에 살았다. 주민들이 방목한 소들을 야금야금 잡아먹으며 살았다. 그러다 주민들에게 작살나서 승천은커녕 목숨도 달아나고 자기 살던 검룡소도 주민들이 메워버렸다는 전설. 그래서 이름이 검소할 검(儉)에 용 룡(龍), 못 소(沼) 검룡소다. 검은 샘에서 솟은 물이 암반을 이리저리 부딪치며 암반을 몸부림치는 이무기처럼 깎아놓았다.

 황지에서 다시 13.68㎞ 남쪽으로 가면 구문소(求門沼)가 나온다. '산은 물을 건널 수 없고 물은 산을 뚫을 수 없다'는 자연의 법칙을 파괴한 지형이다. 조선시대에는 이를 천천(穿川·구멍 뚫린 개울)이라 불렀다. '황지는(…) 산 바위를 뚫고 남쪽으로 흐른다. 낙동강의 근원이다. 천천(穿川)이라 한다. 옛날에 제전(祭田)을 두어 홍수나 가뭄이 들 때 제사를 지냈다(黃池…穿山石南流爲洛東源曰穿川前古置祭田水 祀之).'〈1667년, 허목, 기언, '태백산기'〉 허목은 삼척부사를 지내며 삼척군지인 척주지를 쓴 사람이다. 지질학적으로는 황지천과 철암천이 양쪽에서 석회암 절벽을 때려대다가 1억5000만 년 만에 구멍을 뚫어버린 석문(石門)이다. 높이는 30m다. 전설에 따르면 황지천과 철암천에 사는 백룡과 청룡이 서로 다투다가 뚫었다. 또 다른 전설에 따르면 이 석문은 이상향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기이한 돌이 있으니 이름하여 지부석이라 한다. 형상은 활 같고 양쪽 기둥이 서 있다. 석문이다. 자시에 열리고 축시에 닫힌다. 그때 얼른 석문으로 들어가면 마을이 있다. 궁해염지지라 한다… 비석에는 삼도공허지지라 새겨져 있다(有奇異石號曰地負石其形如弓兩莖立此是石門也子時開丑時闔乘其時入其門則有村曰弓海鹽之地…碑頭大銘曰三道空虛之地).'

 숱한 정감록 가운데 '삼척국기노정기(三陟局基路程記)'라는 이본에 나오는 글이다. 궁해염지는 이렇게 생겼다. '안으로 들어가면 산천이 밝고 수려하다. 곡식을 한 되 심으면 한 섬을 거둔다. 꽃나무가 들판에 가득 피었다(環其內則周回山明水麗土壤則升種石出花木勝於野).'

 이 이상향이 있다는 삼도공허지지, 그러니까 무주공산인 강원, 충청, 경상 삼도 접경지가 태백이라고 사람들은 믿고 있다. 구문소 아래 이렇게 새겨져 있다. '五福洞天子開門(오복동천자개문·자시(子時)에 열리는 오복동의 문).' 반경 15㎞ 안에 두 강줄기 발원지와 낙원으로 가는 석문이 있는 도시. 신비하지 않은가.

 
오복동의 진실과 김강산 
 
 

한강 발원지 검룡소 여름 풍경.

 

 
 물론 먼저. 검룡소 이름은 1984년 향토사학자 김강산(68)이 지었다. 그전에는 그냥 '물구뎅이'였다. 욕심쟁이 이무기는 당연히 없었다. 구문소에 있는 오복동 글귀는 88올림픽이 열린 1988년 1월에 새겼다. 새긴 이는 또한 김강산이다. 김강산은 지금 태백에서 한국문화역사연구원이라는 단체를 꾸리고 있다.

 검룡소는 나이 당시 서른넷인 젊은 향토사학자 김강산이 지도를 뒤지고 발로 뛰면서 찾아낸 샘물이다. 그가 말한다. "일제강점기 때 이 샘물을 흙으로 메꾸고 임도를 만들었다. 해방이 되고 버려졌던 길이 망가지면서 샘이 다시 나타났다."

 1981년 태백이 삼척에서 분리돼 시로 승격됐다. 살림은 커졌는데, 역사가 없는 것이다. 태백 문화해설사 김상구(64)가 말했다. "그때 자료와 지역을 샅샅이 뒤지고 노인들 증언을 채록해 태백 역사를 다시 쓴 사람이 김강산이다."

 
구뎅이와 검룡소

 김강산이 말했다. "5만분의1 지도를 들고 돌아다녔다. 그런데 어느 날 한강 발원지라는 오대산 우통수에서 나오는 물과 금대봉 '물구뎅이'에서 나오는 개천을 비교하니까 '물구뎅이' 쪽이 더 길더라. 그래서 곡선자를 들고 두 개천 합류점인 정선 나전리까지 길이를 쟀다." 32㎞가 더 길었다. "일주일 동안 샘에 쌓인 흙을 퍼내고 이름을 '금용소'라고 지었다. 금대봉의 금(金)이고 내 성이 김(金)이니까. 그런데 아랫마을 경상도 노인이 금용소를 '검용소'라고 부르길래 내친김에 단군 왕검(王儉)의 '儉'과 '龍'으로 바꿔버렸지." 1984년 국립지리원(현 국토지리정보원)이 실측을 통해 검룡소를 한강 발원지로 공인했다. '검용소'라 불리던 샘물은 '검룡소'로 변경됐다. 이무기 전설은 이후 추가됐다.


 
구정물 흐르던 구문소

 그리고 정감록을 뒤졌다. 태백은 웬만한 정감록 판본에 피장처 십승지로 나온 곳이다. 그리하여 위에 언급된 '삼척국기노정기' 석문(石門)을 찾아냈다. 태백 사람들이 구문소 주변을 '오복동'이라 부르는 사실도 기억했다. 정감록에 나오는 피장처는 '우복동(牛腹洞)', 그러니까 소가 마음 놓고 되새김질할 수 있는 안전한 땅으로 표현된다. 그가 말했다. "정감록에는 석문 얘기만 있지 구문소는 없다. 그런데 구문소가 경상도 봉화에서 들어오는 입구고 궁벽한 곳이라 이미지가 맞았다." 그래서 김강산은 무진년인 1988년 정초, 구문소 절벽에 '오복동천자개문'이라 새겨넣었다.
 
 

물이 산을 뚫어 황지천과 철암천이 만나게 된 석굴, 구문소. ‘五福洞天子開門(오복동천자개문)’이라 새겨진 글귀는 1988년 무진년에 젊은 향토사학자 김강산이 새겼다.


 그리되었다. 강원도와 태백시는 물론 숱한 21세기 언론 매체까지 구문소 석벽에 새겨진 글자를 태고적부터 있던 신비로 치부하고 포장하고 소개하여, 태백을 찾는 외지인은 물론 태백 주민들까지 자기네가 엄청난 공간에 살고 있다고 믿게 된 것이다. 그 석벽 왼편 끝에 적힌 '무진 원단(元旦) 김강산 쓰다'라는 글만 눈여겨봤다면 됐을 일인데, 이 글을 쓰는 나 또한 무지하고 무관심하고 게을렀으니 잘못 되었다.

 글을 새기던 그 무렵 구문소 아래는 시커먼 탄천(炭川)이었다. 하수처리종말시설도 없던 탓에 폐수도 함께 흘렀다. 이제 늙어버린 김강산이 이리 회상한다. "내가 말했다. 언젠가 여기 맑은 물이 흐를지 어찌 아는가, 그때가 되면 여기가 보물이 될 거라고." 김강산이 아니라 이후 행정이 그릇된 것이다. 검룡소에 있는 안내판, 구문소에 있는 안내판 어디에도 김강산 이름 석 자 찾아볼 수 없고, 명명된 내력 또한 없으니 심히 잘못 되었다.

 
오복동을 찾아서

 

 

 

황지천과 철암천이 만든 구문소 석굴 여름 풍경

 

 

 정감록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십승지에) 먼저 들어가면 돌아나오고 중간에 들어가면 살고 나중에 들어가면 죽는다(先入者還中入者生後入者死).'〈정감록, '감결'〉 시기를 맞춰야 한다는 뜻이다.

 문득 태백에 탄광시대가 도래했다. 궁벽한 산중에 석탄이 발견되고 무주공산이요 삼도공허지지였던 태백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궁벽함을 벗어나 오복을 찾는 무리들이 태백에 마을을 만들었다. 일제강점기 시작된 검은 오복동시대는 영원무궁할 것 같았다.

 김강산이 구문소에 자개문을 만들던 1988년 12월 21일, 그 오복동 문이 닫혔다. 에너지합리화정책이 전격시행됐다. 전국 탄광 347개 가운데 1989년 한 해에만 125개가 문을 닫았다. 1999년까지 모두 336개가 폐쇄됐다. 잿빛만 남고, 오복동은 사라졌다. 과연 영영 사라졌는가.

 태백을 가보라. 철암역을 가보고 황지를 가보고, 상장동을 가보라. 그 잿빛 추억이 고스란히 부활했다. 사람들은 오복동시대를 그리며 그 흔적들을 아름답게 되살려놓았다. 사라지게 놔두지 않고, 그 꽁무니를 붙잡고 상점과 사택촌과 주점을 부활시켜 외지인에게 자랑을 한다. 우리들의 잿빛 오복동, 우리는 그렇게 행복했었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한다. 그곳이 바로 자시에 열리는 문, 오복동 입구다.



[출처] 2018. 2. 1 / 조선닷컴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