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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경북. 울산

울산, 400년만에 고향서 핀 동백

by 혜강(惠江) 2017. 3. 22.

 

봄꽃에 설레는 곳 울산

 

400년만에 고향서 핀 동백

 

오색팔중(五色八重)에 두근두근

 

 

울산=글·사진 박경일 기자

 

 

 

* 울산시 농업기술센터의 화단에서 자라는 동백이 후드득 떨어졌다. 한 나무에서 이렇듯 여러 색의 꽃이 핀다. 농업기술센터의 한 직원은 이 동백이 임진왜란 때 뿌리 뽑혀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400여 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오색팔중 동백을 증식한 것이라고 했지만, 나무의 생김새나 꽃의 낙화를 보면 그게 아닌 듯했다. 왼쪽 작은 사진은 울산시청 정원의 진짜 오색팔중 동백이 꽃망울을 맺은 모습. 이 동백의 꽃은 농업기술센터의 것에 비하면 훨씬 더 깨끗하고 기품 있다.

 

자그마치 400년 만에 고향 울산으로 돌아온 기구한 동백나무가 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장수에 의해 일본으로 실려 나갔던 동백나무는 먼 이국땅에서 목숨을 다하고 말았지만, 400여 년 만에 그 나무의 대를 잇는 자식뻘 나무가 천신만고 끝에 우리 땅으로 돌아와 해마다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울산에서만 자생했다는 희귀동백. ‘오색팔중(五色八重)’이라고 했습니다.

한 나무에서 다섯 가지 색(五色)의 꽃이 여덟 장의 겹꽃 잎(八重)으로 피어난다고 붙여진 이름이라지요. 울산에서도 사라지고 만 오색팔중. 그 명맥을 뿌리 뽑혀 고향을 떠났다가 20여 년 전에 돌아온 한 그루 나무가 잇고 있습니다. 봄꽃 소식에 오색팔중 동백의 개화를 기다리다 울산으로 향한 길이었습니다. 동백은 울산 시청 정원 ‘초록원’에서 자라고 있었습니다.

오색팔중은 봄에 피는 ‘춘백(春栢)’입니다. 개화를 겨눴다가 찾아간 길이었지만, 아쉽게도 올해 꽃은 작년보다 열흘 이상 늦습니다. 봄볕 속에서 물오른 가지 끝에 한껏 부푼 분홍빛 꽃망울만 탐스러웠습니다. 그게 닷새 전이었고 따스한 날들이 계속됐으니 지금쯤 다섯 가지 색으로 환하게 피어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반구대암각화와 천전리 각석을 끼고 흐르는 울산 울주의 대곡천 습지에 매화가 환하게 피었다.  매실나무 뒤쪽이 모두 버드나무인데 봄이 더 깊어지면 매혹적인 연둣빛의 잎을 낸다.

 

 


매화·버드나무 신록, 대곡천 따라 움튼 '싱그러운 보석' 

 

# 400여 년 만에 고향에 돌아온 동백



 산시청 현관 앞의 작은 정원 ‘초록원’. 그곳에 동백나무 한 그루가 있다. 키가 2m쯤 될까. 겉모양만으로는 특별할 것 하나 없는 그저 평범한 동백이지만, 울산시가 관리하는 공무원을 따로 두고 있을 정도로 정성스럽게 돌보고 있는 나무다. ‘오색팔중’. 다섯 가지 색깔의 꽃이 여덟 겹의 꽃잎으로 피어난다는 희귀한 동백. 성근 잎 사이로 분홍색 꽃망울이 금시라도 터질 듯 탐스럽게 맺혔다. 다른 봄꽃들은 이르게 피었는데, 어찌 된 셈인지 오색팔중 동백꽃 개화가 지난해보다 열흘 이상 늦다.

이 동백의 기구한 이야기는 42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 일본 침략군의 2번대 수장으로 조선 침략의 선봉장이었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부산에 상륙했다. 함경도까지 진군했던 그는 이듬해 4월 울산의 서생포로 내려와 진을 구축했다. 봄날 울산의 학성 일대를 행군하던 가토는 한 그루의 동백나무를 발견했다. 오색의 꽃들이 피어난 동백. 울산에서만 자생하던 오색팔중 동백이었다. 동백을 캐서 기르던 그는 4년 뒤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이 동백나무를 배에 싣고 갔다.

일본으로 돌아간 그는 이 귀한 동백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게 바쳤다. 도요토미는 이 동백을 교토(京都)의 절 지장원의 주지에게 헌납했고 주지는 나무를 절집의 경내에 심었다. 오색팔중 동백은 이국땅에서도 해마다 현란한 오색의 꽃을 피워냈다. 절집은 동백의 아름다움에 힘입어 ‘춘사(椿寺·동백이 있는 절)’라는 이름을 얻을 정도로 유명해졌다. 뿌리 뽑혀 이국땅의 절집에서 400년을 자라던 동백은 풍상을 이기지 못하고 1983년 머나먼 이역에서 천수를 다했다. 이렇게 생을 다한 동백은 그루터기 주위에 수령 100년 안팎의 것부터 어린나무까지 10여 그루의 후세목을 남겼다. 지장원은 지금도 동백 후계목 주위를 철책으로 두르고 꽃을 담은 사진을 법당 안에 모셔둘 정도로 소중하게 다루고 있다.

이쯤이면 눈치챘겠지만, 울산시청 앞의 오색팔중은 일본의 절에 있던 동백나무를 돌려받은 것이다. 1989년 일본을 여행하다 지장원에 들른 최종두 당시 한국예총 울산지부장 일행은 절에 있는 동백나무의 내력을 알게 됐고, 후계목의 한국 송환을 추진했다. 지장원의 주지를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 1992년 1세 동백을 꺾꽂이로 키워낸 2세 동백 세 그루를 가져다가 울산시청, 충남 천안의 독립기념관, 그리고 임진왜란 당시 왜군 장수가 조선군의 베어낸 귀를 묻은 경남 사천의 귀무덤에 한 그루씩 심었다. 그런데 두 그루는 그만 말라 죽었고 울산시청에 심은 한 그루만 살아남았다. 기구한 운명의 동백이 2세나마 고국 땅에 돌아와 망향의 한을 풀게 된 셈이다. 


    

 

▲임진왜란 때 오색팔중 동백을 일본에 실어내 간 가토 기요마사가 주둔했던 울산의 서생포 왜성. 석축을 그러쥐고 자라는 아름드리 벚나무들이 보름쯤 뒤면 만개할 것으로 보인다.

 

 

# 다섯 가지 색깔의 화려한 꽃


 

울산시는 오색팔중 동백을 400년 전 뿌리를 내리고 있던 울산의 학성공원에 심으려 했으나 도난과 고사의 우려 때문에 시청 울타리 안의 정원에다 두었다. 우여곡절을 거쳐 동백나무가 되돌아온 지 올해로 꼭 25년. 고국 땅에 돌아온 지 5년 만인 1997년 첫 꽃을 피워낸 이래 동백은 해마다 봄이면 화려한 꽃을 피우고 있다. 옮겨 심을 당시 40㎝이던 키도 이제 2m가 넘게 자랐다.

울산의 중심을 알리는 시청 앞 정원의 도로 원표 곁에서 자라는 오색팔중 동백은 지금 가지마다 꽃망울을 다닥다닥 달고 있다. 순백의 꽃잎이 비치는 것도 있고, 붉은 줄무늬가 감겨 있는 것도 있다.

축포처럼 터질 개화를 앞두고 있는 동백나무 앞에 서면 400여 년이란 긴 시간이 지나간다. 뿌리 뽑혀 이국땅으로 건너갔다가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죽은 나무. 그리고 이제야 후계목으로 돌아와 꽃을 피우는 그 자손. 침략과 유린 속에서 도탄에 빠졌을 이들과 그들이 뿌린 피, 그리고 그 오래된 상처를 돌보는 마음을 본다.

어렵사리 고국으로 돌아온 오색팔중 동백은 울산시 농업기술센터가 증식하고 있다. 꺾은 가지를 심어 기르는 후계목 95그루다. 오색팔중의 화려한 꽃을 못 보고 돌아가는 게 못내 아쉬워 후계목 중에서 꽃을 피운 것이 있을까 싶어 농업기술센터를 찾았다. 후계목은 온실과 노지에 나눠 키우고 있다는데, 온실의 꽃은 한 달 전에 피어 다 졌고, 노지의 꽃은 아직 피지 않았단다.

그런데 농업기술센터 앞 화단에 오색의 꽃이 흐드러진 동백과 마주쳤다. 한 나무에 붉은 꽃과 흰 꽃, 연분홍과 다홍색의 꽃이 활짝 피었다. 농업기술센터 직원은 “본격적인 후계목 증식에 앞서 20여 년 전에 꺾꽂이로 기른 것”이라고 했지만 그게 맞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못내 의심스러웠던 것은 오색팔중 동백은 꽃이 질 때 다른 동백과는 달리 꽃잎이 한 장 한 장 떨어진다는데, 화단의 동백꽃은 모가지째 떨어져 발치를 붉게 물들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당시 오색팔중 동백을 관리했던 공무원은 “과거에 농업기술센터에서 후계목 증식을 시도한 적이 있는데, 지금 화단에 있는 꽃이 그게 맞는지는 확인할 방법이 없다”고 했다. 그게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돌아온 오색팔중 동백의 후손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선명하고 현란한 꽃 색깔만큼은 가슴을 두근거리게 할 만큼 아름다웠다.


    

▲신라 때 왕의 동생을 구하러 일본으로 떠났다가 죽임을 당한 박제상을 기다리던 부인의 혼이 새가 돼 숨어들었다는 동굴을 품고 있는 암자 은을암. 가파른 사면에 아슬아슬 들어서 있다.

 

 

# 형형색색 동백꽃 가득한 학성공원



 일본으로 건너간 오색팔중 동백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는 울산 학성 일대는 지금 형형색색의 동백꽃으로 그득하다. 학성공원은 동백을 뽑아 일본으로 가져간 가토가 지은 왜성으로, 지금은 공원으로 조성돼 있다. 구한말 울산 출신의 사업가 김홍조가 사들여 조성했고, 이를 그의 아들 김택천이 시에 기증해 1928년 개원한 유서 깊은 공원이다.

정유재란 당시 울산성으로 불렸던 학성공원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당시 명나라의 지원을 받은 조선군은 왜군이 쌓은 이 성을 함락하기 위해 두 번에 걸쳐 선혈이 낭자한 싸움을 벌였다.

첫 번째 공격에서 명나라 군의 지원 아래 권율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 5만7000명이 대대적인 공세를 벌여 성에 갇힌 왜군은 식량이 바닥나고 물마저 떨어져 종이와 흙벽을 끓여 먹고 군마를 찔러 피를 마시며 연명했다. 이때 가토는 할복을 결심하기도 했다. 이 전투로 왜군이 전의를 상실하면서 울산성 전투는 임진왜란에서 정유재란으로 이어지는 7년 전쟁의 판도를 바꾼 중요한 전투로 평가받고 있다.

왜성의 흔적이 뚜렷한 세 개의 고리 형태로 이어지는 학성공원 산책로에는 다양한 동백꽃이 피어났다. 하도 붉어 검은빛이 감도는 것도 있고, 분홍빛 여린 꽃잎이 하늘거리는 것도 있다. 탐스럽게 꽃잎을 치렁치렁 달고 있는 것이 있는가 하면, 고결한 느낌의 홑꽃잎 동백도 있다. 동백 숲 사이를 걷다 보면 공원 한쪽에 노래비 하나를 만나게 된다. 울산 출신의 동요 작가 서덕출의 ‘봄편지’ 노래비다.

 

 “연못가에 새로 핀 버들잎을 따서요/ 우표 한 장 붙여서 강남으로 보내면/ 작년에 간 제비가 푸른 편지 보고요/ 대한 봄이 그리워 다시 찾아옵니다.”

 

1968년에 세운 노래비는 50년이 다 됐지만, 봄을 맞이하는 정서야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다. 구릉 형태의 학성공원 정상에는 반 평 남짓의 공간을 가둔 높은 철책이 있다. 철책 안에는 정강이 높이쯤 자란 오색팔중 동백 어린나무 아홉 그루가 자라고 있다. 울산 중구청이 일본에서 오색팔중 동백을 어렵게 수입한 경기 의왕의 한 식물원에서 열한 그루를 사들여 심어 놓은 것이다. 여기다 아홉 그루를 심고 나머지 두 그루를 구청에다 심었는데, 구청에 심은 두 그루 중 한 그루를 최근에 누군가 감쪽같이 뿌리째 캐갔다. 가져갈 게 따로 있지 천신만고 끝에 고향으로 돌아온 나무에다 손을 대서야 어디 될 말인가.

 

 

# 서생포 벚꽃, 치산서원의 만개한 매화


 

▲ 울산의 원도심인 성남동에는 ‘고복수 길’이 있다. ‘타향살이’의 가수 고복수를 기리는 골목은 조형물과 벽화 등으로 장식돼 있다.

왜성의 자취는 울산 남쪽 서생포에도 있다. 서생포 왜성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이듬해에 회야강의 물길이 바다와 만나는 지점 해발 133m의 산꼭대기에 왜군이 세운 성이다. 이 성에도 오색팔중 동백을 캐간 가토의 이름이 등장한다. 사명대사는 전쟁의 와중에 네 차례에 걸쳐 이곳 서생포 왜성에 와서 가토와 평화교섭을 벌여 외교적 성과를 거뒀다.

진하해수욕장과 명선도 일대의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서생포 왜성은 벚꽃 명소로 이름났다. 성의 석축을 아름드리 벚나무들이 점령한 형국이다. 꽃은 아직 피지 않았지만 벚나무의 힘찬 둥치와 뿌리가 성벽을 움켜잡고 있는 모습만으로도 인상적이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성곽에 뿌리 내린 벚나무들이 일시에 꽃망울을 터뜨리면 그대로 한 뭉치의 꽃다발을 이룬다.

울산에서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 역사의 자취를 짚다 보면 신라 때의 충신 박제상과 만나게 된다. 박제상은 고구려와 일본에 볼모로 잡혀간 눌지왕의 두 아우를 구하고 왜군에 잡혀 유배됐다 살해당한 신라의 충신. 박제상의 이야기는 여느 충신의 영웅담과는 좀 다르다. 비현실적인 영웅담의 서사가 아니라 일본으로 떠난 그를 그리워하다 망부석이 됐다는 부인의 애틋한 이야기가 덧붙여지면서 영웅이 아닌 인간의 얼굴로 다가온다.

박제상과 부인의 이야기가 가장 뚜렷하게 새겨진 곳이 울주군 범서읍 국수봉(603m) 자락의 암자 은을암이다. 남편을 그리워하며 치술령에 올라 왜국을 바라보던 박제상의 부인은 몸이 돌이 됐고, 혼은 한 마리 새가 돼서 은을암이 있는 바위 동굴 속으로 들어가 신모(神母)가 됐다고 전한다. 전국 곳곳의 망부석 설화의 원형이 된 이야기다. 

 

# 대곡천 습지와 도심의 고복수 길


 새가 숨은 곳이라 ‘숨을 은(隱)’에 ‘새 을(乙)’자를 쓰는 이름답게 은을암으로 오르는 길은 험하다. 암자까지는 시멘트 포장도로가 나 있어 길은 거칠지 않은 편인데, 바짝 올라붙은 급한 경사도에 깜짝 놀랄 정도다. 경사도가 어찌나 급한지, 차로 오르는 내내 심장이 쿵쾅거릴 테니 차를 타고 가되 급한 경사를 만나면 거기서부터 걷는 게 상책이다.

은을암은 산자락의 한쪽 사면에 종루를 매달아 놓고 위태롭게 앉아 있는 암자다. 박제상의 부인의 혼이 새가 돼 날아 들어갔다는 작은 동굴은 물이 솟는 샘이다. 이런 높은 바위틈에서 어찌 물이 솟는 것일까. 바위 동굴에서 나오는 서늘한 바람 속에는 어쩐지 영험한 기운이 담겨 있는 듯했다.

은을암 아래 만화리에는 박제상과 그의 부인을 기리기 위해 세웠던 서원 자리에 조성한 박제상 유적지가 있다. 박제상을 모신 사당과 부인 치술신모를 기리는 사당을 나란히 두고 있는 치산서원 돌담에는 지금 순백의 매화나무가 풍성한 꽃이 달린 한 가지를 드리우고 있다.

봄날 울산에서 갈 만한 곳이 어디 이곳들뿐일까. 울산에는 태화강의 십리대숲도 있고, 영남 알프스로 불리는 가지산, 신불산, 간월산, 재약산도 있다. 신불산 아래 파래소폭포도, 간월산 아래 작괘천도 봄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는 곳이다.

그중에서 요즘 같은 봄날에 소매를 잡아 이끌고 싶은 곳이 바로 반구대암각화와 천전리 각석을 거느리고 있는 대곡천이다. 선사시대 각석과 암각화도 좋지만 봄날에 매화꽃과 벚꽃 그리고 연두색 신록의 버드나무가 어우러지는 대곡천 습지의 풍경이야말로 울산이 숨겨 놓은 봄의 보석이다.

울산에서 빼놓지 말아야 할 곳 하나가 중구의 원도심이다. 대구에 ‘김광석 거리’가 있다면 울산 성남동에는 ‘고복수 길’이 있다. 일제강점기 ‘타향살이’로 데뷔해 일본과 만주를 오가며 한 세대를 풍미했던 대중가수 고복수의 고향이 바로 이곳 울산이다. 길이가 짧아 아쉽긴 하지만 골목 따라 이어지는 고복수 길에 그려 넣은 벽화와 조형물이 향수를 떠올리게 한다. 세대가 달라 고복수를 모르더라도 누렇게 바랜 옛날 신문을 읽는 듯한 느낌만으로도 마음이 다 따뜻해지는 곳이다. 
   


울산 학성공원·서생포 왜성 가는 길 

 

경부고속도로 언양갈림목에서 울산고속도로로 갈아타고 울산 방향으로 향하다가 울산IC로 나간다. 삼호중학교를 지나 삼호주공아파트 앞길을 따라가다 태화로터리에서 좌회전. 태화강을 끼고 있는 강북로를 달리다가 가구삼거리에서 좌회전하면 학성공원 입구다. 서생포 왜성은 진하해수욕장 뒤편에 있다. 울산 도심에서 온산국가산업단지를 가로지르는 당월로를 지나 서생교를 건너면 진하해수욕장이다. 서생면 서생리 통영비취타워 아파트 옆쪽에 서생포 왜성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다. 왜성의 높이가 130m쯤이라 오르막이 길지 않다.

어디서 묵고 무엇을 맛볼까

 

 울산은 대도시니만큼 도심에 호텔이 여럿 있다. 롯데시티호텔 울산이나 신라스테이 울산 등 비즈니스호텔은 호텔예약사이트를 이용하면 평일 기준 10만 원 안쪽에 묵을 수 있다. 호텔현대 울산은 1박 25만 원 선. 롯데호텔 울산은 17만 원 선이다. 서생포 왜성에서 가까운 진하해수욕장 부근에는 창밖으로 바다를 볼 수 있는 모텔이 즐비하다. 평일 기준 1박 5만 원 남짓.

이즈음 울산 간절곶 부근의 해안도로 쪽에 독특한 맛집과 카페들이 속속 들어서고 있다. 전국에 10여 곳의 체인점을 거느린 ‘하와이새우트럭’ 본점(052-239-1330)이 간절곶에 있다. 미국 하와이에서 맛본 핫새우와 갈릭새우를 한국인의 입맛에 맞게 메뉴로 개발했다는데 주말이면 손님들이 길게 줄을 설 정도로 인기다. 하와이새우트럭 인근의 ‘형제국수’(052-238-5955)도 뜨는 맛집이다. 완도산 전복에다 홍합, 새우 등을 넣어서 말아 내는 전복국수가 가장 인기다.

온산 강양회단지의 ‘선창식당’(052-283-5159)은 자연산 참가자미, 봄도다리, 줄가자미 등을 맛볼 수 있는 곳. 언양불고기를 내는 식당이 울산역 인근에 몰려 있다. 어느 집이나 맛은 비슷한데 국물 없이 직화로 구워내 부드러운 고기에 불향이 적당히 배어 있다.

 

 

<출처> 2017. 3. 22 /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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