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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충청남도

단풍으로 물든 가을 갑사(甲寺)

by 혜강(惠江) 2015. 11. 10.

 

공주 갑사

 

단풍으로 물든 공주 갑사(甲寺)

 

충남 공주시 계룡면 갑사로 567-3, (지번) 계룡면 중장리 52, 041-857-8981

 

 

·사진 남상학

 

 

 

 

 

   갑사로 가는 길에는 은행나무가 이미 곱게 물들어 있고, 순금 빛 비늘을 털어내듯 하나둘씩 노란 은행잎을 날리고 있다. 은행잎은 그제부터 내리는 가을비에 젖어 더욱 윤기를 더하며 산뜻하게 보였다. 더군다나 길 양편 산은 온통 단풍으로 울긋불긋 치장하고 우리 일행을 맞이하는 듯했다. 참 멋진 풍경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바람이 점점 거세어져서 갑사 탐방은 물 건너갈 것 같은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학창 시절 가깝게 지내던 친구들이 서울과 대전에 흩어져 살고 있어 자주 만나지 못하다가 모처럼 갑사를 탐방하기로 하고 서울에서 빗길을 마다하고 달려왔는데, 빗줄기는 사정도 모르고 차창을 두드리며 가슴 속 염려로 파고들었다. 

 

                

 

 

   조바심 속에 차는 갑사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빗줄기 속에서도 이미 많은 차가 들어와 있다. 다행히 점심을 예약한 서울식당 근처에 간신히 주차하고,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면서 먼저 점심을 먹기로 했다. 식당 안에는 손님으로 가득 차 있었다. 우천으로 산행을 포기하고 식사를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시장한 김에 푸짐한 상을 받고 식사를 하는 동안 빗줄기는 서서히 가늘어지더니 정말 기적처럼 비가 그치는 것이 아닌가.  

 

 

 

 

  빗줄기가 그치자 단풍 객들은 줄지어 갑사로 향했다. 울긋불긋 차려입은 그들의 옷차림이 단풍나무 못지않게 화려하다. 마치 가을 축제장으로 향하는 것처럼 그들의 말과 걸음에는 흥이 묻어있다.

 

 쪽빛 하늘에서부터 감나무에 달린 홍시까지 도처에 가을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특히 신흥암에서 천지보탑으로 이어지는 산길에는 단풍나무 한 그루가 붉은빛을 마구 토해내고 있다. 홀로 피어서 단풍 색은 더 곱고 붉기만 했다.  

 

 

 

 

   문득 고개를 드니 갑사가 시야에 들어왔다. 노송과 느티나무 숲이 우거진 계룡산의 연천봉 서북쪽 기슭에 위치한 절이다. 공주에서 19km 떨어져 있고, 동학사에서 도보로 3시간 정도면 갈 수 있는 거리에 있다. ‘춘마곡추갑사(春麻谷秋甲寺)’라는 말이 암시해주듯이 갑사의 가을 단풍은 더없이 아름답다. 갑사는 계룡갑사(鷄龍甲寺)·갑사(岬寺)·갑사사(甲士寺)·계룡사(鷄龍寺)라고도 한다.

 

  갑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이며, 통일신라 화엄종 십대 사찰의 하나였던 명찰이다. 이설이 있으나, 삼국시대 초기 백제 구이신왕 원년(420)에 고구려에서 온 아도(阿道)화상이 창건하였다는 견해가 우세하다. 679년(문무왕 9)에는 의상(義湘)이 중수하였고 ‘화엄대학지소(華嚴大學之所)’로 삼았으며, 이때부터 신라 화엄십찰(華嚴十刹)의 하나가 되었다. 그 뒤 859년과 887년에 중창하였다.  

 

 

 

 

 

 

 

 

 

 

   특히 갑사는 임진왜란 때 기허당(騎虛堂) 영규대사(靈圭大師)의 승병 활동으로 지금까지 호국사찰로 그 이름이 높다. 영규대사는 휴정(休靜)의 문하에서 법을 깨우쳐 제자가 되었으며 임진왜란 당시 자신의 수행도장인 갑사를 중심으로 700여 명의 의승을 규합, 관군과 더불어 왜적으로부터 청주성을 탈환하기도 했으며, 금산에서 조헌과 함께 최후항전을 펼쳐 죽음으로써 나라를 구한 큰스님이다.

 

  대웅전 앞에서는 기허당 영규대사의 추모제가 열리고 있었다. 갑사에 들어서는 입구에서부터 조용한 산사에 웬 귀에 거슬리는 가요인가 했더니 추모제에서 부르는 가수들의 노래가 골자기를 쩌렁쩌렁 울렸다. 조국이 위란의 처지에 있을 때 자신의 몸을 조국 위해 불태운 혼령 앞에 가수들의 요란한 노래와 춤이 추모제의 내용이라니 전혀 당치않은 것일 듯싶었다. 

 

 

 

 

 

   갑사는 '하늘과 땅과 사람 가운데서 가장 으뜸간다'고 해서 갑등의 이름으로 갑사가 되었다고 전한다. 이름대로 하면 첫째가는 절인 것이다. 조선 세종 6년(1423)에 일어난 사원 통폐합에서도 제외될 만큼 일찍이 이름이 났던 절이었다.

 

  세조 때에는 오히려 왕실의 비호를 받아 '월인석보'를 판각하기도 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전소되었으며, 선조 37년 (1604) 대웅전과 진해당 중건을 시작으로 재건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중요문화재로는 보물 제256호인 갑사 철당간 및 지주와 보물 제257호인 갑사 부도, 보물 제478호인 갑사 동종, 보물 제582호인 선조 2년간 월인석보 판본이 있다. 지방문화재로는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95호인 강당이 있고, 대웅전은 제105호, 대적전은 제106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웅전 안의 석조약사여래 입상은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50호로, 석조보살 입상은 제51호로, 갑사 사적비는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52호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충청남도 기념물 제15호인 영규대사 묘가 있다. 표충원은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52호, 삼성각은 제53호, 팔상전은 제5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55호인 갑사 중사자암지 삼층석탑, 제56호인 영규대사비, 제68호인 천진보탑(天眞寶塔) 등이 지정되어 있다. 또한, 강당에는 절도사 홍재의(洪在義)가 쓴 계룡갑사라는 현판이 걸려 있으며, 표충원에는 휴정(休靜)·유정(惟政)·기허(騎虛)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이 중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의 부도는 갑사 뒤편의 산속에 있었으며, 상륜부까지 갖춘 완전한 형태로 보존되어 오다가 1917년에 도괴된 뒤 대적전 앞으로 옮겼고, 1583년에 주조된 동종은 민족 항일기에 쇠 공출로 제공되었다가 8·15광복 후 인천에서 다시 찾아온 것이다. 부속암자로 1808년에 청담(淸潭)이 세운 내원암(內院庵), 수정봉 아래의 신흥암(新興庵)·대성암(大聖庵)·대적암(大寂庵)·대자암(大慈庵) 등이 있다.

 

  갑사 탐방을 마친 우리는 헤어짐의 아쉬움을 달래며 문정일 교수를 대전에 남겨두고 다음 해 봄날 서울에서 만날 것을 약속한 채 서울로 향했다. 빗줄기 속에서 이른 아침부터 운전을 맡아준 정만석 회장에게 감사드리며, 갖가지 간식과 음료수를 정성껏 준비해 온 최선섭 회장에게 감사드린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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