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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단문(수필)

(수필) 피 어린 육백 리 / 이은상

by 혜강(惠江) 2014. 1. 10.

<수필>

 

피 어린 육백 리

 

  - 이은상

 

 

  오늘은 휴전선(休戰線) 행각(行脚)의 마지막 날이다. 나는 지금 동부 전선(東部戰線)에서도 가장 치열한 격전을 치렀다는 향로봉(香爐峯)을 향해서 가는 길이다.

  여기는 바로 설악산(雪嶽山) 한계령(寒溪領)으로부터 흘러오는 한계의 시냇가, 발길은 북쪽을 향하면서 눈은 연방 설악산 들어가는 동쪽 골짜기를 바라본다. 30년 만에 다시 보아도 밝은 빛, 맑은 기운이 굽이쳐 흐르는 물 소리와 함께 가슴 속의 티끌을 대번에 씻어주기 때문이다. 얼마나 아름답고 시원하냐! 

  그래, 이런 데서 그렇게 피비린내를 풍겼더란 말이냐! 친소(親疎)도 없이, 은원(恩怨)도 없이, 싸우다 말고 총을 던지고 냇물에 발이라도 담그고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고 싶은 데가 아니냐! 그림보다 더 아름다운 이런 산수(山水) 속에서, 더구나 지난날 전투(戰鬪) 중에서도 가장 처참했던 것이 설악산과 향로봉 싸움이었다니, 우리는 왜 그렇게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던가! 차는 어느새 진부령(珍富領)을 넘는다.

  이 재는 인제(麟蹄), 고성(高城) 두 고을의 경계다. 이로부터는 고성 땅 손님이 되는 것이다. 고개를 넘으면 내림길, 얼마 아니 하여 진부리에 이른다. 마을이었던 터만 남았고, 집도 사람도 없다. 다만 길가에 비석 두 개가 서 있다. 하나는 향로봉 지구 전적비(戰蹟碑)요, 다른 하나는 설화(雪禍) 희생 순국 충혼비(忠魂碑)다. 피발린 비석이요, 눈물어린 비석이다.

  전적비에는 1951년 3월 7일로부터 6월 9일에 이르기까지 우리 국군(國君)이 영웅적으로 공산군(共産軍)과 싸워 마침내 이 지역을 점령(占領)하게 되었다는 사적(史蹟)을 새겼다. 아닌게 아니라, 이 지역의 휴전선 지도를 이같이 북으로 높이 그어 올려 놓은 것은 실상 이 싸움에서 승리한 때문이었다. 옛날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의 속박(束縛)을 벗어나 가나안 복지(福地)를 향하여 광야(曠野)를 거쳐 갔듯이, 오늘 우리 민족도 광복과 함께 새로운 이상 세계(理想世界)를 향하여 온갖 고난 극복의 행진(行進)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날, 이스라엘 민족이 르비딤에 이르렀을 때, 약탈자 아말렉 족속(族屬)들이 쳐들어왔던 것같이, 오늘 우리에게도 저 침략자(侵略者) 중공군(中共軍)이 쳐들어와 우리의 가는 길을 저해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날 마침내 이스라엘 민족이 싸워 이겨서 승리의 돌단을 쌓은 것같이, 우리도 지난날 싸워 이겨서 여기 이곳에 승전비(勝戰碑)를 세운 것이다.

  그리고 그 때 이스라엘 민족은 그 돌단에 이름을 지어 붙이되 '여호와 닛시'라 하니, 그것은 '여호와는 나의 깃발'이라는 이름을 지어 붙이고 싶지 아니하냐! 그리고 또 충혼비에는 1956년 2월 중순(中旬)으로부터 3월 초순 사이에 이곳 향로봉 밑에서 눈이 무너져 우리 젊은 국군들이 그 눈 속에 희생되었던 사실(事實)을 새겼다. 얼마나 아깝고 통분(痛憤)한 일인지 형언할 길이 없다.

  젊은 군인들은 집을 떠나 일선(一線)에 와서, 봄 가고 여름 가고 눈이 펄펄 날릴 적에, 이 겨울만 지나면 집으로 돌아가려니 하고 눈녹기만 기다리던 이들도 있었으리라. 그대들의 마지막 호흡(呼吸)이 끊어진 산기슭에 찬 눈이 몇 번이나 쌓였다 녹고, 올해도 어느덧 버들잎이 나부끼는데, 그대들의 숨소리만은 다시 들리지 않는구나.

  나는 비석 앞에 서서 두 손을 모아 명복(冥福)을 빌곤 다시 차를 몰아 서북으로 향로봉을 향하여 오른다 산을 감고 소라 고등 모양으로 몇 굽이를 돌아 오르자, 구름이 차머리를 감더니만 난데없이 비가 뿌리기 시작한다. 그렇지 않아도 높은 산, 깊은 골에 한 점 티끌이 없을 건데, 비마저 뿌려 씻겨서 온 산이 순녹색의 신선(神仙)의 궁전(宮殿)으로 화하니, 이 비야말로 '푸른 비'라 쓰는 바로 그 비로구나! 그러기에, 높은 재 위에서 모진 풍우(風雨)에 견디다 못해 썩고 마른 향나무 등걸들이 죽은 채 저도 한몫 '푸른 가족(家族)' 속에 끼여들어, 몸뚱이에 두루 감은 이끼 빛깔이나마 한번 힘껏 돋우어 본다. 그렇지! 질번거리는 '푸른 잔치'에 설사 높은 손님은 못 될망정, 옛 이야기 잘 하는 동네 늙은이격은 되는 것 같아, 눈을 넌지시 던져 아는 체해 주고 지나간다.

   마침내 향로봉 위에 올랐다. 높이는 1293미터다. 600리 휴전선 밑에서는 가장 높은 산이다. 마루 위에 높이 서서 부슬비를 맞으며 말없이 바라보는 남북 강산(南北江山). 아! 조국의 강토는 참으로 장하고 아름답구나! 그렇건만,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는 다만 슬픔과 불행 속에 잠겨 있는 것이 얼마나 안타 까우냐. 나는 지금 향로봉 위에서 하늘을 우러러 안타까운 기도를 올린다.

  승리를 위해 해를 머무르게 한 
  여호수아의 기도를 들으신 주여!
  공전(空轉)하는 역사의 바퀴를
  오늘도 여기 멈춰 주소서.

  불안(不安)과 초조와 회한(悔恨) 속에서
  다만 슬픔을 되새기면서
  바람결에 흰 머리카락을 날리며
  헛되이 늙게 하시나이까!

  주여! 이 땅에 통일(統一)과 자유(自由)와 평화(平和)를
  비 내리듯, 꽃 피우듯 부어 주소서.
  그 땅에서 단 하루만이라도
   그 땅에서 살게 해 주옵소서.

  나는 내 가슴을 어루만지고 스스로 위로하면서 도로 산 아래로 내려와, 동해를 향하여 차를 달린다. 건봉산(乾鳳山) 밑을 지나 오며 군인들이 따 주는 산딸기랑 오디랑 번갈아 씹다가 문득 보니, 밭 언덕에 해어진 군복 조각을 걸친 허수아비가 섰다. "여기서는 새들도 군인이래야 겁을 내나보다." 하고 웃는 사이에, 다시 보니 동해의 푸른 물결이 옆구리에 와 부딪는다. 명호리 폐허를 향하여 북으로 달려간다. 휴전선 마지막 지점을 찾아가는 것이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금단(禁斷)의 최종 구역(最終區域) 안으로 들어서니, 십여 명의 수비군들이 무슨 큰일이나 난 듯이 뒤를 따른다.  나는 물조차 질벅거리는 풀숲 속으로 신 젖는 줄도 모르고 미친 듯 달려들어가, 마지막 남쪽 한계선에 쳐 놓은 철조망을 덥석 붙들자, 무슨 강한 전류(電流)에 감전(感電)이나 된 듯이 손발과 가슴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느꼈다. 철조망을 움켜 잡은 채, 손 쩔리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서, 한 걸음 두 걸음 쓰러질 듯, 동쪽을 향하여 바다를 내다보며 걸어나갔다.  끝없이 철썩거리는 동해의 물결! 백사장(白沙場)가에 박아 놓은 철조망의 마지막 쇠말뚝을 붙드는 순간, 나는 그만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그래, 이것이 피어린 휴전선의 마지막 철조망, 마지막 쇠말뚝이냐! 그래, 내가 이 마지막 쇠말뚝 하나 잡아 보려고 600리를 허위허위 달려왔더냐.

  길이 끝났네, 더 못 간다네. 병정은 총 들고 앞길을 막네.
  저리 비키오. 말뚝을 뽑고 이대로 북으로 더 가야겠소.
  바닷가 모래 위에 주저 앉아 파도도 울고 나도 울고.

  그래, 길이 끝나서 우는 것이냐, 더 갈 곳이 없어서 우는 것이냐! 아니다. 북한 동포를 붉은 무리의 손에 저대로 버려 두기가 안타까워 우는 것이다. 울다 말고 눈물어린 눈으로 북쪽을 바라본다. 바라보다 말고 몸이 절로 움칫해진다. 이대로 철조망을 박차고 넘어가 볼까. 그런단들 누가 내 앞을 막을 것이냐!

  문득 북쪽 한계선 앞에 있는 까치섬을 바라본다. 밀려드는 조수(潮水)에 발부리가 젖는다. 그래, 산으로 못 간다면 물길로 가지. 이 바다를 저어서 건너가 볼까. 공자(孔子)가 일찍이 강을 건너 진(晋)나라로 들어가다가, 그 당시 정권(政權)을 잡은 조간자(趙簡者)가 두명독(竇鳴犢)과 순화(舜華) 같은 어진 사람들을 죽였다는 말을 듣고 발길을 돌리며, "내가 이 강을 못 건너는 건 운명이다." 하고 탄식했었던 것과 같이, 나도 오늘 이 바다를 못 건너는 게 운명이더란 말이냐. 아니, 나 혼자 이 철조망을 뚫고 간대서 민족의 소원이 풀리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이 쇠말뚝이나 뽑아 버린대서 인류의 낙원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차라리 그보다는 먼저 할 일이 있다. 

  민족과 인류를 저 '역사의 함정'으로부터 구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위인(偉人)'이라 불리는 어떤 몇 사람의 힘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민족 전부가, 인류 전체가 모두 나서서 스스로 제가 저를 구출하기에 온갖 '정성'을 다해야 한다.

  어느덧 황혼이 짙어 온다. 동해의 파도 소리에 심장이 오히려 터질 것만 같다. 언제까지고 여기서 울고만 섰을 수는 없다. 차라리 돌아가자. 돌아가 할 일이 있지 않으냐. 내일 아침 돋아 오를 새 태양을 맞이해야겠다. 인욕의 밤을 새우고 새 삶의 태양을 맞이해야겠다.

  푸른 동햇가에 푸른 민족이 살고 있다.
  태양같이 다시 솟는 영원한 불사신(不死身)이다.
  고난을 박차고 일어서라. 빛나는 내일이 증언(證言)하리라.
  산 첩첩 물 겹겹, 아름답다, 내 나라여!
  자유와 정의와 사랑 위에 오래거라, 내 역사여!
  가슴에 손 얹고 비는 말씀, 내 겨레 잘 살게 하옵소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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