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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광주. 전남

해남 두륜산, 꽃이 져야 봄이 오는 땅끝 산

by 혜강(惠江) 2013. 4. 7.

            

해남 두륜산

 

 

꽃이 져야 봄이 오는 땅끝 산

다도해가 품속으로 파고든다

 

해남 = 글·사진 박광재 기자

 

 

 

▲ 엄홍길 대장이 이끌고 있는 ‘한국 명산 16좌 원정대’ 행사에 참여한 전남 지역의 등산 애호가들이 지난 3월 말 두륜산 두륜봉에 올라 환호하고 있다. 뒤쪽 오른쪽부터 가련봉, 노승봉 그리고 멀리 다도해가 펼쳐져 있다.

 

 

 

  엄홍길(53·밀레 기술고문) 대장과 함께 히말라야 트레킹을 한 후 첫 산행지는 전남 해남의 두륜산이었다. 엄 대장이 소속돼 있는 ㈜밀레의 ‘한국 명산 16좌 원정대’ 행사가 계획돼 있었고, 조금이라도 빨리 봄소식을 접하고 싶은 욕심에 따라 나섰다. 꽃 소식이 빠른 남녘산에서도 가장 먼저 즐길 수 있는 것이 두륜산의 동백꽃 산행이다. 하지만 3월이 거의 지났는데도 봄을 시샘하는 꽃샘추위 탓인지 꽃 구경은 이른 듯 했다. 행사에 참석한 등산 애호가들의 차림도 아직 겨울을 벗지 못했다.

  날씨가 맑은 날 두륜산에서는 멀리 제주도의 한라산에서부터 지리산의 천왕봉, 경남 남해 금산까지 보인다. 또 가까이는 장흥 제암산과 천관산, 광주 무등산, 영암 월출산은 물론 서남해 다도해의 섬들이 남도 땅의 아름다움을 한껏 뽐낸다. 특히 해남 두륜산 케이블카 전망대가 위치한 고계봉은 사방이 탁 트인 경치가 장관이다.

  한반도의 가장 남쪽 끝에 위치한 두륜산은 가련봉(703m)을 비롯한 두륜봉(630m), 고계봉(638m), 노승봉(685m), 도솔봉(672m), 연화봉(613m), 향로봉(469m), 혈망봉(379m) 등 8개의 높고 낮은 능선을 이루고 있다. 지난달 다녀왔던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ABC) 일대의 산군을 축소해 놓은 듯 하다. 엄 대장은 “ABC 트레킹을 한 후 국내 산을 오르면 나는 듯한 기분일 것”이라면서 여독을 푸는 데는 아기자기한 남녘 산을 오르는 게 ‘딱이다’고 한다.

  그래서 이날 히말라야 얘기는 자연스레 ‘날씨’였다. 엄 대장은 “히말라야에서의 날씨는 크레바스의 위치도 바꿔 놓는다”면서 히말라야 이야기를 이어갔다.

  크레바스 주위에 덮인 거대한 눈과 얼음 덩어리들은 게절의 변화에 따라 쌓이고 또 녹아내리기를 반복하면서 입구의 형태와 위치가 달라진다. 어제까지 보았던 크레바스가 간밤에 내린 폭설에 덮여 히든 크레바스로 정체를 감추기도 한다. 크레바스에 빠지면 십중팔구 목숨을 잃는다.

  “안나푸르나 세 번째 도전 때의 일입니다. 정상공격을 앞두고 날씨가 쾌청해 곧 정상에 오를 수 있을 것만 같았죠. 캠프 3를 떠나 마지막 캠프를 구축하기 위해 등반을 시작, 마지막 캠프가 눈 앞인 해발 7600m에서 시계를 보니 오후 2시였어요. 기온은 영하 10도 정도에 바람도 견딜 만했고 무엇보다 정상이 뚜렷하게 보일 정도로 하늘이 맑았죠. 이제 남은 고도는 500여m. 마지막 캠프를 향해 오르는 경사 60도 가량의 설사면(雪斜面)이 나타나자 뒤따르던 셰르파 다와 타망이 앞장서기 시작했죠. 다와는 베테랑이었어요. 크레바스를 만난 다와가 건너뛰라는 말에 주춤거리며 물러서는 것 같더니 비탈 아래로 떨어졌어요. 나는 다와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에 반사적으로 로프를 잡았죠. 장갑을 낀 손바닥이 로프의 마찰로 인해 타들어 가는 듯한 열감과 함께 내 몸뚱어리도 휘청하더니 추락하기 시작했어요. 어느 순간 멈춘 느낌이 들어 눈을 떠 보니 눈 속에 처박혀 있었죠. 다행히 다와와 또 한 명의 셰르파 카미 도르지, 한왕용 대원 그리고 나 모두 살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천천히 발을 빼는 순간 엄지발가락이 있어야 할 자리에 발뒤꿈치가 놓여 있었어요. 발목이 180도 돌아가 버린 것이죠.”

  500여m를 앞두고 정상 등정에 실패한 엄 대장은 왼쪽 다리만으로 구르고 기기를 반복, 72시간 만에 베이스캠프로 돌아와 헬기로 현지 병원으로 이송됐다.

  두륜산 각각의 봉우리에서는 서해안과 남해안 곳곳의 다도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다산 정약용이 편찬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대둔사지(大芚寺誌)’에 의하면 산명은 백두산에서 두(頭), 중국 곤륜산에서 륜(輪)을 빌려 붙인 이름이라는 설명. 또 두륜이란 산 모양이 둥글게 사방으로 둘러서 솟은 ‘둥근머리’ 또는 날카로운 산정을 이루지 못하고 ‘둥글넓적한’ 모습을 하고 있다는 데서 연유됐다는 설명도 있다.

  이날 코스는 대흥사 주차장에서 시작해 대흥사-북 미륵암-천년수-만일재-두륜봉-구름다리-진불암-표충사를 거쳐 다시 대흥사 주차장으로 내려오는 4시간여 산행. 가련봉 코스는 다소 길이 험해 보통 두륜봉 코스를 많이 이용한다. 출발지인 대흥사 주차장에서 대흥사 입구에 이르는 길 양편으로 자리한 동백 군락지의 동백꽃들이 봉우리를 조심스럽게 펼쳐보였다. 역설적이긴 하지만 이곳에서는 꽃이 져야 봄이 온다. 동백이 져야 진짜 봄이 오는 것이다.

  동백 군락지를 지나면 대흥사 입구에서부터는 낙락장송들이 줄지어 있다. 대흥사가 연륜 있는 고찰임을 입증하듯이.

  대흥사 경내에 들어서면 대웅전 뒤편으로 가지런히 서있는 봉우리와 능선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본격적인 산행은 대흥사를 지나면서 시작됐다. 1㎞ 정도는 완만해 마치 트레킹하듯 쉽게 걸을 수 있었다. 여기서 트레킹이란 ABC트레킹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정말 가볍게 걸을 수 있는 길이다.

  만일재 인근에서부터는 60도에 이르는 경사도와 기암괴석으로 숨이 가빠 온다. 두륜봉과 가련봉에서 뻗어나와 산 아래로 이어지는 바위 계곡 때문에 조금은 힘겹다. 만일재에서 두륜봉 정상까지는 단숨에 내달려 올랐다. 호흡을 가다듬고 사방을 아우른다. 해남의 드넓은 간척지 뒤로 완도 앞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두륜봉 정상에서 맞은 바람은 아직 차갑다. 그러나 겨울의 삭풍은 아니다. 상큼하다. 봄이 왔다.

 

  바로 이웃한 주작산, 덕룡산이 공룡 등줄기 같은 거친 근육을 뽐낸다. 호남의 명산 영암 월출산, 광주의 무등산도 멀리서 너울거린다. 하산길은 행사 일행과 달리 잡았다. 가련봉 코스를 접해보고 싶어서다.

  두륜봉과 가련봉 사이의 만일재는 북일면과 대흥사를 잇는 고개. 만일재는 고봉에 흔치 않은 평원인데다 햇볕이 따뜻해 등산객들의 식사 장소로 최적이다. 계단이 잘 정비돼 있어 산행이 한결 편리해졌지만 만일재에서 가련봉으로 오르는 길은 전체 등산로 중 가장 험하다. 이름만 ‘가련’할 뿐 오히려 표독스럽다. 그러나 암릉을 타는 맛은 그만이다. 노승의 머리처럼 생겼다는 노승봉이 바로 옆이다. 여기서도 로프와 쇠줄을 타느라 땀 좀 흘려야 한다. 봄기운이 완연한 산 아래는 온통 회색빛 물결이며 군데군데 초록 물감이다. 봄의 교향악을 준비하고 있다. 여덟 장 연꽃잎 위에 얹힌 듯 평화롭게 자리잡은 대흥사를 다시 한번 내려다 보고 오심재로 내려선다.

 

 

<출처> 2013. 4. 5 /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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