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조천
제주도의 큰 관문이자 3․1 운동의 진원지
- 제주 3․1 운동기념탑과 항일기념관, 유서 깊은 연북정과 비석거리 -
글·사진 남상학
* 조천 만세동산에 우뚝 선 삼일독립운동기념탑 *
하늘이 잔뜩 흐려 곧 비가 쏟아질 것 같은 날, 나는 제주시에서 동쪽으로 일주도로를 따라 성산일출봉으로 가고 있었다. 가능한 한 해안도로로가 나 있는 곳은 해안도로를 따라갔다. 제주시내에서 동쪽으로 12km 지점에 있는 조천(朝天)을 지나고 있을 때 차창을 통해 보이는 풍경이 예사롭지 않았다.
도로변 가까운 곳에 높이 솟은 삼일독립운동기념탑이 보이고 제주 독립운동의 진원지라는 표지석이 보였다. 또 즐비하게 늘어선 비석들과 고가옥이 잘 보존되어 있어 이곳이 전통과 문화가 깃든 마을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갈 길이 바빴지만 나는 차에서 내려 이곳저곳을 둘러봤다. 알고 보니 조천은 제주에서 일찍부터 발달한 마을이며, 역사적으로 유서 깊은 마을인 동시에 민족정신이 살아 있는 도시임이 분명했다.
* 조천 만세동산(미밋동산=味尾峰)에 높이 솟은 애국선열추모탑 *
조천읍 조천리 일주도로변을 가다보면 동북쪽의 조천 만세동산(미밋동산=味尾峰)에 '3ㆍ1운동기념비'라고 쓴 기념탑과 만세를 부르는 모습의 조각상이 보인다. 조천은 제주도의 만세운동의 진원지였다. 서울 휘문고등학교 재학중 3ㆍ1만세운동에 참여하여 활약하다가 뜻을 품고 고향인 조천리로 내려온 김장환이 김시범·김시은 등 14명과 함께 동지를 포섭하고 이곳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19년 3월21일 오후 3시 미밋동산에서 조천, 신촌, 함덕리 주민 500∼600명이 모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만세 구호를 외쳐 도내 곳곳에 퍼졌던 것이다. 이 만세운동은 5~6일간 8천여 명의 군중이 참여하였다가 김장환 ·김시범 ·김시은 등이 왜경에 체포되어 징역 6개월 이상 1년간의 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이후 만세운동의 시발점인 조천 미밋동산을 조천 만세동산으로 부르게 되었고, 조천 만세동산 성역화사업이 추진되면서 이곳에 기념탑과 제주항일기념관을 건립하였다. 제주도에서는 해마다 민족정기를 일깨워 준 조천에서 삼일절 행사를 치르고 있다.
제주시는 이곳에 제주지역 선열들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자주 독립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고, 자라나는 후세들에게 올바른 역사의식과 애국, 애향정신 함양을 위한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자 제주항일기념관을 세웠다.
이곳에는 제주지역의 항일 독립운동에 관한 역사적 자료를 수집, 보존, 전시 되어 있는데, 항일운동 관련 기록 문서 110여점, 독립운 동가 사진자료 170여점, 국제한국연구원 기탁자료 10여점, 백범 김구기 념사업협회 제공자료 10여점, 국립중앙박물관 제공자료 70여점, 일본군의 최후를 담은 영상필림 1점, 기타 도서자료 110여점 등 총 500여점을 갖추고 있다.
* 제주항일기념관과 전시물 *
조선세대의 제주는 철저한 해안방어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주된 이유는 왜구 대문이었다. 고려 말부터 출몰하기 시작한 왜구는 남해안을 비롯해 연안항로를 따라 서해안과 중국까지 진출했다. 제주는 그 길목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매우 시달렸다. 고려 말부터 조선 18세기까지 제주에 왜구가 침범한 횟수는 무려 50여 차례나 된다. 19세기에 들어서는 이양선이라 하는 외국선박이 제주해안에 출몰해 조정을 들끓게 하기도 했다. 표류선이나 이양선의 정체를 확인하고 처리하는 문제 때문에 조정에선 골머리를 앓았던 것이다.
해안방어가 절실할 수밖에 없었던 제주는 릴찌기 해안 곳곳에 조천진(朝天鎭)을 비롯하여 화북진, 별방진, 수산진, 서귀진, 모슬진, 차귀진, 명월진, 애월진 등의 방어진을 설치했다. 그 중 조천진 성(朝天鎭城)은 둘레가 428자, 높이가 9자인 성으로 알려져 있고, 성안에는 조천관과 주방, 마굿간, 군기고 등이 있었다고 한다.
제주로 들어오는 가장 큰 관문 역할을 한 조천진 성터에 세워진 연북정(戀北亭)은 고려 공민왕 23년(1374)에 세워진 정자였다. 조천 포구가 화북포와 함께 관원이나 도민들이 본토를 왕래하는 관문이었을 뿐만 아니라 순풍을 기다리며 머무는 휴식처이기도 하였다고 하니 연북정은 일종의 객사였던 셈이다.
연북정은 남동향으로 전면 3칸, 측면 2칸으로 되어 있고, 평면의 구조는 7량으로 기둥의 배열과 가구의 배열방법이 모두 제주 민가형 건물이다. 지붕이 합각지붕으로 된 것만이 민가와 다르며, 그물매가 낮은 것이 특징이다. 건물은 네모꼴에 가까운 높이 14자의 축대 위에 동남을 향하여 세워져 있다. 이 축대의 북쪽으로는 타원형의 성곽이 둘려 쌓여 있는데 조선조 시대 제주를 외적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설치되었던 요새인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 조천진터, 연북정을 알리는 표지석 *
* 조천진 성 위에 세워진 연북정과 현판 *
* 연북정 바로 앞에 펼쳐진 해변*
조천은 고려시대부터 제주도의 주교통항으로 1374년 주천관이 창건되었다. 제주에서 한양으로 가기 위해서는 이곳 조천포에서 배를 띄워 해남의 이진포에 내려 육로를 이용해 다녔던 중요한 길목이기도 하다. 전설에 의하면 이곳이 진시황의 명령을 받은 서불(徐佛:일명 徐市)이 불로초를 구하기 위하여 도착한 금당포(金塘浦) 터라는 이야기도 전한다.
* 서불 일행이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왔다는 금당포터라는 표지석 *
본래 연북정은 1590년(선조23)에 절제사 이옥이 성을 다시 쌓을 때 동북쪽으로 물려서 쌓고 그 위에 망루를 안치하여 쌍벽정이라 하였다고 하였다가. 임금 곁을 떠나 지방으로 나와 있는 관리나 제주도에 유배되어 온 선비들이 임금이 계신 북쪽을 바라보며 이 정자 위에 올라 임금을 연모하여 시와 술로써 향수를 달래기도 했다고 하여 연북정이라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먼 객지에서 하루도 잊을 날이 없으니
하루의 고향생각 구추에 당하네.
취한 중에 돌아갈 길 잊고자 하고
꿈속에서도 이 몸이 떠 있음을 깨닫도다.
우연히 최호의 연파구를 읊고 진경의 죽엽주를 환상하기 어렵도다.
멀리 이별함을 가볍게 생각마라
정자에 홀로 앉으니 저녁 수심만 절로 나네.
이 시는 김상헌이 연북정에서 지은 것이다. 김상헌은 1596년(선조 29) 문과에 급제한 인물로 제주도에서 반란이 발생하자 진상 조사와 수령들의 근무 상황을 점검하라는 임무를 띠고 어사로 파견되었다가 연북정에서 멀리 떠나온 나그네의 수심을 시로 표현하였다. 또, 제주도로 유배 당한 우암(尤庵) 송시열은 숙종 15년(1689년)에 경종을 왕세자로 책봉하자 시기상조라며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83세 노구에 제주도로 유배와서 시를 짓기도 했다.
늙고 병든 몸이 북향(北向)하여 우니노라
님 향한 마음을 뉘안 두리마는
달 밝고 밤 긴 절이면 나뿐인가 하노라
그는 이 시조를 통해 비록 유배의 비운을 당했을망정 임금에 대한 충성심을 표현하고 있다. 이렇듯 연북정은 우암을 비롯한 많은 유배인들이 자신의 충심을 표시함과 동시에 결백을 나타내려 했던 곳이다.
그런 연북정이 일제강점기에는 경찰관주재소로 사용되기도 하였다고 한다. 지금의 건물은 1973년에 보수한 것으로 지방문화재 제 3호로 지정되어 있다.
* 역사가 깊은 마을답게 조천 비석거리에 즐비한 비석들 *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가진 마을이어선지 조천에는 비석거리가 있다. 이 비석거리는 조천 포구 입구에 자리잡고 있다. 역사가 오래된 마을에는 으레 그 지역 사람들의 치적을 기념하는 비가 많이 있는데, 조천이 바로 그런 곳이다. 교통수단을 해로(海路)에만 의존할 당시 제주성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포구여서 제주 목사나 판관 등 지방 관리들이 이곳을 거쳐 부임 또는 이임하였고, 이들에 대한 치적과 석별의 뜻을 표하기 위하여 비석을 많이 건립하였다.
이들 비석거리에는 7기의 비석이 남아 있다. 조천리에 세워져 있는 7기의 비는 사상(使相 목사)과 통판(通判 판관)의 공적비, 기념비 등으로 이루어졌으나 비석 뒷면이 많이 마멸되어 건립연대 등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다.
조천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던 나로서는 제주도의 새로운 지역을 발견한 느낌이었다. 자연조건이 빼어난 관광지로서의 제주도에서 이런 곳을 찾아냈다는 것이 무엇보다 보람이었다.
이곳 주민에게 조천에서 자랑할 만한 것을 또 무엇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옛날 보리빵이 유명하다고 했다. 그 중에서도 신촌 덕인당(조천읍 신촌리, 064-783-6153)이 유명하단다. 호기심에 찾아간 덕인당은 주변 몰려 있는 보리빵집 중의 일부였지만 유독 덕인당은 빵을 사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찰지고 쫄깃하며 구수한 빵맛은 치즈케이크에 다소 익숙한 나에게 투박하지만 토속적인 맛으로 다가왔다. 3대째 보리빵 만드는 가업, 맛은 물론이거니와 빵집의 역사 면에서도 거의 장인급인 셈이었다. 나는 조천을 방문한 기념으로 한 상자를 사들고 나왔다. 조천은 이래저래 나에게 제주도의 추억과 함께 오래도록 내 뇌리에 남게 되었다.
* 유명세를 타고 있는 신촌 덕인당의 옛날보리빵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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