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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수상 및 후보시

2010 서울 신춘문예 당선시 - 속옷 속의 카잔차키스/이길상

by 혜강(惠江) 2010. 1. 4.

 

 

                   [서울신문 2010 신춘문예- 시]

 

 

        속옷 속의 카잔차키스/이길상

 

 

 
                잘 갠 속옷 속에는 영혼의 세숫물이 썩어간다

                눈을 씻어내도 거리의 습한 인연들 내 안을 기웃거린다

                내 폐허를 메울 사막은 그때 태어난다

                반성하듯 내복을 차곡차곡 갤 때 올마다 낙타 한 마리 빠져나간다

                밤, 속옷을 갤 때마다

                개어지지 않는 내가 보인다

                불운 견디게 하는 사막 풍경은 상향등처럼 켜지고

                내 안의 나를 알고 있는 생이 뭔가 흘리면서도 아파할 것이다

                서른 즈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

                감히 물을 수 없을 때 부르튼 입술은 길을 알고 있었다

                맹인 바구니의 노래가 퇴근하지 못한 마음에 파고들수록

                노래 속 세상을 그쯤으로 짚으며 난 힘겹다

                감이 잡힐 나이, 노래의 무거움은 몸 밖에서 온다

                우산 안에서도 젖는 내일의 삶, 울음 삼킨 시늉할까

                그래 달콤한 사막 밤의 모래 폭풍은 고독으로 피어난다

                몸 밖의 사하라, 헛것 두르며 새벽 추위마저 껴입는다

                내 속 깊은 모퉁이는 안전하게 돌아나간다

                안경은 양심의 속때, 나를 잘 아는 신발은 닳은 굽 한 장 더 깐다

                사는 일로 얼어붙은 옥탑방, 열쇠 구멍 나를 열지 못했으므로

                계단 낮아도 허공의 높이 착실히 밟아갔을 거다

                응시할수록 더 귀 먹은 삶의 발목

                흩어질 가시나무 속에 내 얼굴 보인다

                발목 깊이 쌓이는 생

                추운 종아리의 살빛, 많이 본 듯할 때

                책과 길마다 죽은 하늘이 펄럭인다

                속옷을 갤 때 후회의 올마다 낙타, 낙타들 쉽게 빠져나간다

                거죽만 진지한 나의 사막

 

 

 

■ 당선소감 -

 

 

 “詩가 말하지 않을 때 시가 왔다”

 

  야구 시즌이 끝나고서야 잠자리가 사라진 걸 알았다.

인적 없는 공원. 불빛만이 맑게 새어 나왔다.

 

내가 나를 피해 다녔으므로 바람 한 장도 햇살처럼 빛났다. 시를 쓰고 있었지만 시는 좀처럼 내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보이는 건 언제나 나였고 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때가 쓸 시간이다.

 

볼륨을 줄인다.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듣는다. 내 숨결에 따라 소리가 변하는 변주곡.

 

대문에서 쉰다. 나가는 것도 들어오는 것도 아닌, 그 때 골드베르크가 흘러나온다. 여기 대문 앞에서 모든 게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이미 문은 닫히고 길은 사라지고 없다. 저기 까맣게 타는 불빛이 길이 되는 건 아닐까.

 

우선 묵묵히 지켜봐주신 부모님께 감사드립니다. 부족한 시를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드리며 정배, 윤미, 의주, 재호, 석진, 많은 힘이 되어준 성우 형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합니다.

 

채규판 교수님과 정영길 교수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저를 시의 길로 이끌어주신 강연호 교수님, 열심히 쓰겠습니다. 지켜봐주실 거죠?

 

■ 약력

-1972년 전주 출생

-원광대학교 국문과, 교육대학원 국어교육과 졸업

-2001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사이버 신춘문예 시 당선

 

 

 

심사평 -

 

 거친 행간 오늘보다 내일에 더 기대

 

시를 읽고 쓰지 않아도 시간은 잘 흐르고 아이들은 자라고 경제는 미세하게나마 성장한다. 시하고 상관없이 삶은 잘도 돌아간다. 그리 시적인 나라는 아닌 것 같은데 시를 쓰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다. 놀라운 일이다. 이 땅을 마지막 시의 나라라고 불러도 지구인 중에 시비를 걸 자는 없을 것이다. 한국시의 풍요와 다양성을 이번 심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 시인 황지우(왼쪽)·안도현

 

본심에 열여섯 분의 작품이 올라왔다. 이 중에서 류성훈, 강윤미, 김희정, 최설, 손현승, 이길상씨의 작품을 1차로 골랐다. 모두들 중요한 패를 하나씩은 움켜쥐고 있었다. 심사를 하는 사람의 취향에 따라 당선자가 얼마든지 바뀔 수도 있다고 보았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가장 시적인 것은 무엇인가를 논의했고, 자신을 변화시키고 갱신할 뒷심이 있는가를 판단의 기준으로 삼기로 했다.

 

손현승씨의 시들은 안정된 호흡을 유지하고 있으나 어떤 규격화된 틀 속에 갇혀 있었다. 시에 가한 바느질 솜씨를 들켜서는 안 될 것이다. 선배시인의 흔적을 채 지우지 못한 점도 지적되었다. 이와는 전혀 다른 세계를 보여준 최설씨의 시는 시적 대상을 해석하려는 끈질긴 탐구심이 볼 만했다. 그러나 사유를 서술하는 방식이 일방적이어서 건조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당선작으로 뽑은 이길상씨의 ‘속옷 속의 카잔차키스’는 때때로 거친 어휘와 난해한 이미지가 날것으로 드러나 있으나 속에서 올라온 어떤 ‘찐한 것’이 스며 있는 시이다. 자아가 세계를 통과할 때의 단절감을 여과 없이 드러내면서 일상 속에서 자기반성을 철저하게 밀어붙인 점을 좋게 읽었다. 안전하고 매끄러운 것보다는 불안하고 거친 것을, 오늘의 시보다는 내일의 시를 택한 결과다. 축하한다. 이제 좋은 시인으로서 그가 응답할 차례다.

 

 

 

<출처> 2010. 1.4 / 서울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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