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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수상 및 후보시

2010 신춘한라문예 시 당선작 - 장식장을 버리고 / 박찬

by 혜강(惠江) 2010. 1. 2.

 

 

                          [2010신춘한라문예 시 당선작]

 

 

                          장식장을 버리고

 

                                                     박 찬

                                             /그림=허영희(일러스트레이터)

 

 

장식장을 버렸습니다. 떨어져 덜컥이는 문짝을 청테이프로 길게 입막음 하고 동사무소에 들러 오천 원짜리 스티커를 사왔습니다. 저승길 노잣돈치곤 값싼 그 몸값이 안쓰러워 쉽사리 발길을 돌리지 못하고 한참을 그와의 이별에 매달립니다. 모서리를 밀치고 튀어나온 못이 허리를 꺾어 작별을 고합니다. 아내와 함께 시집와 십 여년, 그 사이 고장난 어깨가 삐걱거립니다. 긁히고 벗겨져나간 살점들과 아이들의 낙서자국, 더 이상 채울 수 없는 몸은 뼈대만 앙상히 늙어갑니다. 그 안에 담아두었던 신혼의 이야기며 육아일기며 단란했던 한 가족의 앨범들. 그리움을 이야기하며 많은 날들을 지탱해온 가슴에 아쉬움이 복받쳐 오르고, 돌아오는 길 모처럼 어머니께 안부전화를 넣었습니다. 당신의 신경통은 다 나았다 걱정마라하시며 혼자 있는 자식걱정에 마음 졸이시는 어머니. 밥은 제때 챙겨먹는지 빨래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 미국에 있는 아이들과 애 엄마는 잘 지내는지…. 비워지지 않는 어머니의 걱정에 할 말 다 못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습관처럼 올려다보는 하늘. 아메리카로 가는 비행기의 불빛이 희미하게 반짝입니다.

 

 

 

[ 시 심사평 ] ------------------------------------------

 

 

일상적 언어로 그려낸 삶 남달라


양진건 시인, 김수열 시인

20년의 연륜 때문인지 지방지 신춘문예 시 부문에서 181명의 시인지망생이 보낸 915편을 심사한다는 것은 어쨌거나 고무적인 일이다. 시가 밥이 되지 않는 건 현실이지만 문학이 죽었다는 표현은 사실이 아닌 것 같다.

그래서인지 심사하는 동안 외롭지도 괴롭지도 않았다. 즐거운 마음으로 읽고 또 읽었다.

우선 안은주의 '여덟 번째 이사하던 날', 황문희의 '왕과 나', 고경숙의 '자하문 열쇠수리공', 박찬의 '장식장을 버리고', 박은영의 '목선', 전용래의 '전망', 강동완의 '노을을 건너는 엿장수'를 가려낼 수 있었다. 다른 투고작에 비해 비교적 단단하고 고민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작품들이었다.

결국 두 작품으로 추렸는데 황문희의 '왕과 나'와 박찬의 '장식장을 버리고'로 압축시킬 수 있었다. 사실 이 두 작품은 우열을 가리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왕과 나'는 시에 다가서는 도발적인 상상력이 눈에 띄었고, '장식장을 버리고'는 일상적인 언어로 결코 일상적이지 않은 삶을 담담하게 그려내는 공력이 남달랐다.

고민 끝에 박찬의 '장식장을 버리고'를 취하고 '왕과 나'를 내려놓아야 했다.

모름지기 시는 시인이 독자들을 위해 차린 공기밥 한 그릇이다. 시가 몸의 밥은 될 수 없을지라도℃ 영혼을 위한 따뜻한 밥은 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당선작에 대한 칭찬 대신 낙선작에 대한 격려를 하고 싶다. 한두 번의 실패가 결국 진국 같은 시를 만들어 내는 소중한 경험임을 믿어 의심치 않으므로 더욱 정진해 달라는 말을 전하고 싶다. <심사위원 양진건·김수열>

 

 

 

시 당선자 박찬씨, '악재의 연속' 끊어준 당선 소식


 

길은 멀었다. 다리는 뻐근하고 축축한 습기 같은 한기가 옷깃을 파고들었다. 산을 만나고 강을 건너야 했다. 뼛속깊이 시린 추억들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쉬고 싶었다. 쉬면서 세상의 모든 안락과 희망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쉬는 일이 익숙하지 않았다. 몸은 이미 일에 맞게 재단되어 있었다.

전날 먹은 술이 만취가 되어 머릿속을 돌아다녔다. 희미한 형광등처럼 나를 향해 껌벅거렸다. 그러던 중 당선통보를 받았다. 잠시 생각이 정전되었다. 좋은 일엔 역시 사람이 먼저인가 보다. 떠오르는 얼굴들이 많았다.

멀리 미국에 있는 가족과 통화를 했다. 여진이 홍준이 그리고 진아. 모두가 자기 일처럼 좋아했다. 그동안 내가 너무 무심했구나 하는 생각이 퍼뜩 머리를 스쳤다. 기뻐할 일이라는 게 사실 살다보면 크게 없겠지만 그래도 작은 것에서부터 찾아주었어야 했다. 아이들과 아내의 웃음소리가 한동안 나를 설레게 했다.

올 한해는 우환이 많았다.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잇달아 병원을 몇 달씩 드나들었고 뜻하지 않았던 동생의 수술. 말 그대로 악재의 연속이었다. 이제 새 해가 밝아온다. 나의 당선 소식이 아버지 어머니께 조금이라도 위안이 된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텅 빈 집으로 들어간다. 유난히 아이들이 생각났다. 환하게 웃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빙그레 웃음을 지어본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그 시작을 영광스럽게 안겨준 심사위원님들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1965년 충남 서산 출생 ▷동국대대학원 문창과 졸업 ▷서울디지털대학교주관 사이버문학상 시부문 수상 ▷용인대학교 근무.

 

 

<출처> 2010. 1. 1 / 한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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