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순례 (48) : 타바-에일랏-아카바
'007작전'을 방불케 하는 3개국 입출국 과정
- 이집트에서 육로로 요르단 가는 길 -
글·사진 남상학
▲이집트에서 육로를 이용하여 요르단으로 가려면 먼저 이집트 타바 국경을 통하여 이스라엘 에일랏으로 들어가 다시 요르단 아카바 국경을 넘어는 절차를 밟이야 한다.
우리 성지 순례단의 다음 일정은 이집트에서 순례를 마치고 육로를 이용하여 요르단에 입국하는 것이었다. 카이로를 출발한 우리는 '아흐마드 함디 터널'을 통해 시나이 반도를 거쳐 타바(Taba) 국경으로 향했다. 이집트에서 육로로 요르단을 가기 위해서는 이스라엘과 접경을 이루고 있는 타바를 거쳐 이스라엘의 에일랏(Eilat)을 지나 요르단의 항구도시 아카바(Aqaba)로 가는 것이 제일 빠른 길이기 때문이다.
이집트 지역 성지 탐방도 쾌나 의미 깊은 것이었지만 이집트에 대한 전체적인 인상은 광활하면서도 척박한 사막의 지루함과 주민들이 오랜 기간 빈곤의 악순환을 거치면서 무기력한 삶에 젖어 있는 듯한 느낌이었기에 한편으론 빨리 벗어나고 싶은 감정이 앞섰다. 우리는 오늘 중 아카바에 도착하여 하루 밤을 보내고 내일 아침부터 요르단 성지를 둘러보는 것인데, 문제는 까다롭기로 유명한 국경 통과가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이 급선무였다.
이집트의 타바 국경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4시 30분경이었다. 타바는 시나이 반도 동쪽 아카바만(灣)의 북단에 위치한 휴양도시로 붉은색 바위산과 홍해(紅海)의 수려한 경관으로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시나이는 1967년 제3차 중동전쟁(6일 전쟁)에서 이스라엘에 의해 점령됐으나, 이집트는 이스라엘과의 평화협정으로 1982년에 시나이 반도를 돌려받았으나, 타바는 1989년에야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타바가 자국 국경 안에 위치해 있다며 반환을 거부하다가 결국 국제 중재에 굴복하여 이집트에게 돌려준 것이다.
22년간 타바를 점령했던 이스라엘은 이곳을 아직도 자신들의 뒷마당으로 여길 정도로 애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곳 국경 도시인 타바는 경비가 삼엄할 뿐더러 양국간에 항상 분쟁이 일어날 수 있는 소지가 있는 곳이다. 실제로 2004년 10월에는 타바에 있는 힐튼호텔에서 아랍의 소행으로 추축되는 테러가 발생하여 100명이 훨씬 넘는 인원의 사상자가 발생한 적이 있다. 따라서 이곳에서 국경을 넘어야 하는 일은 여행자들에게는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타바에서의 출국 수속을 마치면 각자의 여행 가방을 손수 끌고 이스라엘 입국 심사장으로 가야 한다. 이집트에서의 출국 수속도 만만치 않지만 이스라엘의 입국 수속과 보안 검색은 까다롭기 그지없다. 오랫동안 살아온 팔레스타인을 몰아내고 가까스로 고토(古土)를 회복한 터에 국토가 아랍 세력으로 둘러싸여 그들과 끊임없이 국토 분쟁을 계속하고 있는 형편이고 보면 당연할 수밖에 없으리라. 그러니 이곳을 통과해야 하는 우리들로서는 긴장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이미 우리는 가이드로부터 사전교육을 받고 있었다. 무슨 트집을 잡을지 모르니, 친절히 ‘샬롬’ 인사만 하고 무엇을 물어보더라도 아는 체하지 말 것과 무조건 미소만 지으라고 했다. 이곳에서는 보안검색을 위한 질문을 많이 하는데 조금이라도 영어를 한다는 걸 알면 질문을 많이 받게 되고 그 질문에 걸맞은 답변을 못하면 의심의 소지가 종종 생기므로 아무 것도 아닌 일에 공연히 시간만 허비하게 된다고 했다.
입국장으로 들어서는 입구에는 무장한 군인들(여군 포함)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변과 출입하는 사람들을 살피고 있었다. 입국 심사장에는 앳되고 어려보이는 여직원 둘이서 근무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두 줄로 길게 늘어서서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통과를 기다렸다. 그런데 두 여직원은 서로 얘기를 나누며 우리의 급한 사정은 아랑곳없이 급할 게 없다는 태도로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요르단에 입국하려면 시간이 촉박하다는 가이드의 말을 여러 차례 들어온 우리로서는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고 조바심이 날 수밖에.
"샬롬!"의 인사 덕분인지 예상과는 다르게 쉽게 통과 사인을 해 주었다. 그런데 우리 일행 중 젊은 친구 네 사람을 지목하여 별도로 지정된 라인에서 검사를 받게 했다. 검색직원은 이들의 가방 속의 옷가지와 헤어 드라이기, 책, 신발 등 작은 소지품 하나하나까지 세심하게 촉수검사를 하고, 그리고 검사한 가방을 싸도록 해서 다시 x-ray 기계에 재투시하여 정밀검사를 했다. 또 개인의 휴대가방과 주머니 속의 물건 등을 몽땅 꺼내고 문형 탐지하는 절차를 거친 것이다.
짐작컨대 테러 용의가 있어서라기보다 젊은이들을 대표격으로 뽑아 세밀하게 검색함으로써 여행객 전체에게 보여주는 전시적인 효과를 거두려고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그 바람에 먼저 통과한 일행이 이들의 통과를 마칠 때까지 40여분 정도 기다려야 했다. 법무부 심사를 받는 일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한국의 빠른 행정과 친절한 서비스 정신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어 보였다.
긴장은 많이 했어도 까다로운 이스라엘 입국심사를 무사히 마쳤다는 것에 안도감이 들었다. 국경의 긴장감과는 달리 홍해를 끼고 있는 국경의 모습은 너무도 푸르고 아름다웠다. 잠시 건물 밖 벤치에 앉아 무사히 빠져나온 것을 자축(?)하면서도 우리의 마음은 여행의 피곤함 때문인지 긴장이 풀려서인지 축 늘어졌다.
그런데 우리의 팀장인 박 소장이 황당한 표정으로 황급히 다가오더니, 우리를 태울 버스가 도착하지 않아 시간상 요르단 입국이 불가능할 지도 모른다며 까맣게 질려 있는 모습이다. 긴급히 회사에 연락해 보았으나 답변은 오래 전에 버스가 현장으로 떠났는데 도착하지 못한 이유를 모른다다는 것이었다. 경험 많은 박 소장의 견해로는 기사가 버스를 몰고 이곳으로 오다가 기도 시간이 되어 버스를 세워두고 메카를 향한 기도에 참여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어쨌거나 기다려도 버스는 오지 않았다.
박 소장은 머뭇거림 없이 인근에서 업무를 수행 중인 이스라엘 경찰차로 달려가 여자 경찰 간부와 한참 동안 얘기를 나누더니, 우리에게 다가와 35명이 5명씩 조를 짜서 요르단 입국사무소까지 택시로 이동하라는 것이다. 만약 여기서 지체하면 길 위에서 1박을 해야 한다고 다그쳤다. 그의 얼굴에는 비장감까지 돌았다.
박 소장은 몇 개 국어를 구사할 줄 아는 외교적 수완과 능력이 탁월한 사람이었다. 이스라엘 경찰에게 요르단 아카바 국경 입국사무소에 연락하여 입국심사를 한 시간 정도 연장해 달라고 요청하여 승락을 받았다는 것이다. 요르단이나 이집트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입출국 업무를 단축하는 사례가 많고, 더구나 오늘은 그들의 안식일이어서 모든 사무를 예정시간보다 일찍 끝내는 것이 관례라고 했다. 거기다가 두 나라는 서로 적대시하는 터에 업무 시간을 한 시간 연장한다는 일은 거의 불가능한 일인데 가능케 했다는 것이다.
내가 탄 택시는 우리의 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쏜살같이 달렸다. 타바에서 불과 10분 거리인 이스라엘의 도시 에일랏(Elat)에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에일랏은 구약에는 ‘엘랏’(신 2:8) 혹은 ‘엘롯’(왕상 9:26, 대하 8:17)이라고 불렸다. 이곳은 에돔족의 항구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광야에서의 긴 여정을 마치고, 사해 남쪽의 아라바를 지나 엘랏과 에시온 게벨 곁으로 모압 광야 길로 접어들었을 길이었다.(신명기 2:8) 뿐만 아니라 에일랏은 솔로몬의 무역항(대하 8:17-18)이었고, 여호사밧과 아하시야 왕의 관심지역이었던 곳이다.(대하 20:35-37)
지금의 에일랏은 이집트의 타바, 요르단의 아카바와 연하여 바로 마주 보는 위치에 있는 가까운 거리에 있었으나 이집트와는 판이하게 건물과 도로가 잘 정비되어 있었다.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독립당시 이스라엘 땅이 되었고, 홍해로 이어지는 이스라엘 유일의 항구라는 입지적인 조건을 살려 1963년 예루살렘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개설되면서 신흥 휴양지로 탈바꿈했다는 것이다.
그 후 겨우 2~3백명의 주민에서 10여만 명의 주민이 거주하는 지역이 되었으며, 홍해를 이용한 관광지로서 전 이스라엘에서 가장 각광을 받는 도시가 되었다.
우리가 탄 택시는 제일 먼저 요르단 아카바 국경 입국심사장에 도착했으나 이곳 심사장에는 입국 심사를 맡은 사람 외에는 사람이라고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먼저 와 있어야 할 박소장의 택시는 우리보다 좀 늦게 도착한 것이다. 알고보니 분초를 다투는 황급한 사정을 알아차린 택시기사가 요금을 올려달라며 트집을 부리다가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일부러 다른 트집을 잡으며 저속으로 달리더라는 것이다.
천신만고 끝에 요르단 국경에 도착하여 입국 수속을 마쳤을 때는 박 소장을 위시하여 일행 모두가 영화 속에서 본 <007작전>의 주인공과 같은 기분이었다. 순간순간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았다면 거의 불가능한 일이 현실적으로 일어난 것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여정도 사정을 다르더라도 분명히 이러했으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에 힘입어 이곳에 무사히 도착한 것을 기뻐하며 감사의 박수를 올렸다.
우리는 대기하고 있는 버스에 올라타고 아카바로 향했다. 요르단 현지에서 우리를 기다린 가이드 정향현 자매가 인사를 했다. "광야의 여정을 잘 이기고 오셨습니다. 여러분 환영합니다" 그리고 아카바에 오셨다는 말과 내일 일정을 잠시 안내했다.
나는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어둠이 내린 창밖을 내다 봤다. "정말 광야의 여정이 쉽지 않은 것이었구냐!,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끔찍이 사랑하셨기에 이런 훈련을 시킬 수밖에 없었구나! " 이런저런 생각에 잠길 무렵, 아카바 거리의 불빛이 눈에 환하게 비쳤다. 바로 여기가 고대의 에시온 게벨이 아닌가? 출애굽 여정 때 이스라엘 백성이 진을 쳤던 지역이며, 솔로몬 때에는 국제 무역항으로 발전한 곳이기도 했다.(민 33:34-35, 신 2:8, 왕상 9:26)
오늘날 이곳에는 고대 에시온 게벨에 있었던 솔로몬의 구리 제련소의 흔적이 있다고 했다. (신 2:8, 왕상 22:48) 그러다가 10세기 말엽 애굽의 시삭에 의해 파괴되었다가, 아사 왕 때에 에돔을 점령하면서 여호사밧 왕 때에 이르러 다시 복구되어 해상 무역을 재개하였으며 주전 6세기까지 홍해를 통한 해상 무역의 중심지로 그 전성기를 이룬 곳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지금 요르단 남서부에 자리 잡고 있는 항구도시 아카바는 해륙교통의 요지로 일찍이 육로로 카이로에서 메카로 가는 순례루트의 식량보급지로서 중요했다. 또 주변을 통과하는 아랍계 유목민의 교역지였던 내륙국 요르단의 유일한 해항이다. 1955년에는 새로운 항만설비가 완성되어 인광석·칼륨염·야채 등을 수출한다.
고대에는 왕의대로가 연결되는 교통로로 이용되었고, 로마시대 때는 시리아의 다마스커스와 암만, 페트라를 연결하는 도로망이 건설되어 이 길을 통하여 이집트와 팔레스타인 지역을 오가는 교통의 요지가 되고 있다.
우리는 앞길을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늦은 시간에 특별히 요르단 입국업무를 보아준 분들께 고마움을 느끼며, 요르단의 유일한 해변 도시 아카바(Aqaba)의 캡틴관광호텔(CAPTAIN Touris Hotel)에 여장을 풀었다.
▲ 타바 국경으로 향하는 버스에서 광야지역을 촬영하였다.
▲ 타바 국경 근처의 이모저모, 이스라엘 에일랏의 입국장이 보인다.
▲어렵게 이스라엘 에일랏으로 입국
▲해변도시 에일랏의 풍경
▲에일랏에서 도시락으로 점심식사
▲요르단 아카바 국경, 어느덧 노을이 물들었다.
▲ 아카바에서 여장을 푼 캡틴 관광호텔 (이튿날 아침 사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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