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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조선일보 사랑시

사랑시[44] : 백년(百年) - 문태준

by 혜강(惠江) 2008. 11. 13.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44]
 
                             백년(百年) - 문태준
 

                  

                 ▲ 일러스트=이상진
 

 

       와병 중인 당신을 두고 어두운 술집에 와 빈 의자처럼 쓸쓸히 술을 마셨네
       내가 그대에게 하는 말은 다 건네지 못한 후략의 말
       그제는 하얀 앵두꽃이 와 내 곁에서 지고
       오늘은 왕버들이 한 이랑 한 이랑의 새잎을 들고 푸르게 공중을 흔들어 보였네
       단골 술집에 와 오늘 우연히 시렁에 쌓인 베개들을 올려보았네
       연지처럼 붉은 실로 꼼꼼하게 바느질해놓은 百年이라는 글씨
       저 百年을 함께 베고 살다 간 사랑은 누구였을까
       병이 오고, 끙끙 앓고, 붉은 알몸으로도 뜨겁게 껴안자던 百年
       등을 대고 나란히 눕던, 당신의 등을 쓰다듬던 그 百年이라는 말
       강물처럼 누워 서로서로 흘러가자던 百年이라는 말
       와병 중인 당신을 두고 어두운 술집에 와 하루를 울었네

  

 

 

<해설>  이별을 생각하면 사랑이 더 귀해진다

  - 김선우·시인

 

  내가 죽고 나면 당신은 어떻게 살지? 사랑하는 사람을 보며 가끔 생각한다. 내가 없어도 내 사랑하는 사람이 지상의 삶을 잘 갈무리하며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인생엔 저마다 감당해야 할 수레바퀴 시계가 있어서 사랑하는 사람들도 결국엔 홀로 떠나고 홀로 남는다. 맑은 날 사랑하는 사람과 햇살 고운 창가에 앉아 죽음을 생각해보라. 이별을 생각하면 사랑이 더 귀해진다. 영원히 살 것처럼 꿈꾸고 내일 죽을 것처럼 오늘을 살라고 하지 않던가. 삶과 죽음은 한몸이다.

  문태준(38) 시인의 시를 읽는 일은 지상의 생명붙이들이 가진 저마다의 삶과 죽음의 역사에 동참하는 일. 들숨과 날숨이 고루 드러나는 잔잔한 숨결의 기록들을 읽는 일이다. 그의 시에 등장하는 사람과 사물들은 낱낱이 귀하고 서럽고 아름답다. 또한 고독하다. 문태준은 고독을 저어하거나 피해가지 않는다. 사랑처럼 고독 역시 삶의 일임을 알며 기꺼이 고독과 이별을 영접하여 맨발을 닦아드리는 시인. 많은 독자가 문태준의 시를 사랑하는 것도 우리가 스스로 알고 있는 고독의 감각에 섬세한 언어의 오솔길을 놓으며 그가 우리의 일상과 동행하기 때문일 것이다. 불교방송 피디 일을 하는 바쁜 생활 속에서 일기를 쓰듯 시를 쓰는 문태준은 하루라도 시를 쓰지 않으면 허전함을 느끼는 시인이다. 그에게 시는 일상적인 기도이고 백팔배이다. 이렇게 눌러쓴 그의 시가 갈무리하는 고독과 이별은 고립된 병리가 아니라 애잔하고 따뜻한 삶의 일부로 우리 옆에서 숨 쉰다. 많은 이들이 사랑하는 〈가재미〉가 그랬듯이 그의 시는 세상만물을 따뜻하게 문병(問病)한다. 당신 아프구나… 감각하는 순간, 아픈 존재 옆에 함께 누워 고요히 함께 앓는다.

  '와병 중인 당신을 두고 어두운 술집에 와 하루를 우는' 시인의 울음은 울음인 줄도 모르게 나직나직하여서 어느새 숨결처럼 몸에 스민다. 함께 기쁘고 함께 아픈 자비(慈悲)의 마음이 문태준 시의 터전이니, 누군가 아프고 화자인 나는 술집에 왔다. 내가 함께 아프다. 술집에서 우연히 시렁에 쌓인 베개들을 올려보았는데 베갯모에 '百年'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흔히 목숨 수(壽)자나 복 복(福)자를 수놓는 베갯모에 수놓아진 '百年'이라는 글씨에 시인의 시선이 멎고, 사랑의 약속인 '백년가약'이 당신의 와병 속에서 무량하게 글썽거리기 시작한다.

  삶과 죽음, 사랑과 이별이 공존하는 '백년'이라는 말은 세속적이면서도 영원을 꿈꾸게 한다. 백년을 혼자 살 수는 있어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백년을 살기는 힘드니, 유한한 존재의 안타까운 사랑의 열망이 '백년가약'이라는 말을 만들었을 터. 시인이 가만히 열어 보여주는 백년의 비밀 속에는 백 겹의 시간이 출렁인다. 사랑하는 사람들아, 당신의 '백년'은 어디에 있는가.

 

<출처> 2008. 11. 12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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